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5·8조치①…“재벌 때문에 나라 망하겠소”
6공 5·8조치①…“재벌 때문에 나라 망하겠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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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수석이 총대 메고 재벌에 토지매각 종용…전경련, 마지못해 수용

 

재벌(Chaebol)이란 단어는 영어사전에도 오를 정도로 경제개발과 함께 자라난 우리 대기업의 지배구조다. 재벌 개혁은 역대 어느 역대 정권에서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주요 정책과제로 제시되었다. 1960년대초 경제개발을 시작한지 벌써 60갑자의 끝자락에 이르는 시점에도 재벌개혁은 화두로 진행되고 있다. 그 재벌 개혁은 30년전에도 주요한 화두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공과에 대해선 이미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는 것은 30년전 그가 집권시 재벌과의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경제개발 30년 되는 시점에 재벌의 힘은 막강해져 정부가 컨트롤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때 재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재벌 개혁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19882~19932)6공화국이라고 불렀다. 5공화국인 전두환 정권에 이어진 정권이라는 뜻이다.

19875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6·29 선언을 단행한다. 이어 실시된 국민 직접선거에서 노태우는 김영삼,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6·29 선언 후 출발한 6공화국 기간은 군사정부와 문민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고 할수 있다.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6공화국 5년 동안, 경제는 호황에서 불황으로, 정경 화합에서 정경 갈등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정부와 기업인은 경제 불황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게 됐고, 이는 결국 재벌의 정치참여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5·8 부동산 특별조치를 시작으로 해서 재벌에 대한 정부의 강경조치가 가해지고, 재벌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정부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는 가운데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제14대 총선과 대선에서 집권당에 도전했고, 다른 케이스지만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집권당내 비주류 수장으로 나서 두 거물 경제인은 다음 정권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고 미래는 과거의 거울이다. 역사는 순환 반복하며 발전하는 법. 따라서 과거의 기록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반성할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 점에서 6공화국 시절의 정치, 경제적 갈등과 대립 과정을 찬찬히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1990327일 저녁 청와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등 5대 재벌 총수와 유창순 전경련 회장이 들어왔다. 저녁식사를 겸한 이날 만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경고성 당부를 했다.

재벌들이 국민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재벌들도 국가 경영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부동산 투기로 이익을 추구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업 본연의 임무에 전념해 주십시오. 당신네들이 부동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이승윤 부총리, 김종인 경제수석의 경제팀이 들어선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노 대통령으로선 당부의 형식을 취했지만 지시요, 경고의 의미를 함축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재벌 총수들은 완곡한 표현 속에 감추어진 노 대통령의 의중을 흘려듣고 말았다.

이로부터 43일 뒤인 510. 盧心(노태우 대통령의 의중)의 실체가 무엇인지, 재벌총수들은 분명히 깨달아 국민 앞에 경제난국의 십자가를 짊어 지겠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5·8 부동산 억제 특별대책에 대한 항복선언이었다.

그날 오전 11.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청와대 오찬으로 불참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을 제외하고 개최된 이날의 경제난국 타개 결의대회10대그룹 총수의 모임으로는 사상 처음이었다. 10분만에 끝난 이날 대회에서 이건희 회장이 봉투를 열고 결의문을 읽었다.

부동산 투자억제를 위해 첫째, ‘불요불급한부동산은 6개월 이내에 자진매각한다. 둘째, 6개월 이내에 공매하지 않은 부동산은 즉각 토지개발공사에 매각한다. 셋째, 비업무용 부동산은 일절 취득하지 않는다.

이날 공동결의문은 재계로선 청와대에 대한 항복문서였고, 결의대회는 청와대와 전경련이 이미 합의한 각본에 따라 실행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부동산 투기를 투자, 과다보유 비업무용 부동산을 불요불급한 부동산으로 완곡히 표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우리는 이를 5·8조치라고 부른다. 6공화국(노태우 정부) 5년동안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정치적으로 분수령이 됐다면, 경제에서는 단연 이 조치가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 시기적으로도 1990122일의 3당 합당에서 5·8조치까지 3개월여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여소야대를 극복한 정치권력과 재계의 역학관계에서도 균형이 깨진 것이다.

5·8조치는 또 3저 현상에 호황을 구가하던 6공화국 초기의 경제가 극심한 노사분규와 이에 따른 임금상승, 무역수지 악화, 부동산가격 및 물가앙등, 증시폭락등의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면서 좌초하기 시작할 때 돌출됐다. 재계는 물정부운운, 정부의 무능을 탓했고, 정부는 경제 침체를 탐욕스러운 재벌의 탓으로 돌릴 때였다.

그러나 5·8 조치는 일시적으로 재벌의 고개 숙임을 강요했지만, 태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했다. 정권말기의 권력누수를 틈타 재벌들은 5·8조치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마침내 1년뒤 정주영씨는 재계 대통령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당을 창당,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고 만다.

 

그러면 6공화국 후반의 정·재계 갈등의 서막을 이룬 5·8조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살펴보자.

1989년말 문희갑 경제수석 때의 일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30대 그룹 총수를 5명씩 나누어 청와대에 불러 당부했다. “부동산 투기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자제해 주십시오. 정부를 쳐다보면서 특혜지원만을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기업이 경제 회생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지만, 재벌들은 이 자리를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기회로 여겼다. ‘자금이 부족하다’, ‘금리를 내려 달라’, ‘노사분규를 해결해 달라.

물론 재계로서는 정부가 민주화니, 중소기업 위주 정책이니 하면서 과거 정부에서 해온 금융지원을 없애고 대출금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하는 통에 기업을 할수 없고, 노사분규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으로 임금가 물가만 올려놓았다는 불평을 했다.

노 대통령은 이같은 재벌의 불만에 대해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이라며, 비서진들에게 강력한 대응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5·8 조치였다. 이 때문에 6공화국은 내내 재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이같은 의중은 김종인 수석이 재빨리 간파했다. 1990327일의 청와대 만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부동산투기에 대한 두 번째 경고를 했어도 재벌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김종인 수석이 직접 총대를 메고 나섰다.

김 수석은 노 대통령에게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에 대해 뭔가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노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를 해결치 않고는 아무 것도 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여서 쾌히 승낙했다.

김종인 수석은 즉각 30대 재벌의 부동산 자진매각 계획을 수립했다. 국세청에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가려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열흘 이상의 작업을 거쳐 413일 이른바 ‘4·13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을 발표했다. 탈법적 투기에 대한 강력한 단속 등기 의무화 토지거래허가제 확대실시 과표현실화가 그 골자였다. 그러나 이 조치만으로 고질화되고 있던 재벌의 땅 투기를 막을 수 없었다. 사후처방으로는 여론의 반발에 봉착했다.

430일 김종인 수석은 서울 플라자호텔에 10대그룹 기조실장을 불러 대통령의 노여움을 전달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재벌들의 무성의를 좌시하지 않겠다며 토지매각을 종용했다. 53일 박필수 상공장관이 10대 그룹 기조실장을 불러 또다시 엄포를 놓았다.

10대 그룹 기조실장들은 경제침체를 재벌의 탓으로 돌리는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으나, 정부의 강경 분위기가 단순한 경계경보를 넘어 실제 상황임을 감 잡았다.

양측의 협상창구가 만들어졌다. 청와대에선 박운서 비서관이, 재계에서는 전경련의 조규하 전무가 각각 대표로 나섰다. 이환균 재정담당 비서관이 박운서 비서관을 엄호했다.

박운서 비서관은 재벌들이 알아서 보유부동산을 매각해달라면서 자진 매각을 강조했으나, 재벌그룹들은 얼마나 땅을 내놓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해외출장중이던 삼성의 이건희, 선경의 최종현 회장도 급거 귀국해 매각할 땅을 논의하는 등 그룹 총수들과 기조실은 밤샘 작업을 벌였다. 재벌로선 비상시국이었다. 설마 대기업에 이런 특단의 조치까지 내릴 수 있겠는가 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5·8 조치 직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는 청와대 실무팀과 전경련측이 만나 3일 동안 밤을 새며 승강이를 벌였다. 재계를 대표한 전경련은 1990년에 신규매입한 340만평 중 절반인 150만평을 팔겠다고 했으나, 청와대측은 이것만으로 안 된다고 버텼다. 최종적으로 낙착된 것은 10대 그룹이 모두 1,570만평을 내놓되, 510일 그룹총수들이 공동으로 결의대회를 열어 자진매각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

 

노태우 대통령은 57일 정치·경제 양측면에서 일대 결단을 내린다. 김영삼·김종필 최고위원, 박태준 최고위원대행과 4자 회당을 갖고 분열된 당의 기강을 바로 잡고 당내 분파행동을 일절 용납하지 않겠다는데 의견일치를 봤다. 경제 면에서는 대국민 담화를 내고 부동산 투기는 통치권 차원에서 근절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인 58일 이승윤 부총리를 비롯해 경제각료들은 부동산투기억제와 물가안정을 위한 특별보완대책을 발표했다. 5·8 조치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517일엔 11~49대 그룹 기조실장이 워커힐에서 만나 1,500여만평을 매각키로 함으로써 후속조치가 매듭지어졌다.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의 평가다. “5·8 조치는 초법적인 조치가 아닙니다. 기존 법률에 따른 조치일 뿐입니다. 재벌에도 예외 없이 법 집행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단순히 땅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경제라는 하부구조가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흔들게 하는 사건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5·8 조치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하여금 정치를 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인이 됐다. 정주영씨도 이에 대해 부인치 않고 있다.

정주영씨는 그 무렵 이렇게 회고했다. “노 대통령 밑에서 경제정책을 하고 있는 사람(김종인 수석을 지칭)이 아주 잘못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을 무슨 부동산 투기만 하는 원흉으로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조사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투기를 했다고 해 체면을 손상시켰습니다.”

물론 5·8 조치는 현대그룹만을 타깃으로 한 것도, 정주영씨가 5·8 조치에만 불만을 품고 정치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6공화국 후반에 정계와 재계의 갈등, 재벌 상호간 갈등은 5·8 조치에서 비롯됐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재벌의 정치 참여는 이 조치로 그 서막이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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