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리산성④…건물지에서 신라시대 유물 출토
오화리산성④…건물지에서 신라시대 유물 출토
  • 아틀라스
  • 승인 2019.04.0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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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년 역사의 古城…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 장군대와 우물도 확인

 

오화리 산성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저 어딘가에 울릉도가 있고, 독도가 있을 것이다.

삼척 오분동 지역에서는 맑은 날에 울릉도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6세기초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은 이 곳에서 울릉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정절에 나섰을 것이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오화리산성의 축성 시기는 고려말 우왕 10(1384)이다. 만호(萬戶)라는 벼슬이 토성을 쌓고 관리한 책임자였다. 삼척 일대에 1만 가구의 인구가 살지 않지만, 인구수와 관계없이 동해안 수군거점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만호 벼슬을 부여한 것 같다.

조선 중종 15(1520) 동해안 수군거점이 오화리산성에서 정라진의 육향산 밑으로 건너 가면서 오화리산성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이후 보존 및 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게 아닐까.

하지만 고려 문신 이승휴의 시 망무릉도행(望武陵島行)에 등장하는 요전산성(寥田山城)이 오화리산성의 전신으로 추정된다. 이승휴의 시가 계축년(1253)에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고려 우왕 때의 축조시기보다 131년 앞서 오화리산성 자리에 요전산성이라는 성이 버젓이 서 있었다는 얘기다.

그에 앞서 고려시대에 현종 3(1012)에서 문종 32(1078) 사이에 함경도에 살던 여진족들이 25회에 걸쳐 동해안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여진은 당시 울릉도, 멀리 일본 규수지역까지 쳐들어가 약탈했다. 따라서 고려 조정이 수시로 침공해오는 동여진의 해상세력을 막기 위해 동해안에 천혜의 항구조건을 가진 삼척지역에 수군거점의 성을 축성해 방어를 강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지증왕이 재위 6(505)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파견한 다음, 7년후인 재위 13(512)에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울릉도) 정벌에 나서게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배에 나무사자를 싣고 우산국을 복속시켰다고 하는데, 이런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 병력을 양성하려면 동해안 지역에 수군 주둔지를 형성해야 한다.

동해안에는 삼척만큼 자연적으로 항구를 형성하는 지역이 없다. 강릉(하슬라)에는 해안선이 단조로와 배를 정박시킬 마땅한 항구 자리가 없고, 조선시대에도 강릉에 그런 기록이 전무하다. 이에 비해 삼척포는 오십천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천혜의 항구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항구조건을 갖춘 오십천 하구에 산성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볼수 있다.

오화리산성에 대한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지표조사에서 신라시대 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출항지가 삼척이었고, 수군 거점이 오화리산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본다면 오화리산성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성(古城)이다. 삼척은 함경도와 경상도의 동해안 중간지점에 있고, 울릉도를 정동(正東)으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고대 이래 오화리산성의 군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활용해 왔을 것이다.

 

강원문화재연구소
강원문화재연구소

 

< 내성 >

오화리산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외성은 삼태기 모양으로 동벽, 남벽, 서벽, 북벽으로 구성되며, 내성은 고성산 정상부에 단을 두어 형성했다.

내성의 서벽은 대부분 흙으로 만든 토축이고, 높이는 2~3m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남쪽 일부는 높이 2m로 잘려 있다.

내성이 토성인지, 자연언덕인지는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원문화재연구소가 밝혔다.

내성의 동쪽은 외성의 동벽과 일치하고, 북쪽은 남동벽 해발 74m로 상대적으로 낮다.

내성의 서쪽 길이는 258m이며, 내성의 면적은 6,741이다. 현재 내성의 토사 상당부분이 흘러내려 완만한 경사가 되었다. 내성 안쪽은 건물이 들어설 정도로 아주 평탄하다. 내곽 중간 부분에는 1960년대 사방공사로 인해 일부 훼손되어 경계가 불분명한 부분도 있다.

 

강원문화재연구소
강원문화재연구소

 

< 성내 시설물 >

 

장군대(망대)

장군대는 전투시 사방을 확인하고, 부하들을 통솔할수 있도록 시야가 확보된 자리에 둔다. 대부분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오화리산성엔 모두 2개의 망대가 있다. 그중 장군대로 보이는 제1망대는 고성산에서 제일 높은(해발 100m) 동벽 가까이에 위치하고, 2망대는 건물지와 선박이 정박하는 서벽 가까이 높은 구릉 위에 위치한다.

고성산 정상에 위치한 장군대는 동쪽으로 동해바다와 북쪽으로 오십천, 남쪽의 한치재를 쉽게 확인할수 있는 지역에 만들어졌다. 장군대의 크기는 길이 12m, 7m, 높이 4m 크기로, 형태는 장방향으로 주변의 흙을 모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

2망대는 서벽 바로 위 1건물지와 2건물지 사이에 돌출한 구릉의 사면을 평탄하게 만든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건물지가 확인되고 선박이 접안하는 지역과 출입문을 확인할수 있는 위치로, 성내를 관장하는 망대로 보인다. 망대의 크기는 길이 18m, 15m의 타원형 형태다.

 

건물지

모두 3곳의 건물지가 확인된다. 건물지 3곳이 모두 서벽 바로 위 계곡 안쪽의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다. 1, 2 건물지에선 많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채집되고 있으나, 3 건물지에서는 유물이 보이지 않고 있다. 또 산 정상부에 약 2천평의 넓은 평탄면이 있는데 이 곳에 건물지가 있엇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잡목이 우거져 확인이 어렵다.

 

- 1 건물지

남문으로 들어오면 동쪽에 형성된 급경사지 사이에 건물지가 계단식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지에서 기와편이 채집되지만, 2 건물지보다는 수량이 적은 편이다.

 

- 2 건물지

서벽 중앙 계곡 사이의 완만한 경사지에 반달 모양으로 생긴 지형에 위치해 있다. 세군데 건물지중 면적이 제일 크고 평탄하다. 이 건물지 위쪽에 우물지 하나가 있는데, 이 우물이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온 우물로 추정되며 그 수량이 현재 많지 않은 편이다.

 

이 건물지 바로 아래에 서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지에는 기와편, 토기편이 많이 채집된다. 또 건물지 곳곳에는 당시 건물 초석으로 보이는 70x40x20cm 크기의 할석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신라시대의 것이 대부분이고, 고려와 조선의 기와나 자기 조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유물들은 오화리산성, 그 앞서 요전산성이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이 건물지는 오화리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측에는 제2 망대가 위치하고, 그 아래에 배를 대는 항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 3 건물지

서벽의 동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출토유물이 보이지 않으며 군사들이 머무는 진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3건물지로 추정되는 곳 /김현민
제3건물지로 추정되는 곳 /김현민

 

우물

오화리산성의 우물을 기록한 문헌은 많다.

현재 성내 제2 건물지의 평탄지 동쪽 끝에 유물지 한 곳이 있다. 이 우물지가 문헌에 기록된 우물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에 건물지 초석과 토기와 기와 조각 등이 나온다. 3 건물지 서벽 바로 아래에도 또다른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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