노태우 부동산정책①…비극의 잉태
노태우 부동산정책①…비극의 잉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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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집값 천정부지, 민란설까지 대두…노태우 “집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

 

경제수석, 아파트 한 평에 1,000만원이라니, 집값이 이게 뭐요.”

각하, 그렇습니다. 노사분규로 가뜩이나 어수선한데 집값마저 이러하니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래서야 되겠소. 무슨 수를 써 보시오.”

잘 알겠습니다. 곧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6공화국 정부가 출범한 다음해인 19891월초의 어느날. 노태우 대통령은 문희갑 경제수석을 불러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는 집값을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문 수석은 198812월 부임할 당시부터 정치와 사회가 불안한데 집값마저 뛰면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위태롭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영세서민을 위한 획기적인 주택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문 수석은 대통령 집무실을 빠져나와 건설부문을 맡고 있는 홍철 비서관을 급히 찾았다.

홍 비서관, 각하의 지시요. 무주택 서민의 집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만들어 보시오. 건설부 업무보고 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 때 청와대 비서실이 내놓은 방안은 영구임대주택 공급방안이었다. 서울을 비롯, 5개 직할시에 25만 가구의 영구임대주택을 공급, 성냥갑 같은 판잣집에 몇 세대가 끼어 사는 영세서민들에게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에 살도록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방안도 주택과 토지에 대한 투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1986년부터 3저 현상으로 발생한 280억 달러의 무역흑자와 3년 연속 12%에 달하는 높은 경제 성장으로 생긴 자금 여력은 산업자금으로 전환되지 않고 부동산에 몰렸다.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실이 조사한 아파트 시세를 보면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65평형)198792억원에서 198893억원, 8941945,000만원으로 폭등했다. 불과 1년반 사이에 2배 이상 올랐고 집주인은 가만 앉아서 25,000만원의 불로소득을 챙긴 것이다. 서울 옥수동 현대아파트(38평형)의 분양가격은 당시 5,000만원(평당 134만원)이었으나, 채권입찰액이 8,500만원에서 1억원이나 붙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 폭등하는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 소동이 빚어지는 등 집을 가진자갖지 못한자의 계층 격차는 심화되기만 했다.

땅투기 열풍도 전국을 휩쓸었다. 대도시는 물론 산간 벽지의 땅도 개발 예정이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휴전선 일대 비무장지대까지 땅값이 들먹거렸고, 강원도 산골의 경치 좋은 곳, 호남 곡창지대 할 것 없이 투기바람이 스쳐갔다. 토지공개념연구회의 분석에 따르면 19911월 기준 전국의 땅값은 도합 1,351조원(공시지가 기준)이었으나, 다음해 1월엔 1,651조원으로 1년 사이에 무려 263조원의 땅값 상승이 좁은 국토에서 발생했다. 이는 당시 GNP(국민총생산)보다 많은 것이었으니, 국민들 사이에 땀 흘려 일하기보다는 부동산 투기에 매달리는 분위기가 만연할 수 밖에 없었다.

6공화국에서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박승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6공화국 초기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예상된 일이었어요. 무역흑자에 따른 여유자금이 증시로 물려 투기열풍을 일으킨 뒤 다시 땅과 주택으로 이동, 투기광풍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간의 경제성장으로 국민들의 의()와 식()이 해결됐지만, 6공화국 초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주택으로 국민적 욕구가 분출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 건설된 5대 신도시의 하나인 산본 신도시 /김현민
노태우 정부 시절에 건설된 5대 신도시의 하나인 산본 신도시 /김현민

 

노태우 정부는 임기 5년 내내 부동산 문제와 씨름했다. 정치권, 아니 사회 전체와의 여론 전쟁을 벌여가며 토지공개념 도입과 신도시 건설을 밀어붙였고, 재벌의 정치참여를 촉발하면서까지 ‘5·8 부동산조치즉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을 강행했다. 덕분에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던 땅값·집값이 1991년 하반기 들어 한풀 꺾이기 시작했고, 경제개발 이후 떨어진 적이 없던 땅값이 1992년엔 마이너스를 기록, 한국의 토지신화를 붕괴시키는 또다른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6공화국의 부동산 정책, 특히 토지 정책은 순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6공화국 최대의 비리사건이라 일컫는 수서 사건과 정권말의 정보사 부지 사기사건도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은 인건비 상승, 건재재난에다 시중자금 애로현상, 항만 적체까지 불러 일으켰다. 벽돌을 찍어 내듯 올라가는 신도시 아파트는 부실공사로 무너졌고, 이와 동시에 건설경기에 매달렸던 거품 경기가 가라 앉으면서 국내 경기는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문희갑 경제수석의 말이다.

신도시 건설과 주택 200만호 건설은 시행 초기부터 무리한 계힉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무리하더라도 추진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매년 40호씩 5년간 지을 계획이었는데, 이것 자체도 무리한 물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활성화되고 주택수요가 크게 늘면서 어떤 해(1990)70만호가 건설됐는데, 이게 큰 부작용으로 나온 것입니다.”

6공화국 부동산 정책은 토지에 대한 수요억제, 주택에 대한 공급확대로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정국과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리면서 집권 첫해를 보낸뒤 강성 인물로 평이 나 있는 문희갑 경제기획원 차관을 경제수석으로 부른다. 문 수석은 부동산 투기 척결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를 받들어 토지공개념 도입과 주택 200만호 건설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부동산 시장의 수요 억제와 공급 확대를 노린 이들 두 정책은 박승 수석 때부터 추진돼 온 것이나, 문 수석 들어와 구체화된다.

 

1989413일 문 수석은 홍철 비서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서울 서남쪽 분당 상공을 둘러봤다. 분당 지역이 서울 외곽의 신도시 예정지구로 적합한지를 답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는 상계 주택단지 건설후 더 이상 집 지을 곳이 없었고, 신도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녹지로 묶어 놓은 분당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문 수석의 보고를 듣고 노 대통령은 분당을 신도시 후보지로 결심하게 된다.

이어 박승 건설장관은 강남북의 균형 개발을 위해 한강을 중심으로 분당의 대칭 지점에 또 하나의 신도시를 건설해야 한다고 노 대통령에게 건의, 부지를 물색한 끝에 일산이 분당에 이어 또다른 신도시 후보지로 결정됐다.

분당·일산의 입지 선정에 따라 이미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선정된 평촌·산본·중동과 함께 수도권의 5개 대규모 아파트군에 대한 공사에 들어갔다.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주택 200만호 건설은 대단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 단군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 주택이 600만호에 불과한 점을 감안할 때 4~5년만에 200만호를 짓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 일이지 않는가라며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이었다면, 나는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만큼 노 대통령은 신도시 건설에 남다른 자부심을 느꼈다.

온 국토를 파헤치고 낡은 집을 부수며 일으킨 주택 200만호 건설의 대역사는 정권말기가 되면서 노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안겨준다. 수서 사건과 정부사터 사기사건은 노 대통령의 치적에 오명을 남겼고, 건설경기의 호·불황이 전체 경기를 좌지우지하는 경제구조의 왜곡현상을 초래했다.

땅은 유사 이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구분하는 생산수단이었고, 동시에 생활의 터전이었다. 경제개발과 함께 땅은 재테크의 가장 좋은 수단으로 부각됐고, 땅 위의 창작물인 주택을 대상으로 싸움을 벌인 정권은 없을 것이다.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조치(5·8 조치)로 재벌과 싸우고, 토지공개념으로 여당인 민정당과 싸우고, 급속한 신도시 건설에 따른 부실공사로 여론과 싸우고.

6공화국의 부동산 정책 가운데 일찍부터 제도화되고 뿌리 내린 것이 토지공개념의 도입이다. ‘사개념이 땅을 주인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공개념은 여기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국유 또는 공유의 개념과는 다르다. 입법 과정에서 여당과 재계의 반발에 부딛쳐 상당 부분 수정되었지만, 택지소유상한법·개발이익환수법·토지초과이득세법등 공개념 3개법은 토지투기를 억제하는데 전가의 보도로 이용돼 왔다.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드라마는 땅을 무대로 정부와 정치권, 재계, 그리고 일반 국민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면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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