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미국에 교통 혁명 이끈 풀턴의 증기선
신생 미국에 교통 혁명 이끈 풀턴의 증기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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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에 잠수함 설계 제의…파리서 美 대사 리빙스턴 만나 증기선 개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활용한 증기선(steamboat) 아이디어는 1700년대초부터 증기기관 발명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데니스 파팽, 토머스 세이버리, 토머스 뉴커먼 등 초기 증기기관 연구자들은 증기기관을 바퀴(外輪)에 연결해 수차가 돌아가는 힘으로 배를 움직이는 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초기 증기엔진은 배를 움직일 정도의 에너지를 발생하지 못했고, 기관을 연결하는 피스톤을 제작하는데 실패했다.

1729년 영국의 조너선 헐스(Jonathan Hulls)는 증기선을 발명해 뉴커먼의 증기엔진을 장착할 것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776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올 때까지 증기선은 상상의 선박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1783년 프랑스에서 와트 엔진을 장착한 증기선이 나왔지만 15분간 시연 후 엔진이 멈춰섰다. 곧이어 프랑스에서 또다른 증기선이 시도되었으나,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개발의 발걸음은 멈춰 서게 되었다.

 

1909년에 복제된 풀턴의 노스리버호. /위키피디아
1909년에 복제된 풀턴의 노스리버호. /위키피디아

 

증기선은 복잡한 기계였다.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 증기를 활용하는 기관, 배의 추진장치, 선체의 설계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어느 한 분야가 부실해도 고장이 나거나 폭발해 버린다. 따라서 유럽의 발명가들이 오랫동안 증기선을 시도했지만 상용화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오히려 증기선이 상용화된 곳은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미국에서였다. 유럽인들이 새로운 기술에 열광적이었지만 전통을 중시했고 편리한 도로가 곳곳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증기선을 도입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갓 탄생한 미국에는 도로와 철도 등의 사회기반시설이 크게 부족했고 델라웨어강, 허드슨강, 미시시피강 등 배가 운항할만한 큰 강이 많았다. 도로나 철도를 놓는 것보다 배를 뛰우는 게 신대륙에서는 경제적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증기선을 만들어 운항한 사람은 존 피치(John Fitch, 1743~1798)였다. 그는 1788년에 성공적으로 증기선을 건조해 이듬해 델라웨이강에 뛰웠다. 피치의 증기선은 30명의 승객을 태우고 필라델피아에서 뉴저지 벌링턴까지 3,200km를 시속 11~13km로 운항했다. 피트는 배를 운항하기는 했지만 사업엔 실패, 결국엔 파산하고 말았다. 운임이 연료비용을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치가 고전할 때 제임스 럼지(James Rumsey), 존 스티븐스 2(John Stevens II)도 증기선을 디자인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럼지와 스티븐스는 배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피치와 특허분쟁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미국에서 증기선 사업자들이 이전투구를 하고 있을 때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 1765~1815)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풀턴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석세공인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다가 한 동안 화가로 일했다.

그는 23세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기계 발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풀턴은 영국 최초로 내륙 운하를 건설한 브리지워터 공작(Duke of Bridgewater)을 알게 되어 운하에 관해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1796년에 <운하 항해의 개선에 관한 논고>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풀턴의 책자에 큰 관심을 보인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는 풀턴을 초청해 그의 운하 방식을 활용하려 했다. 풀턴은 1797년부터 파리에 머물면서 각종 기술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알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면서 신무기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풀턴은 잠수함이라고 명명한 배를 설명하는 각종 도식과 그림을 나폴레옹에게 내 놓았다. 그는 그 배가 물 밑으로 항해하면서 수면에 있는 배를 공격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100% 신뢰하지 않았다. 어떻게 물 밑에서 불을 피워 동력을 만들며, 그런 배를 어찌 선원들이 조종할수 있다는 말인가. 나폴레옹은 풀턴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풀턴의 또다른 발명품에는 관심을 가졌다. 풀턴이 제시한 제2의 아이디어는 추진력 없이 접촉 시에 폭발하는 부력 제로의 탄약인데, 지금의 어뢰(魚雷를 말하는 것이었다.

풀턴은 1800729일 나폴레옹의 지원금으로 노틸러스(Nautilus)라는 잠수함 시제품을 제작했다. 노틸러스 호는 센 강에서 3시간 동안 잠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속도가 너무 느려 군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풀턴의 노틸러스 잠수함 설계도(1800) /위키피디아
풀턴의 노틸러스 잠수함 설계도(1800) /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하던 중에 풀턴은 미국 대사로 파리에 온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의 눈에 띠었다. 리빙스턴은 미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워싱턴 정가에 영향력이 있었고, 뉴욕주를 가로지르는 허드슨강에 운항독점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빙스턴은 파리에서 풀턴을 붙잡아 계약부터 했다. 그 계약은 미국 허드슨강에서 운항할 증기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풀턴은 리빙스턴의 지원으로 증기선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1803년에 보나파르트(Bonaparte) 호로 명명된 증기선을 제작했다. 그 배는 8마력의 증기기관을 장착하고 선체 길이는 20m에 달했다. 풀턴은 그 증기선을 센 강에 띄웠지만, 선체가 너무 약해서 금방 부서지고 말았다.

 

나폴레옹 밑에 있을 때 영국인이라면 치를 떤다고 말했던 풀턴은 1804년 충성심을 바꿔 영국으로 갔다. 그는 윌리엄 피트 총리의 주문을 받아 어뢰를 개발했다. 그의 어뢰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넬슨 제독의 승리를 안겨주었고, 나폴레옹에겐 재앙을 만들어주었다.

영국에 봉사하던 풀턴은 1806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프랑스에서 만났던 리빙스턴을 만났다. 리빙스턴의 허드슨강 운항 독점권을 놓고 뉴요커였던 스티븐스가 덤벼들었지만, 리빙스턴은 결국 풀턴에게 운항권을 주었다. 게다가 리빙스턴의 조카이자 대부호인 월터 리빙스턴의 딸 헤리어트(Harriet)와도 결혼했다.

 

노스리버호 운항 모습(1870) /위키피디아
노스리버호 운항 모습(1870) /위키피디아

 

1807811일에는 풀턴은 노스리버(North River Steamboat)호를 제작했다. 배의 길이는 43m, 용적은 150톤였다. 이 배는 후에 클러몬트(Clermont)호로 바뀌었다.

노스리버 호는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과 올버니 사이 240km를 운항했다. 상류로 거슬러 가는데 32시간, 돌아서 내려오는데 30시간이 걸렸다. 당시에 범선으로 같은 거리를 항해하는 데 4일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스리버 호는 약 3배의 빠른 속도로 운항한 것이다. 풀턴의 노스리버호는 바야흐로 증기선의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풀턴이 허드슨강에서 증기선 운항에 성공하면서 미국에선 증기선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풀턴과 리빙스턴은 허드슨 강에 여러 척의 증기선을 추가했고, 뉴저지 브리턴강(Raritan River), 뉴욕~캐나다 동부 뉴브런스윅(New Brunswick)을 운항하는 증기선을 띄웠다.

오대호에도 1806년 온테리어호에 증가선이 운항을 개시했고 운하가 열리면서 1929년 이리호와도 연결했다.

곧이어 미시시피강, 오하이오강에도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애팔라치아 산맥에 가로 막혀 개발이 지연되었던 미국 중부가 이때부터 개척되기 시작했다. 1817년에 애팔라치아 산맥 서쪽에는 17척의 증기선이 운항되었는데, 3년후에는 69, 1855년에는 727척으로 늘어났다.

 

증기선은 미개척지가 많은 미국에서 교통 혁명을 일으켰다. 이전에는 바지선으로 운행되던 주요 수로들에 증기선이 들어가면서 사람과 물류 이동이 편리해졌다.

1824년 미국 법원은 증기선 운항에 대한 풀턴과 리빙스턴의 독점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누구나 시장에 참여할 길이 열렸다. 이로써 미국 사람들은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증기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시시피강 운항비용이 곧 4분의1로 떨어졌다. 허드슨강 운항비용은 1814~1854년 사이에 90% 하락했다.

피츠버그에서 뉴올리언스까지 가는데 전에는 한달 이상 걸렸지만 증기선이 다니면서 2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내륙도시 피츠버그는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면서 공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로버트 풀턴 /위키피디아
로버트 풀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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