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양식 이식된 신라 귀걸이 포항에서 출토
고구려 양식 이식된 신라 귀걸이 포항에서 출토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2.1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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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리 유적서 5세기 후반 금제귀걸이 3쌍 나와…신라 문화 후진성 보여줘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 방식을 모방한 귀걸이가 나왔다. 발굴된 신라 귀걸이는 5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문화와 기술이 고구려에 비해 뒤졌던 것을 보여준다.

()화랑문화재연구원은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에서 금제굵은고리귀걸이(금제태환이식, 金製太環耳飾) 1쌍을 비롯하여 금제가는고리귀걸이(금제세환이식, 金製細環耳飾) 2, 은제팔찌 1쌍 등의 장신구류와 다수의 토기를 출토했다.

이중 금제굵은고리귀걸이는 중심고리 아래에 중앙에 가로로 새김눈금선대(각목대, 刻目帶)가 장식된 소환연접구체(小環連接球體)의 샛장식과 원뿔형의 드리개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모양은 충북 청원 상봉리, 서울 능동, 강릉 병산동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유사하다.

다만 대련리 유적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샛장식에 새김눈금선대(각목대)가 존재하고 샛장식 아래쪽의 원반상 장식이 생략되는 등 전형적인 고구려산 귀걸이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신라 시대에 고구려의 제작 기법을 모방해 귀걸이를 제작한 것으로 발굴팀은 판단했다. 발굴팀은 이 귀걸이가 고구려의 귀걸이 양식이 신라에 이식된 것으로 보았다. 대련리 귀걸이는 고구려 양식에 비해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고구려에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발굴팀은 진단했다.

 

대련리 4호분서 출토된 신라 귀걸이(왼쪽)와 청원 상봉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귀걸이 /문화재청
대련리 4호분서 출토된 신라 귀걸이(왼쪽)와 청원 상봉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귀걸이 /문화재청

 

금제가는고리귀걸이는 각각 중심고리(주환, 主環)에 샛장식(중간식, 中間飾), 드리개(수하식, 垂下飾)가 결합된 구조인데 천마총과 서봉총, 보문리 부부총, 창녕 송현동고분 등에서 비슷한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원통형 샛장식에는 선문(줄무늬, 線紋)과 투각(뚫새김, 透刻)장식을 하였으며, 드리개에는 넓은 나뭇잎형 장식 1매와 작고 오목한 형태의 나뭇잎 모양(측엽, 側葉) 장식 2매가 각각 달려있다.

이와 함께 돌방 남쪽 끝의 껴묻거리 공간에서는 그릇받침(기대, 器臺),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등 다양한 형식의 토기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포항 대련리 4호 석실에서 나온 금제가는고리귀걸이(金製細環耳飾) /문화재청
포항 대련리 4호 석실에서 나온 금제가는고리귀걸이(金製細環耳飾) /문화재청
포항 대련리 4호 석실에서 나온 은제팔찌 1쌍 /문화재청
포항 대련리 4호 석실에서 나온 은제팔찌 1쌍 /문화재청

 

 

포항 대련리 유적에서는 돌덧널무덤(석곽묘, 石槨墓) 1기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橫穴式石室墓) 6기 등 모두 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무덤은 도굴을 당했으나 무너진 천장돌(개석, 蓋石)이 껴묻거리(부장, 副葬) 유물을 덮고 있었던 4호 무덤은 다행히 도굴꾼의 손길을 피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 가장 큰 4호 무덤은 돌방 길이 5.3m, 너비 1.8m의 긴사각형이며, 주검받침(시상, 屍床)이 상하 2겹으로 겹쳐져 있다. 하층(1) 주검받침에서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 은제팔찌 1쌍이, 그리고 상층(2) 주검받침에서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이 각각 출토되었다. 주검받침이 두 번에 걸쳐 만들어진 점, 다수의 귀걸이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4호 무덤에는 3구 이상의 주검이 시간차를 두고 추가로 묻혔던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팀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제귀걸이와 토기들은 경주 외곽에 해당하는 포항 일대의 굴식돌방무덤 수용 시기와 경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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