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6공 실명제②…신중한 접근
실패한 6공 실명제②…신중한 접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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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중간평가 앞두고 실시 발표…주가붕락, 당내 반격, 대통령 의지 “흔들”

 

198812월초 문희갑 신임 청와대 경제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부패구조를 척결해야 합니다. 강력하고 전면적인 경제개혁이 없으면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실시해 불로소득의 근원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제개혁에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정통관료 출신이자 경북고 후배인 문 수석이 듬직해 보였다.

취임 첫해 13김의 여소야대 정치구조와 노사분규등 사회전반의 격렬한 민주화 요구에 시달리던 노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공약한 중간평가를 치러야 했다. 노 대통령은 야당의 정치적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도 자리를 걸고 경제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문 수석을 절대 신임했다.

노 대통령은 문 수석의 과감한 돌파력을 기대했고, 대통령 스스로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강조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노대통령은 실명제에 대한 신중론을 견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 수석엔 금융실명제에 대한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냈고, 특유의 강성기조로 실명제를 밀고 나갔다. 그는 1978년 국방부 예산편성국장을 맡으면서 군부의 반발을 사면서도 국방예산을 삭감했고, 기획원 예산실장이었던 1982년 제로베이스 예산편성 원칙을 주도하는등 강성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해를 넘겨 1989331일 상오, 서울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문 수석은 고려대 경영대학원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 참석,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실명제에 대해 언급했다.

금융자산 소득은 부동산 소득과 함께 불로소득의 원천입니다. 증권투자 등 금융소득에 대한 세금이 제대로 부과되지 못해 계층간 격차가 오히려 확대돼 왔습니다. 따라서 1991년으로 예정돼 있던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앞당길 방침입니다.”

사공일 재무부 장관의 거론으로 시작된 6공화국의 실명제는 문 수석의 개혁론에 힘입어 속도를 더해갔다. 문 수석은 청와대 입성과 동시에 장관급으로 승진해 차관급이었던 전임 박승 수석과 달리 일일이 기획원과 재무부를 통제해 나갔다.

청와대의 문 수석과 함께 실명제를 밀어붙인 쌍두마차의 주역은 1988125일 문 수석과 함께 입각한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다. 조 부총리는 노 대통령과는 사제지간으로 육사 교관 시절에 전두환 노태우 생도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노 대통령은 여느 국무위원을 대하는 것보다 조 부총리를 항층 공손하게 대했고, 1~2주에 한번은 독대 시간을 갖고 경제문제는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나눴다. 나웅배 부총리 시절엔 없던 일이다.

조 부총리의 경제 내각은 이른바 서울 상대 팀이었다. 이규성 재무부, 이봉서 동력자원부, 박승 건설부 장관은 조 부총리와 동문이었고, 한승수 상공부장관은 연대 출신이지만 서울상대에서 교편을 잡은 20년 지기였다. 육사 11기 출신의 김식 농림수산부 장관은 육사 교수 시절에 조 부총리의 제자였다.

조 부총리의 서울 상대 내각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 성장제일주의를 내걸었던 서강학파와 문제 해결방식을 달리했다. 그들은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문제, 즉 농어촌문제, 계층적자, 도농문제등 병든 한국경제에 메스를 가했다.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으로 대별되는 문 수석의 경제개혁론이 내각의 뒷받침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6공화국의 실명제는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청와대의 문 수석이 파워, 노 대통령의 존경을 받은 조 부총리가 권위를 형성하면서 정권출범 다음해에 순조롭게 본궤도에 올랐다.

 

1988년 10월 14일자 매일경제신문 1면 기사
1988년 10월 14일자 매일경제신문 1면 기사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의 설명이다.

“5공화국 때 많은 부작용이 있더라도 실명제가 시행됐어야 했어요. 실명제가 도입된다 해도 하루 아침에 모든 내용이 정착되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가 정착하려면 5~10년이 걸립니다. 문제는 시작이죠. 경제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고 구조도 복잡해지면서 금융저축이 다소 감소하는 한이 있어도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6공화국의 실명제 추진은 5공화국 때의 반성에서 출발했다. 19827·3 조치롤 불린 실명제가 일주일간의 비밀작업을 거쳐 전격 발표돼 정치권과 재계의 반발로 4개월만에 좌절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안공혁 당시 재무부 제2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5공화국의 1차 때보다 6공화국의 2차 때 실명제 추진은 보다 조직적이었습니다. 실명거래법률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만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은행·보험·단자등 금융기관별로 실명제 추진팀을 만들어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문 수석은 실명제 실시를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별도의 조직구성을 생각했다. 그는 이 조직을 청와대 직속기구로 편성해 보다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며 이규성 재무장관의 의견을 구했다. 이 장관이 반대했다. 이 장관은 실명제는 재무부 소관 사안인만큼 재무부 내에서 기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해 문 수석이 고집을 꺾지 않을수 없었다. 이규성 장관은 국장급을 단장으로 하는 실명제 추진 조직을 구성하고 이동호 차관, 안공혁 차관보를 라인으로 연결했다.

1989411일 마침내 과천 정부종합청사 부근의 국민은행 과천지점 2층에서 금융거래실명제 준비단 현판식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문 수석으로부터 견식과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은 윤증현 국장이 단장을 맡았고 산하에 총괄·금융·증권·세제·세정의 5개반을 두었다. 재무부를 중심으로 국세청과 금융기관에서 엘리트급 직원이 뽑혀 왔다.

현판식을 한 뒤 이규성 장관은 지난번과 같은 도중하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나 시기선택이 잘못되면 부작용이 커지고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이번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작업부터 충분히 하겠습니다.”

이 장관의 이같은 다짐을 노 대통령이 뒷받침했다. 412일 노 대통령은 과천종합청사에서 전 국무위원, 경제단체장, 근로자 및 농민대표, 언론계 및 학계대표 등 8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제사회균형발전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1990년 종합토지세, 1991년 실명제 실시를 확정했다. 재무부 실명제준비단의 접근방식은 단계적, 점진적으로 실시한다는 것.

당시 이 준비단을 관할했던 재무부 당국자의 회고다.

원칙적으로 경제에 충격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어요. ‘엉성한 그물을 치자.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도 모른척 속자. 차츰차츰 그믈을 조이자는 것이었지요. 준비단은 실명제 실시 시기와 방식을 연구했고 조사된 기초자료를 재무부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창고에서 자료만 꺼내면 실명제 실시가 가능하도록 자료가 충분히 준비되었지요.”

준비단은 다음해인 19906월말가지 행정준비를 완료하고 9012월말가지 관련법령을 개정한 다음 911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준비단이 세운 골격은 6개월간의 경과기간 보장 금융거래 비밀의 철저한 보장 실물투기 방지 점진적인 종합과세로의 이행이었다.

금융거래 비밀의 보장은 검은 돈의 이력을 덮어두고 돈 가진자의 고민을 덜어주는 것인데, 실명제 성패의 관건으로 인식됐다. 준비단은 실명전환 자금에 대해 일체의 과거를 묻지 않고 법관의 영장발부, 금융기관간 정보제공, 세무조사 등 법정 사항 이외엔 자료제출을 금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91년 실시에 들어가도 실명 전환을 위해 6개월간의 경과기간을 두며, 단시일 내에 종합과세를 실시하려다 실패한 5공화국 때의 경험을 살려 금융자산에 대해 분리과세에서 종합과세로 가되 과세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던 개혁경제팀은 노 대통령의 신임과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업고 거리낌 없이 밀고 나갔다. 그러나 걸림돌이 돌출하기 시작했다.

문 수석과 조 부총리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경제개혁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가 약해졌다. 정치권에서는 민정당의 이승윤 정책위의장, 내각에서는 김종인 보사부 장관등 이른바 서강학파들이 서울상대 출신의 경제팀에 대한 공격거리를 찾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으며 8941,000 포인트를 돌파한 주가지수가 급격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실명제에 대한 지지도 주가지수와 그 맥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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