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대항해시대 세계 패권을 갈랐다
과학기술이 대항해시대 세계 패권을 갈랐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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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엔리케의 항해학교…스페인, 지도제작기술…영국, 고성능 전함개발

 

포르투갈은 대서양이 시작되는 나라다. 중세 지중해 시대에만 해도 포르투갈의 존재는 미미했다. 하지만 15세기에 항해왕자라고 불린 엔리케(Henrique, 1394~1460)에 의해 잠자던 포르투갈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앙 1(João I)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엔리케 왕자는 형들과 함께 이베리아반도 남쪽을 차지했던 이슬람 무어인들을 쫓아내는데 참여한 뒤 1415년 아버지로부터 바다 건너 아프리카 세우타(Ceuta) 섬 진격에 총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엔리케는 그곳에 쫓겨간 무어인들이 다시 포르투갈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섬멸했다.

헨리케 왕자 /위키피디아
헨리케 왕자 /위키피디아

 

세우타에서 엔리케는 무어인들이 남긴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에서 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24천개나 있었고, 계피, 후추, 정향(丁香), 생강 등 다양한 종류의 향료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톤에 달한 향료는 아시아에서 중동을 거쳐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가져가 유럽에 팔면 포르투갈의 몇 년치 재정을 거뜬히 메울수 있었다.

엔리케의 생각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멀리 대양을 건너갈 것을 생각했다. 세우타에서 본 향료의 길에는 오스만투르크가 버티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힘으로 그 길을 개척할수 없었다. 그렇다면 바다로 가는 길밖에 없다.

그의 통찰력은 바다로 나가 향료 무역을 지배하는 것에 닿았다. 바다로 가면 향료의 산지 인도로 갈수 있고, ()의 산지 중국과도 연결된다. 본국으로 돌아온 엔리케는 선대를 편성해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마데이라(Madeira) 제도와 포르투산투(Porto Santo) 제도를 발견했다.

곧이어 1419년 그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Algarve) 주의 총독이 되었다. 엔리케는 사그레스(Sagres)라는 항구에 항해학교를 세웠다. 말이 학교지,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그리스 조선기술자, 이탈리아 수학자, 유대인 천문학자, 페니키아 선박설계자, 이슬람의 지도제작자들이 초청되었다.

 

엔리케 왕자가 항해학교를 세운 사그레스 요새 /위키피디아
엔리케 왕자가 항해학교를 세운 사그레스 요새 /위키피디아

 

엔리케는 그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세계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엔리케가 만들려는 것은 먼바다를 건너갈수 있는 배였다.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는 갤리선(galley)은 너무 느렸고, 사람이 노를 저어야 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들었다. 또 선원들의 공포심을 없애 주어야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대서양 남쪽으로 가면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 배가 타버리고 사람들이 검둥이로 변한다는 미신에 젖어 있었다.

엔리케의 그 많은 요구사항을 담은 배가 마침내 탄생되었으니, 50톤급 캐러벨선(caravelle)이다. 캐러벨선은 범선으로 갑판이 예전 배보다 훨씬 흘수선 위쪽으로 올라갔으며, 삼각돛과 가로돛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새로 만든 캐러벨선은 종전 갤리선보다 빨랐고 튼튼했고, 많은 화물을 실을수 있었으며 대포도 설치할수 있었다. 사그레스의 설계자들은 고물의 키를 타륜(舵輪)과 연결시키는 방법도 개발해 냈다. 게다가 중국에서 개발된 나침반을 달았다. 구름이 낀 날, 북극성을 바라보지 않아도 밤과 낮으로 항해가 가능했다.

1453년 엔리케 왕자는 신무기 캐러벨선을 이끌고 적도근처까지 항해했다. 두려움에 떨던 선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적도 근처 아프리키 땅이 사막이 아니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를 조금씩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

6년후 엔리케가 지휘하는 캐러벨 선단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어느 해안에 닿았다. 그곳에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흑인들은 이상하게 생긴 인간들이 도착하자 무릎을 꿇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원주민을 쇠사슬로 포박해 기독교 방식으로 세례를 한 다음에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포획이라는 범죄는 이때 시작되었다. 노예들은 농장에 배치되었는데 농장주들이 무임금의 노동력을 얻게 되어 기뻐했고, 그 후부터 노예 장사가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어쨌든 엔리케는 항해 왕자(Prince the Navigator)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포르투갈로 하여금 유럽에서 가장 먼저 해양으로 진출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엔리케 왕자가 개발한 카라벨호 /위키피디아
엔리케 왕자가 개발한 카라벨호 /위키피디아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정확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항해지도였다. 당시 해도는 육지에 가까운 연안에서는 정확했지만 먼바다로 나가면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항해자들은 배가 어디에 와있는지 몰랐고, 해류와 해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곳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그 문제점을 해결한 사람이 이탈리아 수학자이자 지도제작자 파올로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 1397~1482)였다. 그의 방식은 지도에 눈금을 그어 위치를 쉽게 식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항해사가 항해 속도와 방향을 계산해 지도의 눈금에 맞춰 위치를 확인하는 지도였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지도 기법을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에게 가져갔다. 그런데 엔리케 왕자는 놀랍게도 그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스카넬리는 경쟁국인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은 그 지도 방식을 사들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의 결혼으로 통합하고, 남쪽에 남아 있던 그라나다를 몰아내고 1492년 스페인 왕국을 탄생시킨다.

그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의 명령을 받고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 이때 콜럼버스가 가지고 간 지도는 토스카넬리가 고안한 지도였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에 놀란 포르투갈은 인도 항로에 매진했다. 1500년 페드로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은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을 받고 인도로 가는데 해도를 잘못 읽었다. 그에겐 토스카넬리의 지도가 없었다. 카브랄의 배는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풍랑을 만나 예정항로에서 3,200마일이나 벗어나 브라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은 차제에 그 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령이 된 것은 당시 해도의 오류 때문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숨어 있다..

뒤늦게 해양으로 진출한 스페인이 항해기술에서 포르투갈을 앞서나가면서 서서히 세계 해양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게 된다.

 

포르투갈 카브랄의 항로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카브랄의 항로 /위키피디아

 

스페인보다 뒤늦게 대양에 뛰어든 나라가 영국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개척한 대양사업에 끼어든 든 영국 국왕은 헨리 8(Henry VIII, 1491~1547)였다. 그는 섬 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이 해양으로 진출하는 것이라 결론내렸다. 이 왕은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에서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을 가득 싣고 오는 것을 시기했다.

헨리 8세는 바다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싸워 이길수 있는 배를 원했다. 그 배는 어떤 함선보다 크고 많은 대포를 실어야 했다. 국왕은 왕실 직영으로 선박연구개발 조직을 만들어 해외의 유능한 인재를 뽑았다. 그 원천은 과학과 기술이었다. 헨리 8세의 방침이 알려지면서 포르투갈의 유능한 기술자가 주인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새로운 주인은 돈을 많이 주었다. 총포 제작기술자, 조선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영국 국왕은 교황청과 싸우면서 성당 부지를 대량으로 몰수했기 때문에 전함을 개발하고 조직하는데 돈을 펑펑 썼다. 해양강국을 만들기 위해 성당보다는 전함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국왕은 알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더 빠르며,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하는 배를 만들라고 기술자들에게 주문했다. 기술자들은 물리학 원리를 이용해 배의 바닥을 평평하게 하면 부력이 커지고, 더 많은 화물을 실을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하지만 무거운 대포를 갑판에 실을수는 없었다.

국왕은 기술자에게 질책했다. “왜 당신은 대포가 반드시 갑판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배의 아래에 두면 되지 않느냐.” 국왕의 아이디어는 참신했다. 기술자들은 대포를 배 아랫부분 용골(龍骨)에 설치했다. 배 측면에 방수창(防水窓)을 만들어 평상시엔 닫았다가 대포를 쏠 때 문을 여는 방식이 개발되었다.

게다가 대포를 지탱하는 포가(砲架)에 레일을 깔아 발사후 반동으로 밀려났다가 제 위치로 돌아오는 기술이 개발되어 적용되었다.

1545년 템스강에 국왕의 지시로 만든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은 그 배를 '위대한 해리호'(The Great Harry)라고 명명했다. ‘위대한 해리호에는 60파운드의 포 4문과 32파운드 포 12, 수많은 소형 포들이 장착되었다.

 

영국 헨리 8세 시절에 개발한 그레이트 해리호 /영국 해군박물관 사이트
영국 헨리 8세 시절에 개발한 그레이트 해리호 /영국 해군박물관 사이트

 

영국은 항해 기술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나침반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느 위도에 이르면 배는 북극성을 향하는데,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Elizabeth I) 여왕 시절에 로버트 노먼(Robert Norman)이라는 연구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거리다가 여왕의 주치의인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의사인 길버트는 스스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해 대단한 가설을 세웠다. 지구가 커다른 자석이며 나침반은 지구 자석에 의해 움직인다는 이론이었다. 길버트는 진짜 북극(眞北)과 지구자석의 북극(磁北)의 편차(자침 편차)를 항해사가 계산에 넣으면 항해상 오류를 극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항해법은 영국 해군에 적용되었다.

 

영국의 최신 전함 개발과 새로운 항해기술 개발은 해군력을 증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영국의 해적선들은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스페인 상선을 나포해 엄청난 보물을 노략질해왔다. 결국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엘리자베스 1세의 전함은 일대 전투를 벌였는데, 승리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역사가들은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전략과 전술, 풍향 등을 영국 승전의 이유로 대지만, 그 원천에는 과학자를 우대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한 전략 덕분이라 할수 있다. 스페인 배보다 더 빠르고 더 많은 포를 탑재한 영국 전함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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