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략 군주의 칼을 특별전시하는 국립박물관
조선침략 군주의 칼을 특별전시하는 국립박물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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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청 황실의 아침, 심양 고궁’전 개최…‘홍타이지 칼’등 전시

 

작자 미상의 <산성일기> 1637130일자에 이렇게 기록했다.

“30일에 햇빛이 없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청나라 복장)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 찬 사람들이 통곡하여 보내니 성 안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 청 황제)은 삼밭(三田) 남녘에 구층으로 단을 만든 후 단 위에 장막을 두르고 황양산을 받쳤다. 단 위에는 용문석을 깔고 용문석 위에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교룡요를 폈다. 그 위에는 누런 비단 차일을 높이 치고 뜰에 황양산 셋을 세웠다. 정병 수만 명은 키가 크고 건장하기가 거의 비슷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각각 수놓은 비단옷과 갑옷을 다섯 벌 껴 입혔다.

한이 황금상 위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활을 타며 여러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하더니 활쏘기를 멈추고 전하로 하여금 걸어서 들어가게 하였다. 백 보 걸어 들어가셔서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시려 할 때였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는데 임금께서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제왕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 ()이 남향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군악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한은 전하께 돈피 갖옷 두벌을 드리고, 대신 육경 승지에게는 각각 한 벌씩 주었다. 임금이 그 중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세 번 절하여 사례하시니, 대신들이 또한 차례로 네 번 절하여 사례하였다.“

 

400년이면 이런 억울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일까. 조선도 망하고, ()도 망했다. 그 후손들에겐 서로 원수 같았던 마음도 사라지는 것일까.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지병목)은 오는 11일부터 202031일까지 세계의 왕실문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청 황실의 아침, 심양 고궁을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에 전시하는 물품 중에는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칼이 있다. 홍타이지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두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오랑캐의 군주다. 홍타이지 칼은 그가 전쟁터에서 사용하였던 칼로, 아마도 이 칼을 차고 조선을 침공했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측은 이 칼이 홍타이지의 것으로 전해지는 소량의 유물 중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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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를 더 들여다 보자.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굴복한 후 수많은 백성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적병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따라 가는 이가 반이 넘었는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만히 물어 사람을 찾거나 하였다. 혹 길에 엎드려 비는 형상 같은 이가 있으면 적이 쇠채로 쳤다. [……] 사대부의 처첩과 처녀들은 차마 낯을 드러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고 있는 이가 무수하였다. [……]

적이 큰 길로 행군할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을 먼저 행군케 하고 두 오랑캐가 좇아 종일토록 그렇게 하였다. (끌려간 이들 중) 훗날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만 해도 66만에다 또 몽고에 떨구어진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으니 그 수가 많음을 가히 알수 있었다. 이날 임금이 그 참혹한 형상을 차마 보지 못하셨던지, 큰 길을 거치지 않고 산을 의지하여 오셔서 새문(서대문)으로 환궁하셨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주목적은 명나라를 쳐 중원을 확보하기 앞서 후방의 교란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수적으로 부족한 인력을 조선인으로 메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은 6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구가 1천만~15백만명으로 본다면, 총인구의 5% 정도가 끌려간 것이다.

그들은 이 많은 조선인을 끌고가 어떻게 대우했는가. 만주족들은 끌고간 조선족을 부이라 부르며 노예로 삼았다. 피로(被擄) 조선인들은 집안의 노비에서 만주족 귀족의 집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그중에 솜씨 있는 기술자는 세금도 면제해주고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 젊은 장정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어 명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제 400년이 흘러 침략군 군주의 칼이 고궁에 전시되고, 적장이 입던 옷, 홍타이지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칼과 보물함도 전시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전시를 6부로 구성했다. 1후금, 일어나다’, 2청나라의 발흥지’, 3제왕의 기상’, 4청 황후와 비의 생활’, 5황실의 취향’, 6황실의 종교로 나누어 상세하게 침략자들의 문화를 자세히 소개한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을 동원해 청나라에 대한 소개를 하는 특강도 마련했다.

주최측은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알기 쉽게 학습하는 활동지와 함께 하는 전시해설과 초등학생(4~6학년)을 포함한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 연계 체험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전시의 제목도 청 황실의 아침 심양의 고궁이다. 청이 명나라를 집어먹고 수도로 삼은 베이징이 아니라, 조선을 침략했을 당시의 심양에 아침 풍경이 그렇게 신선하단 말인가.

 

혹자는 400년이나 지났는데, 조상들의 슬픈 역사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용서해야 할 역사의 기간은 얼마나 되나. 100년전 일제 강점기의 일들은 아직도 낱낱이 파헤치는 게 현실이다. 400년전은 괜챦고 100년전은 안된다? 청은 멸망했고, 일본은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고궁박물관이 홍보를 위해 내놓은 자료 중 조선 침략자와 관련한 품목 몇 개를 인용해 보자.

 

자료: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

 

홍타이지 칼(皇太極刀) 국가 1급 문물

홍타이지가 전쟁터에서 사용하였던 칼이다. 오늘날 홍타이지의 것으로 전해지는 소량의 유물 중 하나다. 양질의 강철로 만든 날카로운 칼날의 양 측면에는 홈[혈조血漕]이 있으며, 칼자루는 가죽 끈으로 감아 놓았다. 손잡이 끝부분과 칼날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 손잡이에 테처럼 두른 칼코등이 는 정교하게 만든 금동 꽃문양 장식으로 꾸몄다. 소나무로 만든 칼집의 겉면은 상어 가죽으로 감싸고 금동 장식 테를 둘렀으며, 측면에는 고리를 달아 칼을 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칼집에 달린 흰 가죽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로 태종문황제[홍타이지]의 어용 요도 한 자루가 성경에서 귀중히 보관되어 오다.[太宗文皇帝 御用腰刀一把原在盛京尊藏]’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자료: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

 

홍타이지 일상복(皇太極常服) 국가 1급 문물

청 태종 홍타이지가 입었던 일상복으로 만주족 전통 양식의 포복(袍服)이다. 둥근 깃에 단추를 한쪽으로 여미는 형태로 네 개의 구리 단추가 있고, 소매는 말굽 모양[마제수, 馬蹄袖]이며, 전후 · 좌우로 옷자락이 트여 있다. 밝은 황색 비단에 만자문(卐字文), 단룡문(團龍文), 구름문이 들어가 있고, 옷깃과 소매는 남청색 바탕에 운룡문을 수놓은 비단으로 테를 둘렀다. 홍타이지와 관련된 전세(傳世) 유물 중 하나로 본래는 심양 장녕사(長寧寺)에 소장되어 있다가 지금은 심양 고궁으로 옮겨졌다.

 

자료: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

 

누르하치 칼(努爾哈赤劍) 국가 1급 문물

1595(명 만력 23) 명 황실에서 누르하치를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임명할 때 수여했던 용호장군검)龍虎將軍劍)이다. ()으로 만든 해당화(海棠花) 형태의 손잡이 끝 장식에는 천관(天官), 사슴, 학 등이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 부분은 소뿔로 감쌌다. 손잡이와 칼집이 접하는 부분에는 옥토끼와 상서로운 구름[祥雲] 모양의 길상 도안을 새겼는데 이는 좋은 일이 생기고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집은 동과 상어 가죽으로 감쌌으며, 용과 호랑이를 반씩 닮은 짐승의 문양(이호문, 螭虎文)과 영지 문양 금동 장식을 덧대어 장식하였다.

 

자료: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

 

누르하치 시보와 시보함(太祖高皇帝努爾哈赤諡寶·諡寶函) 국가 1급 문물

청 태조 누르하치가 서거한 후 황가(皇家) 태묘(太廟)에 봉안한 시보(諡寶)이다. 시보는 황제나 황후가 죽은 뒤 일생의 공덕을 평가하고 칭송하기 위해 지은 호칭인 시호를 새긴 인장이다. 1645(순치, 順治 2)에 만들어 베이징 태묘에 보관했다가 1736(건륭 원년)에 시호를 추가하여 다시 만들었으며, 이후 1783(건륭 48)에 성경(盛京) 태묘로 옮겨졌다. 인면은 정방형이고 용 한 마리가 웅크린 형태의 손잡이에는 노란색 유소(流蘇)가 달려 있다. 인면에는 누르하치의 묘호와 시호를 새겼는데 오른쪽 에는 4행의 한자를 전서체로, 왼쪽에는 6행의 만주 문자를 해서체로 각각 새겼다. 시보함은 금칠을 하고 용과 봉황 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내함과 외 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

 

황룡포(明黃龍袍) 국가 1급 문물

청 황제가 착용했던 길복(吉服)이다. 황색 비단으로 만든 길이가 긴 포() 형태이다. 둥근 옷깃[원령圓領]에 말 굽 모양 소매단[마제수馬蹄袖]으로 이루어졌으며 오른쪽으로 여미게 되어 있다. 옷에는 아홉 마리의 용 문 양과 황제의 권위와 미덕을 상징하는 십이장문(十二章文)이 장식되어 있다. 그 사이에 박쥐와 구름 문양을 수놓았고 하단에는 파도와 절벽 문양이 있다.

 

고궁박물관 특별전 포스터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특별전 포스터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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