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의 비밀⑨…팔레스타인 건설하다
로스차일드의 비밀⑨…팔레스타인 건설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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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몽, 팔레스타인 정착촌 지원…1917년 영국,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건국 지원

 

로스차일드 가문은 창업자 마이어 암셸은 물론 그 후손들도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유대교를 가르쳤고 이디시어를 배우도록 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은 기독교 휴일인 일요일에 쉬지 않고 유대교 휴일인 토요일에 쉬었다. 유대인의 초막절이 되면 사무실에 종려나무 가지를 걸어 놓았다.

결혼은 가문 내에서 짝을 찾는 족내혼(族內婚)을 권장했으며, 가문 이외의 사람을 사위나 며느리로 받을 때엔 반드시 유대인이어야 했다. 기독교도와 결혼한 딸들이 있었는데, 가문과 영원히 절연시켰다.

로스차일드는 유대인들을 위한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어느 유대 노인이 양들을 빈으로 끌고와 오스트리아의 살로몬 로스차일드에게 팔아달라고 했다. 살로몬은 재상 메테르니히에게 양을 사달라고 부탁해, 일국의 재상이 양 판매에 나서는 촌극도 빚어졌다.

나폴리의 카를 로스차일드는 로마 교황청에 융자 교섭을 하면서 유대인 게토를 없애 달라고 압박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유대인에게 부동산 매입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려 할 때 영국과 프랑스 로스차일드가 그 나라 국채 매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1880년대 전세계 유대인은 500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전세계에 퍼져 살았는데, 러시아 폴란드 발칸 반도의 유대인은 극심한 빈곤 속에 현지 정부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다. 독일의 많은 주에선 유대인들을 게토에 가두었다. 유럽에 금융제국을 형성한 로스차일드는 동족의 아픔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유대인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황제 알렉산드로 2세가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암살되었는데, 암살자는 유태대인이었다. 후임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1882년 악명 높은 반유대인법을 공포했다. 유대인들은 상거래 활동에 부당한 제한을 받았고 수십만명이 게토에 갇혔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폴란드와 발칸 반도에서도 유대인들은 방화와 약탈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반유대주의를 국시로 삼은 러시아는 유대인의 3분의1을 죽이고, 3분의1은 동화시키고, 나머지 3분의1은 추방한다는 음모를 드러냈다. 러시아와 그 영향권의 나라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서유럽으로 쫓겨났다.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으로 떠났다.

런던과 파리, 빈의 로스차일드는 모금운동을 벌여 동유럽에서 밀려드는 유대인 이민자들을 지원했다. 로스차일드는 러시아가 발행하는 국채 매입을 거부하고 영국 정부가 유대인 탄압을 중단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새로운 유대인들이 유럽의 주요도시에 밀려오자 서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19세기말에 런던에 15, 빈에 7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되었다.

이 무렵 유대인 이주자들을 선조의 땅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 살게 하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유대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시온의 땅으로 건너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 1840년대에 6천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1880년대에 그 숫자가 2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주자들은 농사를 지은 경험과 농사기술도 없었다. 러시아는 유대인에게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주위의 이슬람 사람들과 마찰도 일어났다. 사막의 땅에 맹목적으로 농사를 짓다가 실패한 경우가 허다했다. 초기 정착자들은 굶주림과 극심한 가난에 허덕였다. 서유럽에서 누군가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에드몽 로스차일드와 사무엘 모히레버 /위키피디아
에드몽 로스차일드와 사무엘 모히레버 /위키피디아

 

188292일 파리 로스차일드 제임스의 막내 에드몽(Edmond James de Rothschild)은 프랑스 대랍비의 소개로 폴란드 출신 사무엘 모히레버(Samuel Mohilever)라는 랍비를 만나게 되었다. 이 랍비는 에드몽에게 토론을 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지원하라고 요청했다.

에드몽은 당시 그림이나 수집하고 고고학에 몰두하고 등산이나 즐기며 외부 세계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부잣집 귀공자였다. 그는 랍비와의 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에드몽은 모히레버가 말도 꺼내기 전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일은 형 알퐁스와 구스타브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시온니즘에 뛰어든다.

 

에드몽은 유대인의 고향에 실질적인 자금지원을 했다. 텔아비브 동남쪽의 라숀 레치온(Rishon LeZion) 농장은 1882835 에이커의 땅을 사 우크라이나에서 쫓겨온 유대인들을 이주시켰다. 에드몽은 모래 땅에 물을 얻기 위해 지하수 전문가들을 보냈다. 지하 20~25m 지점에서 물이 나왔다. 땅이 개간되고 학교가 세워지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150명으로 출발한 인구는 1890년에 359, 1900년엔 526명으로 늘어났다. 지금 이 곳은 25만명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4위의 도시로 변해 있다.

1890년대에 팔레스타인에는 7개의 정착촌이 개발되었는데, 3개는 파산 직전에 있었다. 에드몽은 이들 정착촌에 돈을 대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했고, 다른 정착촌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에서 몰려 왔다. 유럽에 떠돌던 난민들도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에드몽은 너무 많은 유대인들이 한꺼번에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억제했다. 경작자에 비해 많은 사람이 몰리면 굶어 죽는자가 생기게 되고, 너무 빨리 유대인 마을이 확장되면 오스만투르크와 이웃 이슬람 주민들의 경계심을 촉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에드몽은 정착촌에 독재를 실시했다. 정착민들 사이에 싸우고 서로 죽이는 사태에는 직접 개입해 잘잘못을 따졌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정착촌에는 자금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시온주의자들이 건설한 이스라엘 /위키피디아
시온주의자들이 건설한 이스라엘 /위키피디아

 

가장 큰 논쟁은 안식년이었다. 구약성서(레위기)에는 모든 땅은 7년이 지나면 1년을 쉬도록 규정해 놓았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랍비들은 정착촌에도 휴경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 견해를 가진 에드몽은 성경 글귀에 매달려 있는 랍비들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안식년제를 무시하고 매년 농사를 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몽과 랍비의 논쟁은 유대 사회에 큰 논쟁으로 번져갔다.

이때 유럽의 한 랍비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7년째 되는 안식년에 땅을 놀리지 않고 주변 이슬람 농민들에게 빌려줬다가 이듬해부터 다시 농사를 짓게 하자는 것이었다. 에드몽도 랍비들과의 충돌을 피해 이 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중재안이 사기라로 주장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논쟁은 리투아니아의 대랍비가 나서서 이스라엘 랍비를 설득함으로써 간신히 진정되었다.

 

에드몽은 처음에 익명으로 기부를 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이 알려질 때 은행이 반시오니스트들에 의해 반발을 살 가능성도 있고, 오스만투르크를 자극할 것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사람들의 입을 타며 에드몽이 팔레스타인 정착촌의 배후지원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에드몽은 정착촌 농지에 잘 맞는 작물이 무엇일까도 연구했다. 그는 한 개척지에 포도를 심도록 했다. 포도 농사는 성공했고, 다른 정착지에도 포도 재배가 확대되었다.

에드몽은 시오니즘의 정치화와 거리를 두었다.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이 찾아왔을 때 그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에드몽은 순수한 자선행위를 할 뿐 민족주의 정치운동을 하는 게 아님을 여러 사람들에게 강조했다.

 

18875월 그는 처음으로 시온 땅을 밟았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통곡의 벽에 기도를 하고 그 곳을 사들이자고 제안했다. 그 벽 주위에 살던 이슬람 교도들이 반대했다. 그러자 그는 그곳보다 더 넓은 땅을 사주겠다고 제의해 설득에 성공했다. 에드몽은 75만 프랑을 준비하고 오스만투르크 당국과도 매입 계획을 승인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랍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그곳을 사들이면 대살륙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의 경고가 있었다며 반대했다. 에드몽은 랍비의 말을 수용했다. 종교적, 민족적으로 상징적 유적지를 매입할 경우 정치적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이다.

허허벌판이던 개척지는 서서히 깔끔한 마을로 발전했다. 사막의 불모지에 오렌지 과수원과 포도 농장이 펼쳐지고 생산물이 수확되고 일터는 활기가 넘쳐 났다. 에드몽의 역할에 감명받은 로스차일드 친척들도 시온 정착촌에 기부금을 듬뿍 냈다.

 

1890년대 이스라엘 정착촌 라숀 레치온 /위키피디아
1890년대 이스라엘 정착촌 라숀 레치온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 땅의 주권은 오스만투르크가 가지고 있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정착촌을 건설하고 내 나라를 만든다는 시오니즘은 주권이라는 높은 장벽에 부딛쳤다. 1897년 헤르츨을 중심으로 파리에서 제1회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해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약속했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적개심만 높였을 뿐이다. 로스차일드는 과격한 시오니즘 운동보다는 오스만투르크와 외교적으로 협력하면서 정착촌을 살려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쓸렸다.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로스차일드는 영국과 프랑스를 지지하며 독일에 맞섰다.

런던 로스차일드에는 라이어닐을 이어 나타니얼 메이어(Nathaniel Mayer)가 은행을 경영했다. 전쟁은 돈이 있어야 치른다. 재무대신 로이드 조지는 재무대신은 로스차일드 경이오라고 말할 정도로 영국 정부는 로스차일드에 의존했다.

1차 대전은 유대민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팔레스타인의 주권자 오스만투르크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했고, 영국은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동안 로스차일드는 시오니즘을 추진하면서 오스만투르크를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온건한 외교정책을 지지했는데, 이젠 투르크가 패전하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울 가능성을 기대할수 있게 되었다. 이럴 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월터 로스차일드였다. 그는 곤충학과 생물학에 빠져 숲을 헤메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늙은 제국 오스만투르크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1차 대전 초기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군은 투르크군에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오스만은 패전을 거듭하고 중동지역에서 이슬람 민족세력이 등장하면서 중둥지역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영국은 전후 중동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런던 로스차일드의 대표로 월터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의 지나친 정치운동을 만류하는 친척들도 있었지만, 그는 시오니즘이 성공하려면 국가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면서 전세는 바뀌었고, 영국군은 1917년말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영국 전시내각은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 내에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의 지지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영국 로스차일드의 의견을 검토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와 유대인 사이에 시온 국가 건설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월터 로스차일드는 외무대신 벨푸어를 몇차례 만나 유대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유대인 단체와 영국 정부 사이에 중매역할을 했다.

 

아서 벨푸어와 월터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아서 벨푸어와 월터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1917112일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외무대신은 런던 피카딜리에 있는 라이어닐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 남작의 집에 들러 편지를 손수 건넸다.

편지 내용은 짧막했다. “폐하의 정부(영국)는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팔레스타인에 수립하는 것을 적극 찬성하며,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영국정부가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 것이다. 유대인 국가(state)라는 표현 대신에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이 선택된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꺼림찍 했지만, 일단 그 내용을 수용키로 했다. 벨푸어 경의 편지는 영국 시오니스트 연합에 전달해 공개했다.

이 편지가 후에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불리는 것으로, 유대인 국가, 즉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단초가 된다.

 

영국은 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을까.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로스차일드를 활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1차 대전 3년째가 되어가던 1917년 영국은 전비가 바닥이 났다.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나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는 했지만, 뒤늦게 전쟁 준비를 하느라 병력이 유럽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약속하면서 유태 금융인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이 벨푸어 선언을 시작으로 한다. 로스차일드가 추진해온 시오니즘 운동이 영국의 양보를 얻어낸 낸 것이다.

이스라엘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차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드몽 로스차일드가 한 말을 기록해 두었다. “내가 없었다면 시오니즘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오니즘이 없었다면 나의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라 불리는 편지 /위키피디아
벨푸어 선언이라 불리는 편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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