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보이는 백두산 분화 흔적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두산 분화 흔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2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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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분화와 124년 주기 극대가뭄, 신라말에 겹쳐…흉년으로 민심이반

 

<삼국사기> 900년대초 기록 가운데 유난히 서리와 지진 기록이 많다. 쓰나미의 기록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9023, 서리가 내렸다. (효공왕 6)

9054, 서리가 내렸다. (효공왕 9)

9064~5월에 비가 오지 않았다. (효공왕 10)

907,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효공왕 11)

9083, 서리가 내렸다. 4월 우박이 떨어졌다. (효공왕 12)

9134월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났다. (신덕왕 2)

9143월 서리가 내렸다. (신덕왕 3)

9156, 참포(槧浦)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딛쳐 물결의 높이가 20장 가량 되었다가 사흘만에 그쳤다. (신덕왕 4)

91610월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신덕왕 5)

 

특히 9156월의 기사에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참포(槧浦 또는 斬浦)는 영일만 근처 포구의 지명으로 비정된다. 이 일대에서 바다 물결이 20장이나 치솟아 3일을 지속되었다면 쓰나미로 볼수 있다. 고대의 도량형은 정확치 않지만, 1()10(=33.3cm)으로, 3.33m 정도다. 20장의 물결은 무려 66m나 되는 대형 쓰나마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즈음에 백두산이 폭발하고 대형 쓰나미가 동해바다로 몰려온 게 아닐까.

이해에 앞서 913년에 지진이 나고, 그 다음해인 916년에 지진이 나 우레와 같았다고 하니, 뭔가 한반도에 대형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에도 신덕왕 4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영묘사(靈廟寺) 안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었고 까마귀집이 40개나 되었다. 3월에는 두 번이나 서리가 내렸다.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이 바닷물과 함께 3일이나 서로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 천지 /김현민
백두산 천지 /김현민

 

백두산 폭발은 언제 폭발했을까.

우리나라 지질학계에서는 밀레니엄 분화’(Millenium eruption)로 명명된 백두산 분화가 94611월에 발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올해 412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원장 김복철)이 심재권·이상민 의원과 함께 국회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포항공대 이윤수, 경상대 손영관, 부산대 윤성효 교수는 94611월 분화설을 전제로 토론을 했다.

하지만 변희룡 부경대 교수(환경대기과학)2011년 한국방재학회지에 기고한 백두화산과 다음 대가뭄이란 논문에서 백두산 분화 시작시기에 대해 910년에서 1064년까지 여러 설이 있으며, 사료에 직접 목격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변 교수는 백두산이 폭발한 다음 분화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946년 분화설이 주류이나, 아직은 분화시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동안 우리 사료에 백두산 분화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덕왕 4(915)의 기록과 이에 덧붙여 <삼국유사>의 설명은 한반도에 큰 지질 또는 기상적 대변동이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902년에서 925년 사이에 연이어 나오는 서리 기록은 어떤 의미일까.

부경대 변희룡 교수는 신라 말기 한반도 남부에 냉해가 잦았다는 기록이 백두산 폭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828년 이후 뚜렷한 냉해 기록이 없는데, 900년대가 시작하면서 냉해 기록이 두르러진 것이 백두산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추측했다. 특히 4월 서리기록은 양력으로 5월이므로, 농업의 피해가 막중했을 것으로 변 교수는 짐작했다.

변 교수는 902~915년에 집중되는 서리 기록은 비이상적인 냉기를 의미하며, 이는 백두산 화산으로 생긴 냉기의 영향으로 볼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백두산 화산 폭발은 905년 이전에 폭발을 시작해 상당히 장기간 지속되었으며, 인근지역에 국가의 흥망과 관련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변희룡 교수는 화산폭발의 피해는 낙하하는 화산재에 의한 피해보다 폭발후 수년간 이어지는 지구 냉각과 장기 가뭄, 그로 인한 사회격변의 위험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백두산이 915년 전후에 폭발했다면 발해 멸망(926)과 신라 멸망(935)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재가 상공으로 올라가 대기권의 제트류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폭발후 수년간 성층권에 남아 있게 된다. 성층권에 올라간 화산재는 검은 띠를 형성해 태양열 유입을 차단하고, 대기를 냉각시키고 많은 지역에서 가뭄을 겪게 한다.

변 교수의 예시를 인용하면,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지구 전체를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유럽에 때아닌 빙하기의 대기근이 왔다.

1991년 필리핀의 피나투보(Pinatubo) 화산 폭발 이후 동아시아에 1996년까지 국지적인 가뭄이 빈번했다. 한반도 남부에서도 그 영향으로 1994년 가뭄 피해를 당했다.

 

피나투보 화산 효과 /변희룡 교수 논문 캡쳐
피나투보 화산 효과 /변희룡 교수 논문 캡쳐

 

화산 폭발로 인한 냉해와 가뭄은 농사를 망치게 해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회 변동의 원인이 되고 있다. 기상변동으로 인한 가뭄이 사회격변을 일으킨 예는 중국에서 전한(前漢)과 신()의 교체기, ()~510국의 변동이 대표적이다. 캄보디아의 옛 앙코르와트 왕조의 멸망도 가뭄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마야의 마지막 시기에도 극심한 가뭄이 있었음이 증명된다.

 

서리와 지진, 쓰나미의 기록이 빈번한 기간에 신라에서는 김씨 왕조가 박씨 왕조로 교체된다. 효공왕은 김씨 장기집권을 끝내고 박씨 성을 가진 신덕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삼국사기>에는 효공왕이 아들이 없어 사람들의 추대(國人推戴)에 의해 신덕왕이 즉위했다고 했지만, 쿠데타일 가능성이 크다. 가뭄과 냉해로 민심이 이반하고 더 이상 김씨 왕조에 대한 지지가 약해지고 왕조교체를 원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온다.

변희룡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에 124년 주기의 극대가뭄이 전개되었는데, 909년이 그 주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두산 폭발에 따른 기상재해와 극대가뭄 주기가 겹치면서 신라말기에 극심한 가뭄이 닥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효공왕 때 궁예가 개경에 도읍을 정해 태봉을 세웠고, 국원(충주), 청주, 괴양 등지의 도적들이 궁예에게 투항한다. 게다가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주력 거점인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한다. 견훤은 가뭄에 시달리는 경상북도 일선군(구미·선산)까지 쳐들어와 경주에 바짝 접근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공에 한달만에 멸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발해의 수도 상경은 백두산 근처에 있었는데, 화산 폭발로 냉해가 거듭되면서 농사가 순조롭지 않았고, 백성들은 외침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 한달만에 망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요사(遼史)에는 이심(異心)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재해를 당해 발해 백성들의 민심 동요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두산 화산재 범위 /위키피디아
백두산 화산재 범위 /위키피디아

 

포항공대 이윤수 교수(환경공학부)에 따르면 백두산 분화시 방출된 에너지는 약 840경 주울로써, 동일본대지진의 4배가 넘는 에너지가 천지에서 방출되었다고 한다.

부산대 윤성효 교수(지구과학교육과)는 백두산 대분화가 지난 2000년 동안 있었던 화산활동 중 가장 큰 화산분화사건으로 인지되고 있다고 했다. 이때 백두산에서 날아간 B-Tm 화산재(Baegdusan-Tomakomai tephra)는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지역(강하화산재 두께 5 cm 내외)을 지나 쿠릴열도 해저((강하화산재 두께 1 cm 미만)와 그린란드 빙하 속에서도 발견되었고, 1815년 탐보라 화산분화의 1.5배 수준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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