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브라질…사탕수수 농장에서 금 생산국으로
어쩌다 브라질…사탕수수 농장에서 금 생산국으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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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연속…토르데시야스 조약, 카브랄의 항해 오류, 금맥 터지며 발전

 

브라질은 면적 8515,767으로 러시아·캐나다·중국·미국에 이어 세계 5, 인구 21천만명으로 세계 6위의 나라다. 브라질은 어쩌다가 이렇게 큰 나라가 되었다.

1400년대 후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서로 세계가 자기네 것이라고 우겼다. 먼저 스페인이 1493년에 교황을 앞세워 서경 38°를 기준으로 하는 경계선을 그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더 6(Pope Alexander VI)는 스페인 출신으로, 이 경계선은 사실상 스페인이 그은 금이었다. 교황이 제안한 경계선으로 하면 지금의 브라질 동쪽 끄트머리 정도만 포르투갈의 땅이 된다. 이에 포르투갈은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1년간 협상을 벌여 경계선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서경 43°37“을 기준으로 한다는데 합의했다. 이 조약이 149467일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경계선의 동쪽을, 스페인은 서쪽을 차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지도상으로 브라질의 일부를 얻게 된 것이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한 세계 분할 /위키피디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한 세계 분할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은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을 받아 인도로 가는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13척에 15백명을 실은 그의 선대는 아프리카 서쪽 해상을 남하하던 중에 150명을 태운 배 한척이 실종되었다. 남은 선대는 실종선을 찾아 헤메다가 적도 이남으로 내려가다가 기수를 돌렸는데 421일 바다에 해초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육지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가까이 다가갔다. 다음날인 422일 그들은 뭍에 내렸다. 그 곳은 브라질 땅이었다. 그는 그곳을 부활절 주간에 발견했다는 의미로 몬테 파스코알(Monte Pascoal)이라고 명명했다. 지금의 브라질 포르투 세그루(Porto Seguro). 카브랄은 그곳을 포르투갈의 영토라고 선언하고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로 갔다. 이 우연하고 엉터리 같은 항해가 브라질을 발견한 동기라고 한다.

다행히도 카브랄이 발견한 땅은 6년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의 땅으로 인정된 곳이었다. 처음에 포르투갈령 브라질은 서경 43°37“을 일직선으로 그어 그 동쪽이었다.

카브를 일행은 해안가 밀림을 탐색하던 중에 붉은 나무가 군집해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불붙은 숯과 같은 나무라는 뜻에서 그 나무의 이름을 파우브라질(Pau-Brasil)이라고 명명했다. 브라질의 국명이 여기서 출발한다.

 

카브랄의 항로 /위키피디아
카브랄의 항로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은 처음에 브라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이 발견되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런 귀금속은 나오지 않고 수송하기 힘든 목재가 무성한 것에 식민자들은 실망했다. 1520년대에 브라질에 이주한 포르투갈인은 3천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파우브라질이란 나무의 쓰임새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나무는 붉은색을 내는 염료로 활용가치가 있었다. 목질이 아주 단단해 첼로 등 현악기의 활을 만드는데도 쓰였다. 당시 유럽의 고급 직물은 붉은색으로 염색했는데, 이보다 좋은 염료는 없었다.

포르투갈 식민자들은 해안가에 공장을 세워 도끼, , 천과 같은 제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노동력을 구하기 힘들었다. 카브랄의 발견 당시 브라질엔 원주민이 100만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돈이라는 개념이 없어 일꾼으로 써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해서 일을 시켰다. 노동력이 확보된 이후 브라질나무는 대량으로 남벌되었다. 곧이어 나무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지금은 위험수종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파우브라질이 브라질 식민자들에게 돈을 만들어준 것은 잠시였다.

그후 포르투갈 식민자들은 밀림으로 더 들어가면서 금과 은의 산지를 발견하고, 일대가 사탕수수 재배지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라질나무의 존재는 금새 잊혀져 버렸다.

 

브라질 영토 변화 /위키피디아
브라질 영토 변화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 식민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본국에서 건너간 사람에겐 18나 되는 넓은 땅을 거져 주었다. 땅을 소유한 사람이 일정기간후 수확을 하게 되면 수확량의 10%의 세금을 떼었다.

 

원주민 사냥에 나선 포르투갈인 /위키피디아
원주민 사냥에 나선 포르투갈인 /위키피디아

 

1580년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면서 브라질의 상황도 달라졌다. 1548년 돈 세바스티안 국왕(Dom Sebastião)이 모로코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의 숙부인 헨리케( Henrique)가 왕위를 이었으나, 2년만에 죽었다. 헨리케는 카톨릭 주교였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60년간 하나의 왕국으로 통치되었다.

본국이 사라진 것이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역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경계선을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했다. 브라질 서쪽은 아마존 중상류의 오지였다.

북동부 오지로 처음 진출한 사람들은 목축업자였다. 그들은 아마존 상류로 이동하면서 대규모 목축지를 만들었다. 울타리도 필요 없었다. 넓은 지역에 그대로 소를 방목했다.

그다음 내륙으로 들어간 반데이란테스(Bandeirantes)라 불리던 무리였다. 그들은 깃발(반데린)을 앞세우고 인간 사냥에 나섰다. 해안가의 농장에서 인력이 부족해 지고, 노예를 사는데 돈이 들었기 때문에 인디언 원주민들을 잡아 노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원주민을 생포해서 노예로 팔았다.

반데이란테스는 또 아마존 밀림에서 은과 금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상파울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웃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페루와 멕시코에서 대량의 은이 발견되었는데, 브라질에서도 나오지 않으란 법이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오지 진출은 스페인 식민지의 경계를 무시하고 밀고 들어가 현재의 파라과이, 볼리비아 국경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브라질 국경은 이들이 개척한 것이다.

이들에 앞서 내륙에 먼저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사들은 오지에 진입해서 원주민들에게 카톨릭을 전파했다.

 

네덜란드령 브라질(1630~1654)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령 브라질(1630~1654) /위키피디아

 

이 무렵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부를 점령해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했다. 1630년 네덜란드는 서인도회사(WIC: Dutch West India Company)를 설립해 헤시페(Recife)를 수도로 삼고 총독을 내려보냈다. 네덜란드는 그동안 브라질산 사탕수수의 최대 구매자였는데, 차제에 사탕수수 농장을 직접 경영하겠다며 영토를 확보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브라질 식민지는 포르투갈령 식민지의 절반에 해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현지 브라질 농장주와 마찰을 빚었다. 브라질인들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반발했고, 고리의 대출에 반감을 가졌다.

1640년 포르투갈이 왕통을 되찾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상실한 식민지를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1648년 아프리카 앙골라를 되찾은데 이어 과라라페스 전투(Battle of Guararapes)에서 승리해 1654년 네덜란드를 브라질 땅에서 쫓아내 버렸다. 네덜란드의 브라질 북부 통치는 24년에 불과했다. 브라질에서 쫓겨난 네널란드인들은 카리브해 섬으로 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일으켰고, 그곳에서 신기술을 도입해 브라질과 경쟁하게 되었다.

 

브라질의 금광도시 오로 프레투 /위키피디아
브라질의 금광도시 오로 프레투 /위키피디아

 

남미 내륙을 돌아다니던 반데이란테스들은 마침내 대형 금맥을 터트렸다. 1696년에 미나스 제라이스, 1721년에 마토 그로소, 1726년에 고이아스에서 풍부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세기 중반에 브라질은 세계 금 생산량의 85%를 차지했다. 금이 발견되면서 4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몰려왔고, 50만명 정도의 흑인 노예들이 수입되었다. 네덜란드와 사탕수수 경쟁을 버리던 농장주들은 농장을 버리고 금광으로 이동했다. 금광으로 유명한 오로 프레투(Ouro Preto)는 인구 10만명의 대도시가 되어 당시 뉴욕의 인구의 2배 이상이 밀집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브라질의 중심은 사탕수수가 주생산물이었던 북동부가 아니라, 광물을 수출하는 리우데자네이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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