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개발 경쟁이 산업혁명 밑거름 되다
무기개발 경쟁이 산업혁명 밑거름 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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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신무기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영국 프랑스도 무기 경쟁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80년 전쟁’(Eighty Years' War)이라고 부른다. 1568년에서 1648년까지 지루하게 전개된 이 전쟁은 막강한 스페인군에게 무기력했던 네덜란드의 승리로 끝난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 독립군이 후반기에 우수한 무기를 개발해 스페인군을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테르시오(tercio) 보병군단은 막강했다. 이 부대는 밀집대형으로 이동하며 기계처럼 전쟁을 수행하며 네덜란드의 오합지졸을 격파했다. 테르시오군은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부대는 두줄로 나누어 앞줄에서 총을 쏘면 뒷줄에서 장전하고, 줄을 바꾸어 임무를 교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부대 앞에서 네덜란드군은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1590년대에 나사우(NAssau) 가문의 마우리츠(Maurice) 왕자가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현재의 네덜란드군으로 전세를 역전시킬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수학자 출신인 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그 아이디어를 과학자에게서 찾았다. 그가 찾아 낸 사람이 바로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15481620)이었다.

스테빈은 세금징수와 회계를 하다가 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소수(小數) 계산에 정통해 복잡한 분수 대신에 십진법 소수를 사용하도록 건의해 회계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또 부등식의 근을 알아내는 방법을 연구했다.

마우리츠는 스테빈을 채용해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를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스테빈은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으며, 애국심도 열렬했다. 그는 바다를 떠다니다가 육지에 바로 올라갈수 있는 수륙양용 보트를 개발했다.

스테빈은 또 성곽의 방어를 삼각법으로 연구해 다각형으로 축성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성곽을 별 모양으로 각을 지게 축성해 몰려오는 공성군을 포위하고 주변에 해자를 파는 방식이다.

그는 물리학에도 정통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서 영감을 얻어 수압을 이용해 스페인군을 물리치는 방법을 연구했다. 네덜란드는 바다를 간척한 저지대가 많았는데, 그곳에 스페인군이 주둔하면 수문을 열어 평원을 순식간에 잠기게 하고 적군을 익사시켰다.

 

네덜란드 시몬 스테빈이 개발한 수륙양용 보트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시몬 스테빈이 개발한 수륙양용 보트 /위키피디아

 

스테빈의 홍수 무기에 대응해 스페인군은 부교를 사용했다. 1590년 스페인군은 안트베르펜을 포위하기 위해 저지대에 부교를 가설했다. 스테빈은 부교를 폭파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작은 배들을 모아 화약과 벽돌을 가득 실어 도화선을 연결했다. 배는 적군의 부교를 향해 흘러 내려갔다. 부교 위에 있던 스페인군은 그 배의 실체를 알지 못한채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배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과 도화선이 타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 무인선이 부교에 닿자마자 폭발했다. 폭탄을 실은 무인 유도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폭발물의 파편은 사방 1.6km까지 날아갔고, 2천명의 스페인군이 사망했다. 그때까지 한 번의 폭발로 인해 죽은 사망자로는 최대였다고 한다.

이 폭발의 재앙으로 인해 스페인군의 사기가 급격히 꺾였다. 전쟁은 그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스페인은 앞선 과학기술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독립시켜 주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오합지졸이었던 네덜란드군이 세계 최강의 스페인군과 맞서 독립을 쟁취한 것은 기술력으로 무장하면서 전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독립전쟁에서 사용된 첨단 기술은 네덜란드가 독립한 후에 상업과 산업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시몬 스테빈 /위키피디아
시몬 스테빈 /위키피디아

 

태양왕이라 불리는 프랑스 루이 14(Louis XIV, 재위 1643~1715)는 네덜란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눈여겨 보았다. 자그마한 나라가 강대국과 맞서는 그 힘은 바로 과학이라는 사실을 국왕은 알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인이 과학적 우월성과 신무기, 전쟁술로 스페인을 이겼다고그는 보고, 프랑스를 대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재정을 장-바티스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에게 맡기면서 프랑스의 과학적 우월성을 이끌라고 지시했다. 국왕의 명을 받은 콜베르는 봉급을 후하게 주면서 과학 인재들을 모았다.

국왕은 영국에 맞설 수 있는 최강의 해군을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콜베르는 왕명을 받아 파리예술학교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이탈리아 천문학자 잔 카시니(Jean Dominique Cassini)를 영입했다. 카시니는 행성과 항성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학자였는데, 콜베르로부터 지구 모양을 정확하게 측정해 항법사들이 정확하게 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콜베르는 또 수리학(水理學, hydraulics) 전문학교를 설립해 바다의 움직임을 물리적, 화학적으로 연구토록 했다. 해양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탄생하게 된다. 아울러 해군양성훈련소도 세웠다.

루이 14세의 지시와 콜베르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10년후에 190척의 함대와 잘 훈련된 수병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울러 도로를 포장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했다. 오늘날에도 이용되는 프랑스 운하망이 이때 건설되었다.

루이 14세는 지도에도 애착을 가졌다. 정확한 지도를 가지면 포병의 사거리를 정확하게 읽을수 있고, 전함의 이동로를 정확하게 포착할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정확하게 그리려면 천문학과 지리학, 수학의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고, 망원경이라는 장비가 필요했다. 이러한 요건이 갖춰져 과학자들은 프랑스 지도를 그렸는데, 루이 14세가 생각하던 것보다 영토가 20%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국왕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지도를 전술적으로 활용했다.

화학적 발전도 진척되었다. 전함 한척을 건조하는데 오크나무 1,000 그루가 소요되었다. 한꺼번에 배를 지으면 산림이 황폐화되기 때문에 벌채를 규제했다. 단계적으로 벌채를 하고 식수를 하는 방식이 도입되었고, 나무 소비가 많은 비누 개발에 나섰다. 당시 비누는 나무를 태워 재로 만들었는데, 나무 대신에 해조류를 이용해 비누를 얻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해초에는 요드가 많이 함유되었는데 요드는 소독에도 유용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총과 대포에 사용되는 화약의 개발은 화학 발전을 촉진시켰다. 화약은 유황을 원료로 제조되었다. 프랑스에는 당시 유황을 수입해 왔다. 전쟁시 수입선이 끊어질 것에 대비해 유황을 찾아 나섰는데, 화산에서 유황물질을 취채하기 위해 지질학이 발전되었다.

루이 16세는 영국을 제압하고 유럽 대륙을 제패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했는데, 그 부산물은 엄청났다. 새로운 학문이 개척되고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 학문과 기술은 바로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판도 /위키피디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판도 /위키피디아

 

루이 14세의 부산한 군비 확장은 영국을 자극했다. 영국 국왕 찰스 2(Charles II)sms 1660년에 왕립학회(Royal Society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의 국립과학협회인 이 조직은 과학기술 발전이 주요 목적이다.

98명의 회원들은 특권을 가지며 정부가 지불하는 돈으로 자연의 신비에 대한 연구활동을 했다. 학회에서는 순수학문을 지향했지만 영국 욍실에서 내려오는 특수 임무도 수행했다. 그것은 항법술 개선, 화약 개발, 총포 개발, 함선 개선 등이었다.

영국의 존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는 로그(log) 계산법을 개발한 수학자다. 그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변에 나타났을 때 영국 정부로부터 전함개발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네이피어는 그의 수학을 동원해 신형 갈레온선을 설계해 주었고, 그 배가 스페인 전함을 격침하는데 기여했다. 네이피어는 그동안 신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공책에 설계해 놓았는데, 그 공책이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잠수함도 있었고, 탱크도 있었다. 그의 스케치는 나중에 신무기로 탄생하게 된다.

 

포신에 만들어진 강선 /위키피디아
포신에 만들어진 강선 /위키피디아

 

벤저민 로빈스(Benjamin Robins, 1707~1751)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다. 그는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일찍이 군사공학에 뛰어들었다. 영국 육군은 그를 채용했고, 로빈스는 총포 개발에 나섰다.

로빈슨은 수학의 포물선 원리를 활용해 대포의 각도와 화약의 힘을 방정식으로 계산해 냈다. 포구에서 빠져나간 포탄이 어느 지점에 도달할지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은 전투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그는 가벼운 대포를 개발해 전함에 80문의 대포를 싣도록 설계했다.

로빈슨은 또 대포와 총에 가느다란 홈을 나선형으로 파 큰 성과를 올렸다. 강선(腔線, rifling)이란 이 원리는 총알 또는 포탄이 발사와 동시에 홈을 따라 회전하면서 날아가도록 구조화하는 것으로, 포의 속도를 무려 5배나 늘려 사거리를 늘리고 탄착점의 정확도를 높였다.

게다가 그는 탄두 끝을 원뿔형으로 만들어 공기저항을 줄이는 방식도 고안해 냈다.

로빈슨의 가장 큰 역할은 후장식 총포(breech-loading gun)의 개발이었다. 후장식은 탄환을 뒤쪽에서 자전하는 방식이다. 앞서의 총포는 전장식이었다. 총포 앞에서 탄환을 집어 넣어 발사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부대 단위의 대열 편성이 복잡했다. 하지만 후장식은 한번 발사할 때마다 후미를 열어 화약을 장전하기 때문에 발사 시간도 빨라지고 군대의 대열 편성이 쉬워졌다. 후장식 소총은 엎드려 쏘기도 가능해 사상자를 줄일수 있다.

로빈스의 활약으로 영국군의 전투능력이 배가되었다. 보병은 1.6km 밖에서도 표적으로 맞출수 있고, 탄환은 15cm 벽도 뚤었다.

무기개발에 앞장선 영국은 국내에서 개발된 무기는 단일 공정을 통해 생산되었다. 무기가 고장나면 부품 교체가 쉽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무기생산 단일공정은 대량생산체제를 이끌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무기 개발에서 과학 기술은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수학, 물리학, 화학, 소재공학은 수많은 발명가를 낳았고, 산업이 요구하는 기술혁신을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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