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부동산정책③…개발 이익금 논란
노태우 부동산정책③…개발 이익금 논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3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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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갑 수석, 여론 업고 입법화 속전속결…땅부자들의 반격

 

토지공개념 제도 가운데 토지초과이득세(토초세)만큼 복잡한 개념과 이상한 논리를 갖고 출발한 제도도 없다. 실현되지 않는 이익에 대해 세금을 물리는 논리는 세법 원론에도 없는 내용이고, 루머에 의해 땅값이 올라도 세금을 올리는 무지막지한 세금이다. (당시 비판론자들은 토초세를 초토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투기를 초토화시킨다는 의미였다.) 이런 제도도 추진 당시에는 상당한 타당성과 지지를 업고 그 형상을 갖춰 나갔다.

토초세 부과에 대한 논리가 처음 제기된 곳은 서울 여의도 국토개발연구원에 설치된 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다. 나웅배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8·10 부동산종합대책을 발표하고, 토지공개념 제도의 확대 도입을 추진하면서 설치한 조직이다. 허재영 국토개발연구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기획원·재무·상공·건설부 등 정부 부처의 과장급 실무진, 국토개발연구원의 연구위원, 대학교수 등 35명으로 구성됐다.

토초세는 이 위원회에서 처음부터 논의된 사항은 아니었다. 문희갑 경제수석이 부임하면서 이 위원회는 논의에 가속도를 냈고, 특히 토지소유 제한과 개발이익 환수에 초점을 맞췄다. 개발이익 환수에 관해 논의하던 중 한 위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골프장이나 백화점을 지어 땅에서 엄청난 개발이익을 챙기는 사업자에 대해 개발부담금을 물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골프장이나 백화점 주변의 땅값도 덩달아 올라갑니다. 여기에도 부담금을 물려야 합니다.”

이 위원의 문제 제기는 곧바로 받아들여졌고, 공개념 연구위는 개발지역에는 개발부담금, 그 주변의 땅에는 개발이익금을 부과하기로 개념을 정리했다. 1989711일 이 두 내용을 포함한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이 입법예고된다.

당시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토지공개념 제도의 입법화에 깊이 관여한 국토개발연구원의 K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토지공개념 위원회에는 위원들의 독창적이고 즉흥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입법화된 것도 있어요. 토초세가 그런 것이지요. 미실현 이익에 세금을 물릴수 있느냐, 이 제도가 시행되면 전국의 나대지에 건설 열풍이 불어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반론이 제기됐으나, 청와대의 문 수석이 밀어 붙였습니다.”

개발부담금과 개발이익금은 개발대상 토지나, 그 주변의 땅이냐로 경계선을 구분했지만, 모두 부담금으로 해서 건설부가 관장하는 것으로 입법예고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개발부담금이야 골프장이나 백화점처럼 개발대상 토지에 직접 부과하면 그만이지만, 개발이익금은 해당구역 경계를 넘어 부과해야 할 경우도 있고, 땅값 상승폭을 추정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기획원의 젊은 사무관들 중에는 이런 법률이 어디 있느냐며 반대하기도 했고, 건설부도 막상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재무부 실무자들은 개발이익금을 없애고 종합토지세를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경제기획원 이형구 차관이 중재에 나섰다. 전국을 대상으로 징수 조직을 갖고 있는 재무부가 법안을 갖되, 보다 효율적인 징수를 위해서는 부담금보다 국세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재무부의 실무자들은 황당무계한 법률을 맡을수 없다고 버텼지만, 기획원이 설득했고 문 수석마저 재무부를 종용했다. 총리실에서 오랜 경험을 한 이규성 장관이 기획원의 조정을 받아들였고, 재무부는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중 개발이익금 부과제도를 가져가 토초세라는 법률을 다듬어 한달후인 825일 입법예고한다. 땅값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공한지에 오른 땅값의 50%를 부과하는 토초세는 이렇게 해서 생성된 것이다.

한 학자의 아이디어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입법 과정을 거쳐 효력을 발휘할 정도로 토지공개념 제도는 속전속결로 처리됐고, 그 배후에는 문 수석이 막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서 내려다본 아프트군 /김현민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서 내려다본 아프트군 /김현민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의 설명이다.

그 때는 3저 현상과 고도성장으로 벌어들인 소득 증대분과 국제수지 흑자가 부동산 투기에 몰려 흥청거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노 대통령도 부동산 투기의 심각성을 인식해 공개념 입법을 서두르라고 지시했고, 뭔가 비상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의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순방을 포기하면서 투기에 대한 비상조치를 강구했습니다.”

토지공개념 제도의 도입은 198812월 문희갑씨가 경제수석으로 부임하면서 본격 추진된다.

문 수석은 부임과 동시에 부동산 투기와 씨름했다. 그는 단기 대책으로 국세청을 동원, 투기에 대한 세무조사를 확대했다. 국세청의 인력과 기구를 대폭 보강했지만 폭등하는 땅값과 주택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문 수석은 또다른 긴급 대책으로 주택 200만호 건설과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경제 개혁의 기회를 놓치면 몇십년의 세월을 놓친다고 역설하면서 단기 대책과 병행해 공개념 도입과 실명제 실시를 밀어붙였다.

문 수석은 부임하자마자 건설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제부처 국장급 8명으로 토지공개념도입 대책반을 구성했다. 이 대책반은 공개념연구위원회의 연구사항을 토대로 구체적인 법률안을 만드는 일을 했다. 대책반은 또 892월 연구결과 접수, 3월 실시안 마련, 4월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5월 정부안 확정, 6월 입법 착수라는 초스피드한 일정을 잡았다.

주무부처인 건설부의 박승 장관은 공개념 확대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과표 현실화와 보유과세(종합토지세) 강화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종합토제세와 같은 보유과세가 제대로 기능하면 토지를 재테크 수단으로 매매하지 않고 토지 효율성이 높아 집니다. 내무부가 종합토지세 강화와 과표 현실화를 반대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택지상한법·토지초과이득세법·개발이익환수법을 묵인했습니다. 악법이긴 하지만 우선은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면 시행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국토개발연구원에 설치된 공개념 연구팀은 토지제도를 소유·이용·거래·수익 등 4가지 부분으로 연구했다. 연구 결과, 토지의 이용과 거래에 관해서는 기존의 법률로 투기를 막을수 있는데, 소유·수익 면에서는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토지소유 규제 방안으로 택지소유상한법을, 수익규제 방안으로 개발이익환수법을 각각 제정할 것을 건의하면서, 연구팀은 그해 214일과 23, 420일등 수차례에 걸쳐 공청회를 개최했다. 이때가지만 해도 부동산 투기 척결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워낙 두터웠고, 반대 또한 보완의 논리가 제기되지도 않았다.

정부는 이에 629일 토지공개념안을 국민에 공개하고 711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을 입법예고했다.

택지소유상한제는 한 가구가 일정 넓이 이상의 집터를 갖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서울등 6대도시는 200, 시급 도시는 300, 읍면 단위는 400평으로 제한했다. 개발이익환수제는 형질변경이나 개발에 따른 땅값 상승 차액의 70%를 정부가 환수하는 제도로, 이 제도 가운데 개발부담금제는 개발이익환수법에 남아 건설부가 관장하고, 개발이익금제는 토지초과이득세로 재무부에 이관된다.

토지공개념 제도 도입에 대한 정부안이 확정될 무렵 문희갑 수석은 국토개발연구원의 김현식 박사를 불렀다.

이젠 정부안도 확정됐으니, 홍보에 주력하십시오. 이만큼 연구했으면 됐습니다. 여론이 나빠지면 법안이 아무리 잘 정비돼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공개념 추진팀은 사회전체와 여론전쟁을 벌여나갔다. 예비군 훈련장에 공개념 도입의 필요성을 영상화한 비디오를 보급했고, TV코미디 프로에도 공개념에 관한 내용을 넣어달라고 방송사에 주문하기까지 했다. MBC TV의 일요일 아침프로인 한지붕 세가족에도 프로듀서를 설득해 공개념 제도를 홍보하도록 대본을 만들었다.

19897월초까지만 해도 토지공개념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의 없었다. 7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발족하면서 정부의 공개념 추진을 외곽에서 지지했다. 똑같이 부동산 투기와 거품 경제에 시달리던 일본에서도 건설성 관리, 자민·공명당 정책담당자들이 한국의 토지공개념제를 배우러 무더기로 방문했고, 일본 언론들도 이를 자세히 소개했다. 공개념 제도는 순항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땅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은 편할수 없었다.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땅부자가 많았다. 공개념 법률안은 국회 심의를 거치면서 서서히 땅주인들의 깊은 불만에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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