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5·8조치③…난무하는 재벌 해체설
6공 5·8조치③…난무하는 재벌 해체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03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유와 경영 분리, 재벌 해체, 본때 보이기설 등 …재계, 자구 모색

 

5·8 조치가 발표된지 한 달이 지난 19906월의 어느날. 청와대에 투서 한 장이 날아왔다. 럭키금성그룹의 구본무 부회장이 헬기를 타고 제주도 상공을 돌며 매입할 땅을 둘러보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투서의 내용은 뒤에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엔 해명이고 뭐고 통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해당 그룹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여러 차례 재벌 총수들을 불러 부동산 투기를 자제할 것을 당부한 터였다. 게다가 10대 재벌 총수들이 정부의 5·8 조치에 적극 호응, 1,500여만 평의 땅을 자진해서 매각하겠다고 국민 앞에서 선언해 놓고도 제대로 팔지 않아 노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할 때였다.

이 투서는 대통령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고, 노재봉 비서실장등 강경론자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감지해 반재벌정책을 강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당시 청와대의 분위기에 대해 어느 비서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5·8 조치 후에도 여전히 땅을 사러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노 대통령은 무척 진노했습니다. 특히 럭키금성그룹을 지목해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땅이나 보러 다니느냐고 질책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5·8 조치 전후 청와대엔 재벌 그룹의 부동산 투기에 관한 투서가 비일비재했다.

“K재벌이 복덕방에 봉급을 주며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있다.”

“S그룹이 회사 내에 부동산 전담팀을 만들어 전국에서 좋은 땅을 마구 사들이고 있다.”

청와대의 재벌에 대한 반감은 노골적이었다. ‘재벌의 부동산투기를 잡지 않으면 정권유지가 어렵다는 체제수호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5·8 조치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권 수호의 차원에서 강조됐다.

노재봉 실장을 비롯해 김영일·최창윤·손주환·안교덕씨 등 정치팀이 강경드라이브를 주도했고, 김종인·박운서·이환균씨등 경제비서팀이 총대를 멨다.

 

1990619일 이환균 비서관이 불러 청와대를 방문한 이현태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장은 정부의 반재벌정책을 강력히 성토했다. “이런데가 어디 있습니까. 정부가 비업무용 토지를 팔라 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10대 그룹 기조실장을 일일이 만났지만, 이현태 실장만은 정부에, 그것도 청와대에 반발했다. 이환균 비서관은 엄중히 경고했다. “현대가 혼자서 재벌이 됐습니까. 저임금 근로자의 땀과 정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조사를 해보니 현대는 자진 매각하겠다고 내놓은 땅보다 비업무용 토지가 많습니다. 정히 땅을 팔지 않겠다면 법대로합시다. 우리도 현대에 협조하지 않겠으며 내 방에 다시는 들어오지 마시오.”

청와대로선 현대를 어떻게 제압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을 했으며, 국세청을 통해 이현태 실장의 재산을 조사, 파일을 만들어 겁을 주기도 했다.

1990년은 재벌에겐 수난의 시기였다. 국세청 세무조사가 들어오고 땅을 안 판다고 청와대에서 직접 호통을 치고·.

이런 와중에 재계엔 정부가 재벌 해체등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당시 나돈 재벌해체론의 내용과 배경을 살펴보자.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에 재계의 협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1~2개 재벌에 시범 케이스로 메스가 가해질 것이다.’

고위층의 눈 밖에 난 모그룹에 대해 5공화국 때의 국제그룹 해체에 버금가는 조치가 취해질 예정이다.’

정부가 이번 기회에 전후 일본에서 맥아더식 재벌 해체를 검토했다.’

계열사를 그대로 둔 채 오너의 친인척을 경영 일선에서 퇴진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당시 이같은 특단의 조치설은 권력핵심의 공식 발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됐다.

부동산투기 억제대책을 통치권적 차원에서 실천토록 할 것입니다.” (57일 노태우 대통령 시국담화문)

부동산 투기는 우리 사회 최대의 암적요소다. 기업인들도 체제 유지에 나름대로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정상적인 경제 원리로 안될 경우 정치적으로라도 해결해야 한다.” (55일 김종인 수석)

대통령이 5대 그룹 사주에게 당부한 후에도 재벌그룹이 토지를 매입, 각하께서 크게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지를 매각하지 않을 경우 기업의 공개전 유상증자를 통해 시세차익과 사전상속, 주식의 위장분산에 대해 특별조사를 실시하겠습니다.” (520일 서영택 국세청장)

특히 서 청장은 기업의 가족경영 형태를 탈피할 것을 강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한 인위적 조치까지도 검토할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같은 발언의 면면 뿐만 아니라 실제 청와대는 재벌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요구했다.

5·8 조치 직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청와대측과 전경련 대표가 만나 자진 매각 규모를 협의할때의 일이다. 전경련측은 150만평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청와대측은 재계가 뭔가를 보여야 한다며 대폭적인 양보를 요구했다. 전경련과 10대 그룹이 끝내 거부하자 청와대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고 나왔다.

청와대는 510일 재계 총수 대국민발표에서 소유주는 최고경영자인 대표이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만 갖고 기업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을 밝히라고 밀어붙였다. 재계대표들은 청와대의 분위기가 워낙 강경해 처음보다 10배나 많은 1,500만평을 팔겠다고 제시하면서 소유·경영 분리론을 거두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낙착된 내용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는데 노력한다는 문안이었고, 이는 510일 발표됐다.

 

5··8 조치 전후에 난무한 재벌해체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만은 아니었다. 충분한 배경이 있었지만 엄포용이었지 구체화된 내용은 아니었다. 당시 실무팀의 설명을 들어보자.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은 이렇게 말했다.

인위적으로 재벌에 하드타임(시련기)을 줄 능력을 정부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부가 제시하는 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재벌의 불만이 있었지요. 이 불만이 정부의 재벌에 대한 시책을 해체론으로 과장한 요인입니다.”

이환균 비서관의 설명.

당시엔 일벌백계의 분위기였습니다. 삼성전기에 대출을 해줘 부동산 매입자금을 돌려쓰도록 한 이병선 한을은행장의 해임조치도 이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재벌들도 누구 하나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하게 됐고, 이 것이 재벌해체론으로 각색된 것입니다.”

이같은 재벌해체론은 1991년 신산업정책 발표 시에도 한때 풍미했고, 급기야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씨는 19925부의 집중을 막기 위해서는 재벌을 해체해야 하며, 재벌 중심의 여신관리는 잘못이다며 재벌해체 불가피론을 폈다.

당시 재벌해체설은 비록 엄포용이었고, 위기 의식을 느낀 재벌들이 흘렸다고는 하지만, 재벌그룹들은 해체에 버금가는 조치가 언젠가는 구체화될 것으로 인식하고 자구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6공화국 말엽 삼성그룹은 신세계백화점, 신라호텔, 전주제지를 오너와 형제, 자매에게 떼주어 독립시켰고, 선경그룹은 선경마그네틱을, 한국화약은 한양유통을 떼내 독립경영시킨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였다. 재벌그룹의 이같은 위기의식은 정권이 바뀌어 김영삼 정부 출범 후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1990년 당시 재벌에 대한 정부의 강경정책, 재벌의 위기의식은 오래갈수 없는 여건이었다. 5·8 조치가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 정치권력과 재계 간 힘의 불균형에서 나온 조치인만큼 정치권력이 쇠약해질 때 그 반격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재벌로서는 태풍의 내습에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이었고, “어차피 단임 정부가 아니냐, 선거가 곧 다가온다, 그때 가서 보자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획일적으로 그은 비업무용과 업무용 토지의 경계는 집행과정에서 무리를 동반했고, 제발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박운서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설명이다.

“5·8 조치는 당초부터 비합리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롯데그룹의 롯데월드 부지는 비업무용 부지로 볼수 없습니다. 정부가 사업승인까지 해놓고 있던 만큼 물의가 뒤따랐지요. 현대중공업의 공업용수 개발을 위해 축조한 저수지 부지는 물론 기업이 공장을 세워놓고 개설한 도로마저 비업무용으로 판정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991년이 밝아오면서 권력 누수기의 현상으로 5·8 조치에 대한 정면 도전 현상이 나타났다. 삼성그룹은 전주제지의 조림지에 대한 독림가 인정서를, 한진의 제동목장은 표창을 받은 땅이라고 목청을 돋우었다. 현대, 롯데, 금호그룹은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와 재계의 대결은 제3의 권력기관은 사법부로 옮겨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