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영국 산업혁명 시동걸다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영국 산업혁명 시동걸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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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술 축적의 산물, 산업자본 지원, 기계기술 도움…영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도 영국사회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

 

중세 이래 유럽의 숲은 축소되어 왔다. 농업이 확산되었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집을 지을 목재와 땔감용 장작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숲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유럽 국가 가운데 숲의 감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을 느낀 나라는 잉글랜드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의회는 목재 부족이 절실해 지면서 항행이 가능한 강의 20km 내에서 벌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어느 지방에서는 목재를 불법 채취하는 사람에게 다리에 묶어 놓고 형벌을 가했고 도시에서 추방하기도 했다.

목재에 대한 규제는 석탄 수요를 크게 늘렸다. 영국에선 16세기에 뉴캐슬(Newcastle)에서 석탄이 채굴되어 런던까지 배로 운송되었다. 런던이 팽창하면서 석탄수요는 점점 증가했다.

석탄 수요 증가로 석탄 채굴의 깊이가 깊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광산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뽑아 내는 일이었다. 초기에 광산의 물 퍼내기는 수동으로 이뤄졌다. 체인에 물 양동이를 걸어 수직갱으로 밀어 넣어 지하수를 퍼올렸다. 이 방식으로 깊은 지하를 내려가는데엔 한계가 있었다.

 

데니스 파팽이 1679년에 개발한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데니스 파팽이 1679년에 개발한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제임스 와트에 앞서 증기기관(steam engine)에 대한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로마 시대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헤론(Heron)에 의해 물을 끓일 때 나오는 증기로 움직이는 기계가 고안되었고, 16세기 오스만투르크에서도 초기 형태의 증기기관이 만들어졌다.

영국에서 증기 엔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위그노 탄압을 피해 잉글랜드로 건너온 프랑스인 데니스 파팽(Denis Papin)에 의해 167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690년에는 증기기관에 피스톤을 장착하기도 했다.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개발한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개발한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뉴커먼 증기기관의 원리 /위키피디아
뉴커먼 증기기관의 원리 /위키피디아

 

영국 석탄광산에서 증기기관을 최초로 실용화한 사람은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ery). 세이버리는 오랫동안 군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광산 배수장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파팽의 증기엔진의 결점을 보완해 1698년에 증기압을 활용한 펌프를 개발했다. 세이버리 엔진은 용기에 증기를 밀어 넣고 용기를 식혀서 진공을 만들고, 진공력으로 지하수를 빨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장치로는 물을 30m 이상 퍼 올릴 수 없었다. 세이버리 엔진은 조악했고, 상용화에 실패했다. 비효율적이고 위험했다.

그 다음 도전자는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었다. 뉴커먼은 주석 광산에 지하수가 범람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세이버리 엔진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는 세이버리 엔진의 결함을 간파했다. 증기로 진공을 만들어 물을 밀어올리는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깨닫고 자신의 엔진 개발에 나섰다. 뉴커먼은 세이버리의 제품을 분석해 1705년 새로운 증기기관을 만들었는데, 증기압을 조절하는 곳과 상하 운동이 일어나는 곳을 분리시켰다. 그는 몇가지 장치를 더 개선해 1712년에 상용화를 했다. 뉴커먼 기관은 실린더 안의 수증기 압축과 팽창에 따라 피스톤이 왕복 운동하는 방식이었다. 대기압으로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대기압 기관(atmospere engine)으로도 불렸다. 그의 증기엔진은 여러 광산에서 채택되어 1770년에는 영국 전역에서 100여 대가 가동됐다.

 

제임스 와트는 스코틀랜드인으로 글래스고에서 공업소를 차려 기계와 도구 부품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의 기구들을 관리하며 보수를 받았는데, 그 대학의 교수들이 대학 내에 공업소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와트는 대학내 공업소에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조지프 블랙(Joseph Black)을 알게 되어 증기 기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63년 와트는 대학이 소유하고 있는 뉴커먼 엔진을 수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가 엔진을 수리했는데도 엔진이 작동되지 않았다. 뉴커먼 기관은 증기 압축을 위해 물이 한 번 분사될 때마다 실린더 전체가 냉각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많았고 석탄 소모량도 많은 결점이 있었다.

와트는 엔진 개발에 나섰다. 그는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니라 실린더와 연결된 별도의 응축기에서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니라 증기압력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응축기만 냉각되고 실린더의 열은 보존되어 효율성이 매우 높았고, 석탄 소모량도 뉴커먼의 것에 비해 4분의1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와트는 또한 피스톤의 상하운동 모두를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는 17691월 특허를 취득한다.

그러나 이 모델도 실용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커다란 실린더와 그 안에 들어갈 정확한 피스톤의 제작이었다. 당시의 철 기술자들은 대장장이에 가까웠고, 와트가 원하는 만큼 정밀한 제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또한 많은 돈을 엔진개발에 소비했기 때문에 자금부족에 시달렸다.

 

제임스 와트 /위키피디아
제임스 와트 /위키피디아

 

그때 와트는 매튜 볼턴(Mtthew Boulton)이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된다. 볼턴은 버밍엄(Birmingham)에서 석탄광산을 운영했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와트의 기계를 알아보고 버밍엄으로 초대했다.

와트는 버밍엄으로 갔다. 볼턴은 와트를 후원하겠다고 자청하고 그의 창작물을 완성하라고 재촉했다. 볼턴은 와트의 특허 만료기간이 다가오자 25년 더 늘려 1800년까지 연장하고, 볼턴&와트(Boulton & Watt)라는 동업회사를 만들었다. 돈은 볼턴이 대고 기술개발은 와트가 하는 벤처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와트와 볼턴은 당대 최고 수준의 기계 기술자 존 윌킨슨(John Wilkinson)에게 피스톤 제작을 맡겼다. 그들은 1776년에 증기기관 시제품 두 개를 내놓았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은 윌킨슨의 제철소에서 시연되었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엔진 작동을 지켜보던 와트는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환호했다. 엔진 가동은 대성공이었다. 엔진의 파워는 기존 엔진보다 3배나 컸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1776년 시연에 성공한 이후 본격적으로 상업화되었다. 이후 5년간 콘웰(Cornwal) 지역 탄광에서는 와트의 엔진으로 대체하느라 매우 바빴다.

그후에도 와트는 엔진의 성능 개선에 힘썼다. 펌프에 증기 누출을 막기 위해 피스톤과 케이스 사이에 작은 틈을 밀폐하기 위해 쇠기름과 힘줄이 섞인 기름 혼합물을 발라 해결했다. 그런데 엔진 감독자들이 그 기름을 뜯어 먹는 바람에 증기가 새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그의 열정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 혼자서 이룬 결과는 아니었다. 앞서 1백년에 걸쳐 파팽, 세이버리, 뉴커먼의 축적된 기술 개발이 있었고, 볼턴과 같은 자산가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고 윌킨슨과 같은 기계제작자의 도움이 컸다. 게다가 세계 해양의 패권을 장악한 영국에 산업이 성장하면서 증기엔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러프버러 대학에 보관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러프버러 대학에 보관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위키피디아

 

와트의 증기기관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공장은 수력(水力)에 의존했다. 강물의 흐름에 수차(水車)를 돌려 동력을 얻었던 공장들이 증기기관으로 대체했다.

증기기관은 산업혁명기에 획기적 발명품으로 꼽히는 방적기에 적용되었다.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가 개발한 방적기는 단순한 기계장치에 불과했다. 방적기에 증기기관이 결합되면서 속도가 빨라졌고 대량의 옷감을 제조할수 있게 되었다. 대량의 방적기가 가동되면서 면직물 가격은 떨어졌고, 인도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수입 면직물을 대체하게 된다.

제철소에도 증기기관이 도입되었다. 당시에 이미 다비(Abraham Darby I)가 코크스(Cokes)를 이용한 제강기법을 개발한 터여서 코울부르크데일(Coalbrookdale) 철강단지에서는 증기기관이 불어넣는 바람으로 제강 속도가 빨라졌다.

그동안 영국은 러시아와 스웨덴에서 철강재를 수입해 왔다. 철광석을 가열하는데 목재를 연료로 사용했는데, 영국에선 숲이 줄어들면서 목재 가격이 비싼데 비해 러시아와 스웨덴에는 싸고 풍부한 목재 연료를 공급받아 싼 철강재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제철소에 석탄을 원료로 사용하고 증기기관으로 풀무질을 하면서 영국산 철강생산이 늘어나고 러시아와 스웨덴산보다 가격이 떨어졌다. 1775~1790년 사이에 영국 철강산업의 상황이 바뀌었다. 더 이상 수입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영국 철강산업이 산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영국에선 철강산지와 석탄산지가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군수품 산업에도 적용되었다. 증기기관의 힘으로 포신의 구멍을 내는데 적용되면서 대포의 정확도를 높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영국으로 '세계의 공장'(the workshop of the world)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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