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에서 대우그룹 신화 일군 김우중 별세
샐러리맨에서 대우그룹 신화 일군 김우중 별세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2.1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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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신화에서 실패의 표본으로…외환 위기 때 부채 경영으로 그룹 해체 후 해외 도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50분 별세했다. 향년 83.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아리랑TV 캡쳐
아리랑TV 캡쳐

 

그는 샐러리맨에서 출발해 대재벌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자, 대우그릅을 다른 기업보다 일찍 세계경영을 펼치도록 했다. 그가 일군 대우그룹은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해 재계순위 2위로 성장했으나, 막대한 부채를 이기지 못해 IMF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되었고 그는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1936년 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 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맡았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 진학하고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31세에 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으로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해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회장에 올랐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선포했다.

1987~1993년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1990년 장남 선재를 잃었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다. 1998년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 로고
대우그룹 로고

 

1997IMF 구제금융 이후 부채비율 400% 이상이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다.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1025일에 발표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대우그룹을 경고했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실패했다.

19998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199911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했다.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했다.

58개월 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하던 그는 2005614일 입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6113일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6개월,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9,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다. 그는 항소를 포기, 형이 확정되었다. 20071231일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고, 여전히 178천여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20173월 서울에서 열린 대우창업 50주년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낸후 일체 공식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IMF 위기 때 대우그룹을 해체했어야 했느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회사를 살려둘수는 없었다.

그의 세계경영 철학은 그후 우리 대기업이 추구한 경영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1인적 경영관행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바둑에 취미 및 특기가 있으며 공인 바둑 3급의 기력을 보유하고 있다. 1983()한국기원 2대 총재 취임한데 이어 1999년까지 3, 4대 총재 연임했다. 1980년대 프로기사들의 기업체 지도사범 위촉, 현 홍익동 ()한국기원 회관 기증, 국제기전 창설 등 기전의 국제화 및 다양화에 기여, 한국바둑이 세계최강에 올라서는 디딤돌을 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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