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이동통신 선정 논란①…논의의 출발
6공 이동통신 선정 논란①…논의의 출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2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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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개방 요구에 앞서 국내시장 개방…선경, 포철 등 대기업 참여

 

노태우 정부의 6공화국 시절에 떠들썩했던 이슈가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이다. 요즘 흔히 쓰는 모바일통신을 어느 기업이 하느냐를 선정하는 사업이었는데, 미래에 크게 성장할 사업인 만큼 굵직한 기업들이 참여했다.

이동통신사업은 체신부가 주관이 되어 선경, 포철, 코오롱 등 내로라는 재벌그룹들이 대거 참여, 혈전을 벌였다. 포철은 공기업이라는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 특유의 저돌적인 자세로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들었다. 포철의 이동통신사업추진은 박태준의 정치참여 시기에 시작해 대통령선거라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렸다. 그러나 6공이 끝나면서 박태준 회장과 그의 사단은 몰락했지만, 포철의 이동통신사업은 다음 정권에 들어와 성공을 한다. 이동통신사업은 선경, 포철을 체신부 등이 극적인 드라마를 엮어 냈다.

 

6공화국 정부가 추진한 수많은 사업 가운데 제2이동통신사업 만큼 시종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은 사업은 없을 것이다. 길게는 19922월부터 8월까지, 짧게는 8월 한달동안 회오리쳤던 이동통신 파문은 한국적 정치상황과 기업간 이권다툼이 빚어낸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새 정권이 들어서고 1년이 지나고서야 완전히 수습된, 길고도 지리한 게임이었다.

선경,포철,코오롱,쌍용,동부,동양등 6개 대기업이 달려들었고, 이들대기업은 모두 정치권과 깊은 연계를 갖고 있었다.선경의 최종현(崔鍾賢)회장은 대통령의 사돈이었고, 포철의 박태준회장은 집권당의 최고위원이었으며, 코오롱의 이동찬(李東燦)회장은 김종필(金鍾泌)최고위원과 사돈이었다. 쌍용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동생을, 동부는 노태우 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琴震鎬) 의원을, 각각 끼고 있다는둥 소문이 나돌아 사업신청초기부터 정치적으로 비화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2이동통신에 대한 논의는 전두환의 5공화국말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5공말 체신부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급증하는 이동전화의 수요를 충족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추세에 맞추어 또다른 형태의 통신공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2이통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6공화국 정부가 출범한지 1년 후인 1989년초. 최영철(崔永喆) 체신부장관이 청와대 연두보고에서 이동통신 서비스에 경쟁 체제의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보고, 노대통령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에 체신부는 정보통신 사업의 경쟁 도입 여부에 대한 타당성과 경쟁방법에 관해 학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대학교수, 연구기관의 연구원, 관련업계 인사등 80명으로 구성된 정보통신발전 협의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897월 최영철 장관은 정보통신사업의 경쟁체제 도입에 관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냈다.

그때 체신부가 별도의 이동전화회사를 설립키로 한 배경에 대해 박영일(朴英一) 당시 통신정책심의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엔 미국으로부터 전기통신 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이 거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당장은 개방을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언젠가는 개방을 해야할 입장이었습니다. 개방에 따른 대응책을 연구해 달라고 전문가들에게 부탁했더니, VAN(부가가치통신망), 이동통신, 시내, 시외및 국제전화등 일반전화 시설의 순으로 개방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어요.”

신태환(申泰煥) 전서울대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통신발전협의회는 198911월 이동전화의 경쟁제도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통신사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결론은 급변하는 통신기술과 세계적 추세인 통신사업의 개방화, 민영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에 의해 백년간 독점체제를 유지해 왔던 통신사업에 경쟁 체제를 도입, 세계적인 기술 변화에 대응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동통신이 뭐길래, 정부가 특혜의 구설수에 몰리면서 제2사업자를 선정하려고 했을까.

1970년대만 해도 경쟁적으로 전화를 가설 하려고 했고, 전화를 한대 놓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후 10여년간 유선전화부문에 대한 정부의 집중투자로 전화사정이 선진국 수준에 가까워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의 조류는 유선통신의 시대를 지나 무선통신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 부문이 미래정보화 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열차 선박 항공기 등 이동하는 물체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이동통신은 국가경쟁력 향상과 직결되는 수단으로 됐다.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분야는 전파의 월북(越北)을 막아 통신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안보 현실이 민간의 이동통신 이용을 억제해 왔기 때문에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청와대 경호실이나 안기부 경찰 등 극히 제한된 분야에만 이동통신 가입을 허용되던 것이 1984년 한국이동통신이 설립되면서 셀룰러 방식의 신형차량전화가 보급되면서 일반에 개방되기 시작했다.

보급율과 기술수준이 뒤떨어진 이동통신 분야에 미국 등 선진국의 개방압력이 점차 가중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선진국기술과 제품의 국내유입을 막기 위해 조속한 경쟁력 구축이 필요했고 특히 국가의 신경망과 같은 통신망을 외국기술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게 체신부의 일관된 논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체신부는 1990년 들어 통신정책수립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19907통신사업구조조정안을 확정, 발표한다. 이 구조조정안에 따르면 시내, 장거리, 국제 이동전화및 부가가치통신 가운데 투자규모가 적고 기술변화가 빠른 장거리 및 국제전화, 이동통신 분야는 점진적으로 경쟁을 허용토록 돼 있다. 또 시기에 대해서는 국제전화 사업의 경쟁은 1991년에 먼저 실시하고 이동통신은 1991년중 법령을 정비한뒤 1992년 상반기에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체신부가 통신사업에 대한 구조조정작업을 벌이는 동안 선경그룹과 포철 등 기업부문에서 이동통신에 대한 사업 검토가 시작됐다.

 

선경의 이동통신사업 추진계획은 최 회장의 천부적인 사업수완에서 출발한다. 체신부가 제2이동전화사업의 민영화를 구상하기 훨씬 전인 1984, 최 회장은 그룹 사장단회의를 주제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사업은 정보통신사업이다는 말을 툭 던졌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그룹의 사장단은 최 회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한다. 최 회장의 지시로 선경은 1986년 미주 경영실에 텔리커뮤니케이션팀을 발족, 미국 정보통신사업에 대한 조사연구에 착수했다. 또 그해 미국의 정보통신기업을 인수, 유크로닉스사를 설립했다. 선경이 인수한 이 회사는 음성을 디지털정보로 변환시키는 기술을 보유한으로, 선경이 차세대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회사였다.

그룹차원의 이동통신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국내의 선경계열사들도 이동통신팀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89년 선경그룹에는 ()선경과 유공이 정보통신회사로 선경정보시스템과 YC&C(유공정보통신)을 각각 설립했다. 그룹내에 두개의 정보통신회사가 세워진 것은 계열사별로 수립한 장기계획에 의한 것인데, 1990년초 그룹의 경영기획실은 두 회사를 통합, 기획실내에 이동통신사업팀으로 재편했다. 이 팀이 체신부의 제2이통사업자선정에 나선 大韓텔레콤의 전신이다.

선경은 정부가 이동통신사업 구조조정을 입안하던 1980년대후반에는 이미 이 부분에 상당히 주력해 있었던 상태였다. 또 최 회장과 미국 시카고대 동문인 신태환 박사가 정보통신발전협의회 위원장을 맡을 무렵, 선경은 그룹 산하에 이동통신팀을 발족, 정부 방침이 정해지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포철의 이동통신사업은 박태준 회장의 선견지명으로 시작됐다. 박 회장은 포철의 설비를 공급해준 독일 만네스만 그룹의 베르너디터 회장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베르너디터 회장은 포철에 자동차 제작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 포철이 한때 광양제철소 부지에 자동차 부품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검토한 적이 있었다. 박 회장이 1980년대말 독일을 방문했을 때 만네스만 측에서 이동통신사업을 권유하면서 파트너로 미국의 무선통신사인 팩텔사를 소개했다. 당시 팩텔사는 한국의 통신시장이 개방될 경우에 대비, 한국 측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만네스만 측에 한국기업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해 놓고 있었다.

박 회장은 1992년이면 광양4기설비의 준공으로 24년에 걸친 제철소건설의 대역사를 마친 후에 대비, 사업다각화차원에서 진출할 업종을 찾고 있었다. 만네스만측의 권유를 받은 박 회장은 이동통신 분야의 진출을 결심, 귀국후 임원들을 불러놓고 국내외 이동통신사업의 현화을 연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908월 포철의 이동통신추진팀이 국내외 이동통신사업의 현황과 향후 전망이라는 1백여쪽짜리 보고서를 작성, 박 회장에게 보고한 직후, 팩텔사의 샘 긴 회장이 박 회장을 찾아와 합작을 정식 제의했다. 이어 123일 포철의 자회사인 포스데이타와 팩텔간에 합작에 관한 비밀협정(Confidential Agreement)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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