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영국서 첫 상업운행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영국서 첫 상업운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0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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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턴~달링턴 구간, 증기기관차 운행…강철제 레일 개발로 상업화 성공

 

증기기관차 개발은 인류에게 교통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증기기관차의 원리는 19세기초에 이미 알려져 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었는데, 상업화에 성공한 사람은 영국인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었다. 스티븐슨은 1829년에 로켓호를 제작해 증기기관차의 모델을 제시했다. 문제는 이 기관차를 움직일 철도였다.

철도 역사의 시초는 16세기 독일 하르츠 광산에서 판 위에 레일 모양으로 목재를 깔고 그 위로 석탄 운반 차량을 운행한 것이다. 목재 레일은 마모가 심해 그후 철제 레일로 대체됐다. 초기 가동에 실패했지만, 철제 레일(철도)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포기하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영국인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은 뛰어난 발명가였다. 광산 경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에 직접 광산을 경영했으며, 공학을 공부한 후 소형 펌프 특허권을 따내고, 그것을 이용해 1804년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다. 그의 기관차는 레일 위를 달리며 말 대신에 석탄 운반차를 끌었으나, 레일이 연약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4년 후에도 기관차를 제작했지만, 실용성이 떨어져 거리의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1925년 스톡턴-달링턴 구간 100주년 기념식 때의 모습 /브리태니커닷컴
1925년 스톡턴-달링턴 구간 100주년 기념식 때의 모습 /브리태니커닷컴

 

철도를 처음으로 상용화한 사람이 조지 스티븐슨이다. 그는 1813년 동료 윌리엄 해들리와 함께 기능적인 증기관차를 발표하고, 이듬해 자신의 모델을 이용해 석탄 광산에서 시속 6.5km의 속도로 30톤의 석탄을 운반하는데 성공했다.

1825년 영국 927일 영국 스톡턴-달링턴 구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에 철도가 개통해 증기기관차가 레일 위를 달렸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기관차에 의한 영업 철도였다.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서는 개업에 앞서 시운전을 했는데, 스티븐슨의 아들이 제작한 기관차 로켓호가 영업을 개시했다.

이로써 19세기초 산업혁명의 발원지로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영국은 철도 시대로 들어섰다. 세계 제패의 야망에 들떠 있던 영국은 승객 및 화물수송력이 뛰어난 철도에 열광했고, 이른바 묻지마 투자가 성행하여 철도는 급격히 팽창했다.

영국에선 1840년대에 각지에서 철도 사업자가 성행해 철도는 급격히 팽창했다. 영국에선 1840년대에 각지에서 철도 사업자가 속출해 1859년대 11,000km까지 연장되었고, 1890년대엔 32,000km에 이르렀다. 미국도 대륙 오지를 개척할 필요에 따라 1850년대 14,500km, 1890년대 26km에 이르렀다.

 

조지 스티븐슨이 개발한 초기의 증기기관차 /위키피디아
조지 스티븐슨이 개발한 초기의 증기기관차 /위키피디아

 

초창기 레일은 너무 물러서 기관차의 중량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이내 금이 갔다. 그러나 철도의 팽창으로 인해 철강 생산량은 10년에 2배씩 증가했고, 수십년 사이에 7배까지 증가했다. 오늘날 대량의 철강생산은 철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제는 연철이 레일로 쓰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철도의 수요가 급증하는데, 연철 레일이 주기로 교체되는 바람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베세머 공법이었다. 연철에 공기(산소)를 불어 넣어 강철로 만드는 공법이 개발돼 레일의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 /위키피디아
조지 스티븐슨 /위키피디아

 

철도가 지구상에 생기기 전까지는 수상 운송이 육로 운송보다 에너지 효율면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 곡식 한자루를 육상으로 운송할 경우 가격이 1마일당 3%씩 올라갔고, 석탄은 4%씩 올라갔다. 따라서 식량이나 석탄처럼 양이 많고 무거운 화물(벌크 화물)은 육상으로 수십km만 운송해도 값이 갑절로 뛰었다.

따라서 19세기초 미국 대서양 연안 도시에서 내륙 쪽으로 몇 km 들어가 광대한 삼림에서 땔나무를 끌어오는 것보다 영국에서 석탄을 배로 들여와 사용하는 편이 쌌을 정도로 해상 운송의 메리트가 있었다. 그러나 톤-마일리지의 개념으로 볼 때 18세기에도 육상 교통로를 이용하는 화물이 해상 또는 수상 교통로를 이용하는 화물보다 많았다.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강이나 운하가 없을 경우엔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철도가 극복해줬다.

 

철도의 발명은 인류 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철도의 확장은 세계의 교역지도와 인류의 삶, 생산방식을 바꿔 놓았다.

철도로 인해 육상으로 무거운 화물을 값싸게, 상당히 먼 곳까지 옮길수 있게 됐다. 먼 곳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철도 노선상에 사는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가 멀더라도 이웃이 됐다. 교통 병목이 없어지자 시간은 곧 돈이 됐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윤이 더 많아졌다. 산업 생산량이 급증하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가로막던 거리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이윤을 챙기던 중개인의 역할이 줄어들고, 불명확한 수요를 예측해 대량 생산을 하는 산업가에 돈을 지원하는 금융업자의 역할이 커졌다. 금융산업이 발전한 것도 철도 덕분이었다.

철도는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 역할도 했다. 물리적 거리가 짧아지면서 지역(로컬)의 개념이 변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가 어우러져 보편적인 문화가 형성됐다.

정치적으로 철도는 식민주의 시대의 끝을 형성하고, 이른바 제국주의간 대립을 초래했다. 미국은 19세기 남북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동서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했다.

 

독립 초기 미국은 수상교통이 육상교통보다 발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새로 점령한 대륙을 개발하느라, 바다 쪽으로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대단히 강력했던 미국의 상업 해운은 죽어 버렸고, 심지어 지리적으로 유리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해상교역로조차 스페인과 프랑스에 넘어갔다. 서부 개척에 나선 건달과 부랑아(미국사에선 이들을 개척자로 부른다)들이 대륙 서쪽으로 진출했고, 1890년 서부의 캘리포티아주, 오레곤주, 워싱턴주에 인구가 밀집하면서 변경의 종식을 선언한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1869년에 완성된 대륙횡단철도였고, 미국은 이 철도를 통해 동서의 산업을 연결해 강대국의 기초를 닦았다. 세베리아 개척에 나선 러시아가 해양 밖에 있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통해 영토를 대륙으로 한정한 것도 미국의 영토 완성 직후의 일이다.

 

철도 확장과 함께 세계화의 초석을 닦은 것이 증기선의 발명이다. 영국에서 트래비식이 기관차를 만들 때 사용한 엔진이 와트가 발명한 펌프 엔진이었고, 이 엔진은 증기선에도 이용됐다. 증기선은 해외 팽창에 나선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으로 하여금 본국과 식민지를 연결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증기선 덕택에 대서양과 태평양은 대양에서 호수로 개념이 축소됐고, 대륙의 독립국들은 작은 공국으로 개념이 바뀌게 됐다.

철도와 증기선은 근대 문명의 매개체였다. 이 두 교통수단으로 인해 세계는 하나로 묶였다. 아울러 철도와 선박은 자체적으로 철의 수요자였고, 산업화를 중매하면서 철강산업을 팽창시킨 공로자라고 할수 있다.

한국의 철도는 구한말인 1896년 경인철도를 출발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를 완공했다. 철도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산업화는 늦게 이룩했지만, 현대의 국제적인 흐름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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