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에 자연재해 집중…흉년과 기근도 빈발
신라 말기에 자연재해 집중…흉년과 기근도 빈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2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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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억·황상일 교수, 가뭄이 신라시대 흉년과 기근 일으킨 주원인 분석

 

신라는 BC 57년에서 AD935년까지 992년간 우리 역사의 고대를 장식한 천년왕국이었다. 신라에 대한 기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가뭄과 홍수, 역질, 메뚜기떼 내습, 지진등 기상재해와 관련한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경주 출신인 김부식이 1145년에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정치적인 얘기는 약간의 가감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상재해에 관해서는 대체로 정확하게 기록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윤순옥(경희대황상일(경북대) 교수가 신라 천년의 자연재해 기록을 유형별로 분석해 각각 인간생활에 미친 영향을 파악했다. 2009년에 대한지리학회지에 실린 두 교수의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의 논문을 요약한다.

윤순옥·황상일 교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기록들을 샅샅히 뒤져 신라 992년을 20개로 등분해 50년 단위로 세분화했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가뭄

신라 시대에 가뭄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8시기(286~335), 18시기(786~835), 20시기(886~935)로 각각 6, 9, 5회 발생했다. 특히 신라 멸망기에 가뭄이 빈발함으로써 민란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고려)가 등장해 천년 사직을 내려놓는 배경이 된다.

기상학에서 가뭄은 무강수 계속일수가 20일 이상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방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데, 기록된 가뭄은 보다 심각한 경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가뭄 기록은 총 59번 기록된다. 특히 말기에 가뭄 기록이 많다. 18시기에는 9회의 가뭄이 발생해 5~6년마다 대규모 가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빈번한 가뭄은 피해도 엄청나게 컸을 것으로 유추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뭄 발생시기는 주로 봄과 여름이다. 이 시기는 사람들이 작물을 파종하고 작물이 성장하는 때이므로 수분 공급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작물 수확량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뭄과 연관되어 기근이 생기는 기록도 약 20회 나온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흉년

흉년의 빈도는 대체로 가뭄 빈도와 일치한다. 흉년이 가장 높은 빈도로 발생한 시기는 18시기(786~835)였다. 이 시기에 흉년 기록은 모두 11번인데 ,4~5년 단위로 한 차례씩 나온다. 전체 흉년 기록의 30%가 이 시기에 집중된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역질

주로 15~19시기(636~885)에 집중된다. 홍수나 가뭄등으로 인해 식수가 오염될 경우에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역질은 가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714, 795, 832년은 가뭄과 동시에 역질과 유행병이 발생했다. 가뭄으로 지하수 유량이 줄어들면서 수질이 약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화장실에 대한 유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신라시대엔 지표면에서 깊게 판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역질은 대부분 수인성 전염병이었으므로, 화장실은 수시로 비울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메뚜기떼

전체로 18차례의 메뚜기 기록이 나온다.

메뚜기 떼의 출현은 홍수가 일어난 때보다 가뭄이 있었던 시기에 발생한 경우가 더 많다. 18313, 479, 769, 788, 921년의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기는 기근과 함께 발생했다. 797년과 853년엔 홍수와 메뚜기 떼가 함께 발생했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홍수

전체 31회의 기록이 나오며, 4, 5, 7월에 발생했다. 신라 후기에 빈도가 높다.

고대 홍수는 가뭄에 비해 농업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것으로 윤·황 교수는 보았다. 그 이유는 낙동강 중류부와 하류부 범람원이 애초에 경지로 이용되지 않은데다 고대에는 하천 주변에 인공제방을 축조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홍수 위험이 큰 범람원에 경작지를 만들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신라 시대에는 홍수의 위험이 거의 없는 자연제방이나 구릉지 사면 등 보다 안전한 장소에 취락과 경작지를 확보했을 것이라고 두 교수는 보았다.

특히 신라본기의 홍수 기록은 왕경을 흐르는 형산강과 북천, 남천의 기록으로 보았다.

홍수로 인해 기근이 생긴 경우는 108년과 814년이다. 또 홍수로 인해 역질이 유발된 경우는 483, 867, 870년등으로 추정된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지진

지진은 농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땅이 갈라져 물이 솟아나고 산이 무너지는 현상은 과학적 지식이 결여된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일대는 양산단층성과 울산 단층선이 통과하므로, 고대에도 55회의 지진이 기록되었다. 16시기~18시기(686~835) 150년 동안 27회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자료: 윤순옥·황상일 교수 논문 캡쳐

 

<결론>

윤순옥·황상일 교수는 신라 천년의 자연재해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1. 가뭄은 기상재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고, 관계 시설이 완비되지 못하고 강우에 의존하던 고대에 광범위한 피해를 주었다. 가뭄이 있었던 해엔 기근이 있었거나, 다음해에 기근이나 흉년이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가뭄은 고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기상재해였다.

2. 홍수 피해는 현재처럼 크지 않았고, 기근과 관련성이 미미했다. 이는 고대인들이 홍수의 위험이 있는 범람원을 정착지로 이용하지 않았으며, 형산강 유역의 특성상 홍수가 발생하더라도 범람원이 물에 잠기는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작물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것으로 파악된다.

3. 메뚜기 떼의 출현은 홍수가 일어난 때보다 가뭄이 있었던 시기에 더 많으며, 가뭄과 함께 곡물생산의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4. 기근과 역질은 상관관계가 다소 미약하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역질과 유행병은 대부분 가뭄이나 홍수와 무관하게 발생했다. 역질은 수인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통일이후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발생빈도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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