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탐욕이 빚어낸 죽음의 포토시 은광
스페인의 탐욕이 빚어낸 죽음의 포토시 은광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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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노린 정복자들, 아즈텍과 잉카 정복…포토시에서 수백만 인디언 사망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다. ()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역사를 지배해 왔다. 대항해 시대에 목숨을 걸고 신대륙 탐험에 나선 항해자들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언급한 금이 나오는 땅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어디서나 금이 넘쳐나고 고갈되지 않는 섬나라가 있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두 번이나 그 섬을 침략하려다 실패했다.”고 썼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히스피니올라(Hispaniola) 섬에서 많은 향신료와 측량할 수 없는 큰 황금이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섬에는 그가 기대하는 금은 없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스피니올라 섬에서 금을 찾아 냈다. 인디언들에게 중노동을 부과해 강을 이 잡듯 뒤져 금을 채취했다. 금 생산량은 늘었지만 가혹한 노동에 원주민 사망률이 높자 인근 섬에 쳐들어가 인간사냥을 했다. 쿠바와 자메이카, 푸에리토리코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카리브해 섬에서 채취하는 금은 스페인 식민자들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들은 대륙으로 진출했다.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ś)1519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바를 출발해 멕시코를 향했다. 그는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에 도착해 깜짝 놀랐다. 이 신대륙에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큰 도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코르테스는 그곳의 인구가 20~30만명 쯤 되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유럽에서 파리, 피렌체, 콘스탄티노플 정도가 그에 버금가는 대도시였다. 헨리 8세 시절의 런던보다 5배나 컸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 안에는 엄청난 황금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꾀를 내 자신이 그 신이라고 속였다.

아즈텍 황제 모크테주마 2(Moctezuma II)는 코르테스의 거짓말을 들어 주었다. 처음엔 아즈텍 황제가 스페인 군대를 환영했다. 코르테스는 비열한 짓을 했다. 아즈텍 황제 모크테주마를 체포해 인질로 삼고, 황금을 요구했다. 황제는 있는대로 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야비한 스페인 장교는 테노치티틀란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파괴했지만, 그곳에서는 더 이상의 금이 나오지 않았다.

또다른 스페인 장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도 황금을 찾아 나섰다. 그는 1526년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해 잉카제국과 만났다. 피사로도 코르테스처럼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아 금과 은을 내놓으라고 했다. 잉카 황제는 몸값으로 90의 금과 은을 주겠다고 했다. 황제의 제안이 그의 탐욕에 불을 질렀다. 그는 황제를 죽이고 잉카 수도 쿠스코를 함락하고 몸값보다 더 많은 귀금속을 약탈했다. 그들은 신전과 궁전을 파괴하며 금을 찾았고, 무덤까지 약탈했다.

 

하지만 아즈텍과 잉카는 무제한 금이 나오는 창고는 아니었다. 그들의 약탈은 일회에 그쳤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소문에 귀를 귀울였다. 그들은 인디언들이 전해준, 금과 은이 넘쳐난다는 시볼라(Sibola) 신의 도시와 엘도라도(El Dorado)에 대한 전설을 믿게 된다. 그들은 전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시볼라의 도시는 멕시코시티 북쪽 어딘가에 있다고 하며, 엘도라도는 멕시코 남쪽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멕시코의 몇몇 시내에서 사금이 발견되었고 지금의 온두라스에서 노다지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은 뉴스페인과 뉴그라나다에서 오는 금과 은을 세비야 항구로 들어오도록 했다. 1540년대에 스페인을 지배하던 합스부루크가의 카를 5세에겐 만족할만한 금이 세비야 항을 통해 들어갔다.

 

179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령(청색=스페인, 녹색=포르투갈) /위키피디아
179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령(청색=스페인, 녹색=포르투갈) /위키피디아

 

신대륙에 골드러시 바람이 불었다. 한탕주의에 빠진 스페인 투기자들은 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헤메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만큼의 금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소량이나마 은이 발견되고 있었다. 투기자들은 금이 없으면 돈이 되는 은이라도 찾으러 나섰다.

멕시코 서부 타마줄라와 남부 경사면에서 은이 발견되었다. 은이 발견되면서 탐욕가들을 자극했다.

1546년 호안 데 톨로사(Juan de Tolosa)라는 스페인 사람이 은을 찾아 멕시코 고원을 헤매다가 자카테카스(Zacatecas) 인디언들과 조우했다. 그는 인디언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인디언들은 감사의 표시로 어떤 바위로 안내했다. 그는 그곳에서 돌 몇조각을 가져와 분석을 의뢰했더니 함량이 높은 은광석임이 확인되었다. 자카테카스는 그후 멕시코의 주요 은광지로 개발된다.

 

잉카 제국이 멸망한 페루 지역에서도 산발적으로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세계 최대은광인 포토시(Potosí) 광산이 발견된 것은 우연이었다.

15454월 디에고 후알파(Diego Huallpa)라는 인디언 목동이 라마떼를 이끌고 해발 4,200m의 산을 올라갔다. 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을 지폈다. 그런데 그의 주변 땅이 반짝이며 빛이 났다. 그는 주변의 돌을 몇조각 주워서 내려왔다. 이 소년이 가져온 돌 덩어리가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그 돌은 은광석이었고 탐사대가 그곳을 가 보았더니 대규모의 은광지역임이 밝혀졌다. 곧바로 마드리드에게 보고되었고,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다.

 

1553년 포토시 그림 /위키피디아
1553년 포토시 그림 /위키피디아

 

포토시 은광이 발견된 후 스페인 사람들과 인디언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고원지대로 몰려왔다. 4년도 지나지 않아 포토시는 뉴스페인 전체 은 생산량의 두배를 생산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에 임시 야영지가 만들어지고 인구가 10만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런던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발 4m의 황량한 고원지대로 몰려들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최대의 인구가 이 광산 일대에 집결되었다고 한다. 감격한 카를 5세는 이 도시를 제국의 도시’(imperial city)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스페인 사람도 인디언도 부자가 되었다. 주변의 상인들도 돈을 많이 벌었다.

 

은광석을 얻으려면 모래 땅에서 채굴되는 사금과 달리 단단한 암석을 깎아 내야하고, 제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특히 포토시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은광석과 채굴장비, 제련에 필요한 납이 라마 떼들이 다니던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운반되어야 했다.

스페인의 독일에 비해 은 제련기술은 낙후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탁월한 제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뉴스페인에 파견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견제로 독일 기술자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은 제련에 나무가 연료로 사용되었다. 포토시는 주변에 숲이 없어 연료용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고, 쇄광기와 같은 기계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채굴업자들은 투자비를 건지기 위해 함량이 높은 은광석만 제련했고, 함량이 떨어진 광석은 폐석으로 처리했다. 게다가 스페인 정부는 1542년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노동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뉴스페인의 광산주들은 그 법령을 무시했지만 인건비는 급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광의 채산성이 악화되어 갔다. 포토시는 개발을 시작한지 20년이 될 무렵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광산 주변엔 폐석 더미가 쌓였고, 은 생산량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인디언 대우문제로 교회와 식민당국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멕시코 자카테카스 은광에서 수은아말감법에 의한 파티오 작업현장 /위키피디아
멕시코 자카테카스 은광에서 수은아말감법에 의한 파티오 작업현장 /위키피디아

 

문제 해결의 방법은 은 제련법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스페인 세비야에 바르톨로메 데 메디나(Bartolomé de Medina)라는 직물상이 있었다. 그는 은 제련에 관심이 있었다. 어느날 마스터 로렌조(Maestro Lorenzo)로 알려진 독일인 제련기술자가 세비야의 메디나를 찾아왔다. 그는 메디나에게 수은 아말감 제련법(mercury amalgamation)이라는 방법으로 아메리카의 은광석을 제련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들은 스페인 남부 은광에 가서 그 제련법을 시험해 보았다. 은광석을 가루로 만들어 소금물과 수은을 넣고 휘젛고, 한달 정도 기다리니 수은과 은이 결합된 합금이 걸러졌다. 이를 다시 가열하니 밝은 색깔의 은이 생성되었다.

메디나는 로렌조와 함께 아메리카로 가려고 당국에 신고했더니 당국에선 로렌조에겐 출국을 허락하지 않고 메디나만 가라고 했다. 독일인에 대한 스페인의 종족적 감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는 멕시코 파추카(Pachuca)에서 수은 아말감법을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전문가를 대동하지 못하게 한 스페인 당국 오판의 결과였다. 하지만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수은아말감법은 멕시코에서 성공했고, 포토시에도 전수되었다.

 

수은 아말감법을 채택하면서 포토시 은광이 다시 살아났다. 신제련법은 폐석에서도 은을 추출했다. 마침 중국 명나라가 은을 납세기준으로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면서 포토시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16세기 후반에 포토시는 전세계 은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스페인에 부를 창출해 주었다. 포토시 은광이 전성기일 때 도시 인구는 16만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절대 부족해졌다. 스페인 당국은 인디언 노예를 사용하는지 감독했고, 원주민들도 죽음의 광산으로 끌려가길 싫어 했다.

 

1590년대 포토시 광산 그림 /epic world history
1590년대 포토시 광산 그림 /epic world history

 

1569년 스페인 정부는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백작을 페루 총독으로 파견했다. 그는 광산의 노동력 공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열었다. 톨레도가 만든 특별위원회는 광산이 공익적 자산이므로 인디언들에게 광산 노동을 강제할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때 만들어진 노동제도가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부역제도를 모방한 미타(mita)라는 것이었는데, 18~50세의 인디언 남성 가운데 7분의1에 대해 광산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미타에 의해 강제노동을 한 인디언을 미타요(mitayo)라 불렀다.

인디언들은 짐승처럼 부려졌다. 수직갱은 깊이가 90m 이상인 것도 있었는데, 밧줄로 이어진 사다리에 손잡이는 미끌미끌했다. 미타요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은광석을 캐내 올라오면 살을 에이는듯한 고지대의 강풍을 만나야 했다. 목표량을 이행하지 못한 미타요는 수갱으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채굴한 은광석은 파티오라는 커다란 구덩이에 넣어져 수은과 함께 버무려야 했다. 파티오 공정patio process)은 살인적인 작업이었다. 인디언들이 수은 구덩이에 들어가 맨발로 작업을 했다. 광석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수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나갔다.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가 없다. 최근에 포토시 인근에서 수많은 유골들이 발견된다는 뉴스도 나온다. 어느 통계에는 1500~1800년 사이에 무려 8백만명의 인디언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볼리비아는 1825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때 포토시 광산은 이미 고갈되고 시의 인구도 전성기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스페인은 인디언 노동력을 착취해 은을 다 파먹고 넘겨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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