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의 비밀⑩…히틀러의 탄압
로스차일드의 비밀⑩…히틀러의 탄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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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체포된 루이스, 당당한 태도로 대응…빈과 파리의 재산, 나치에 빼앗겨

 

20세기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불행한 시대였다. 18세기에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 나폴리의 5곳으로 확장한 로스차일드는 20세기초 프랑크푸르트와 나폴리에선 사업을 접고 런던, 파리, 빈의 세 곳으로 압축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선 서로 분열되었던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로스차일드는 배척된데다 그곳 가문에 아들이 없어 폐가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가업을 이어가던 로스차일드는 오랜 세월 현지에서 살면서 점점 태어난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조국이 없는 이 유대 은행가 후손들은 서로 단결한다는 선대의 원칙은 유지했지만 각국에서 번지는 국수주의에 함몰했다.

 

1914628일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유럽은 둘러 쪼개져 1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전선은 영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 일가를 갈라 놓았다. 일가는 자신들이 몸담은 나라를 위해 자금을 제공하고,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냈다. 100년전에 하나가 되어 나폴레옹과 대결하던 선조들과 달리 후손들은 이제 적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영국 로스차일드에서는 에블린 아칠이 전사하고 앤서니 구스타브는 터키 갈리폴리 전투에서 백병전을 치렀다. 프랑스에서도 너새니얼, 제임스 아르망과 모리스가 프랑스를 위해 전선에 나갔다. 오스트리아 가문에서는 오이겐이 러시아군의 총탄에 맞아 다리를 잃었다.

전쟁 와중에 영국 로스차일드는 별장의 부지를 군대에 제공하고 부자들에게 가해지는 고율의 세금을 내야 했다.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세 나라의 로스차일드는 무두 기진맥진했다. 런던 로스차일드의 안주인은 정원 산책길에 왜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는지 궁금해 했다. 이유는 엄청난 세금에 정원관리비가 모자랐던 것이다.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면서 부자로 사는 게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영국에선 피커딜리에 있는 설립자 나탄의 저택을 철거해야 했고, 거대한 부지를 공원으로 내놓아야 했다. 별장에 진열해 놓았던 수십만점의 동물 박제도 박물관에 내 놓았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사이 1920~1930년대에 로스차일드가의 쇠퇴는 눈에 띠게 드러났다. 전후 복구와 전쟁 배상금 문제, 각국에서 불어치는 내셔널리즘, 불황, 사회주의 운동은 로스차일드로 하여금 사업을 확대할 기력을 잃게 했다. 충직한 하인이 좌익 사상에 빠져 주인 말을 듣지 않아 쫓아 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사업을 같이 하던 각국의 왕실과 귀족들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공화국이 대세였고, 왕정은 영국에서만 겨우 유지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도 문제가 많았다. 부자 3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은 로스차일드가에서도 적용되는 것일까. 로스차일드 후손들이 4대 또는 5대로 내려가면서 선대의 진취적 기상을 잃었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했고, 돈을 버는 일보다 취미생활에 탐닉했다. 다양한 분야에 전문가와 지성인이 있었지만, 유능한 금융인은 찾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에드와르는 경마에 빠져 있었고, 알퐁스 마이어는 우표수집과 고전연구에 몰두했다.오스트리아의 루이는 폴로와 등산을 좋아했고, 오이겐은 예술활동에 시간을 허비했다. 영국 라이어닐 네이선은 정원 가꾸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들은 유복한 생활에 만족해 했다.

 

그러던 중에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유럽에도 닥쳐왔다. 유럽 가운데 오스트리아가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차 대전에서 패한후 발칸반도와 헝가리, 체코가 독립해 영토가 6분의1로 줄어들었고, 그만큼 정부의 재정력은 취약한 상태였다.

1930년 오스트리아 토지은행인 보덴크레디트인슈탈트(Bedenkreditanstalt)가 파산 위기를 맞았다. 재무대신은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를 맡고 있는 루이스 남작(Louis Nathaniel de Rothschild)을 찾아갔다. 로스차일드가 대주주인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로 하여금 토지은행을 매입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루이스는 거부했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후회할 거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후회할 상황이 온 것이다. 1년 후 1931511일 토지은행의 부채를 떠안은 크레디트안슈탈트는 파산을 선언했다. 이 은행의 영업규모가 당시 오스트리아 예산에 맞먹는 거대은행이었고, 이 은행이 쓰러져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은행들이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위기에 놓였다.

루이스는 런던과 파리의 친척들에게 구제금융을 부탁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로스차일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런던과 파리의 은행은 별개의 회사였고, 빈의 가문과 공유할 사업도 없었다.그러나 로스차일드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가문의 전통을 발휘했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루이스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두 은행은 빈의 크레디트안슈탈트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덕분에 크레디트안슈탈트는 간신히 살아났지만, 영국 로스차일드는 거덜이 났고, 프랑스 은행도 비상사태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공황이 지나가면서 런던과 파리는 대출금을 모두 돌려 받았지만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 진입한 나치군 /위키피디아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 진입한 나치군 /위키피디아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주의자들이 준동했다. 두 나라 나치 세력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고 주장했고, 1938312일 독일의 나치군은 오스트리아로 진격했다.

나치군이 들어오기 전에 빈의 로스차일드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오스트리아를 탈출했고, 남은 가족들도 탈출을 서둘렀다. 런던에 있던 큰형 알퐁세 마이어는 동생 루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딸 베티나와 그웬덜린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루이스는 조카 베티나와 그웬덜린을 스위스로 보내고 자신은 남았다. 두 조카딸들은 국경에서 붙잡혀 감금되었지만 간신히 국경을 넘을수 있었다.

빈에는 루이스만 남았다. 그가 남은 이유에 대해 상황을 안이하게 보고 피하지 않았다는 설과 공항에 갔다가 그를 알아본 나치 병사에 의해 여권을 빼앗겨 돌아왔다는 설이 있다.

그는 히틀러의 지명수배 명단의 맨 앞에 있었다. 빈이 점령된 뒤 곧바도 나치 병사를 태운 자동차가 루이스 남작 집에 도착했다. 이 대목에서 전설이 생겨난다.

집사는 남작님이 저녁을 드시는 중이라 지금 나가실수 없습니다. 면회 신청서를 내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당황한 나치 병사들은 그냥 돌아갔다. 나치 병사들이 돌아간후 집사와 친구들이 루이스에게 도망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남은 일만 묵묵히 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다시 나타났다. 그때도 루이스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소. 식사를 마치고 갑시다.” 나치 병사들은 루이스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체포했다고 한다.

루이는 1년 이상 감옥에 갇혔다. 심문을 받고 중노동도 했다. 파리와 런던의 일가는 나치에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나치는 루이스에 대한 몸값도 요구했지만, 보다 탐낸 것은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 소유하고 있는 비트코비체(Vítkovice) 산업단지였다. 비트코비체는 현재 체코에 있는데, 당시 히틀러의 나치가 군수공장을 짓기 위해 가지고 싶어 했던 공장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미 이 공장의 국적을 영국으로 넘겨 놓았다. 루이스는 나치가 이 공장에 군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치에 넘어가기 전에 어려운 작업을 거쳐 주인을 바꿔 놓았다. 오스트리아 정부에게는 이 공장을 가지고 있으면 독일에 대립적 위치에 있는 체코가 뺏을 것이라 설득하고, 체코 정부에는 오스트리아가 주인이 되면 독일이 침략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두 나라의 양해를 구한 다음에 주주들을 설득해 영국과 프랑스의 로스차일드에게 주식을 팔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트코비체 콤비나트는 영국 로스차일드가 소유한 얼라이언스가 대주주가 되도록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939년초 나치의 권력을 잡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루이스가 갇혀 있는 독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대뜸 비트코비체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는 끝까지 버텼다. 힘러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루이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루이스를 풀어주라고 했다.

그가 석방된 시간은 밤 11시였다. 루이스는 시간이 너무 늦어 수감자들과 작별인사를 하기 어렵다며 그날밤 그곳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수감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는 또다른 전설적 스토리가 전해온다.

루이스가 풀려날 때 몸값은 2백만 파운드였다고 한다. 그 돈은 영국과 런던의 로스차일드가 만들어 줬다. 루이스는 스위스로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나치 점령 하에서 홀로코스트를 면한 유대인이 되었다.

독일은 비트코비체를 끝내 빼앗지 못했다. 독일은 290만 파운드를 주고 비트코비체를 사들였으며, 체코를 점령한 이후 그 돈을 주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체코 공산당이 비트코비체를 국유화했지만, 영국은 몰수한 영국인 재산에 대해 배상을 청구함으로써 로스차일드는 끝내 체코의 재산을 돌려 받게 되었다.

 

로스차일드가 소유하던 체코의 비트코비체 콤비나트의 19세기 모습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가 소유하던 체코의 비트코비체 콤비나트의 19세기 모습 /위키피디아

 

2차 대전에서도 로스차일드의 젊은이들은 전투에 참여했다. 파리의 알랭과 엘리는 마지노선 전투에 배치되었다가 독일군의 전쟁 포로가 되었고, (Guy)는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했다. 런던 일가 가운데 필립은 모로코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건너갔고, 에드먼드는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했다.

나치가 점령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로스차일드 재산은 약탈당하고 사람들은 체포되었다. 친척들과 친구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사라졌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영국으로 건너가거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9년 나치는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프랑스에서는 19406월 비시에 괴뢰정권에 수립되었는데, 비시 정권은 나치와 협정을 맺었다. 그 가운데 국가의 적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몰수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로스차일드 프랑스은행은 전 재산이 빼앗겼다. 돈도 빼앗기고 저택이 보관했던 각종 미술품도 나치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이 끝난후 오스트리아와 파리 로스차일드는 나치가 약탈해간 미술품들을 찾아 돌려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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