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재벌개혁①…대통령의 의지
6공 재벌개혁①…대통령의 의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0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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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 땅투기에 적개심…제2이동통신 사업자 결정 과정에서 좌절

 

 

1989년말 노태우 대통령은 문희갑 경제수석을 따돌리고 김종인 보사부 장관을 자주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구했다. 부동산 투기는 극성을 부리는데, 무역수지는 적자로 반전되고, 경기가 바닥으로 치닫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당선 전부터 경제 파트너로 일하길고 돼 있던 김종인 장관은 평소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현 경제팀이 잘된다, 잘된다고 하다가 갑자기 위기론을 펼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성 없는 금융실명제를 유보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훨씬 큰 서독에서도 실명제는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실명제를 실사한다고 하니 돈이 빠져 나가 오히려 부동산 투기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경제 악순환의 근본 원인은 부동산 투기인데 재벌들이 투기만 일삼고 있습니다.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준비를 해 두시오하며 뭔가 언질을 주었다.

이 무렵 전경련을 중심으로 재계는 금융실명제에 대한 반대 작업에 들어갔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주도로 실명제 실시에 따른 문제점, 보완대책등에 관한 연구가 진행됐다. 최 회장은 사돈인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실명제를 실시하면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준다며 실시 보류를 설득했다.

노 대통령은 해를 넘겨 1990년대초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90년 정초는 노 대통령에게 정치·경제 양측면에서 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13일 신년사를 겸해 특별담화를 발표, 집권 2년여 동안 애태워온 5공 청산 문제를 일단 마무리했고, 박철언 정무장관을 통해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통합작업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110일 연두회견과 116일 경제기획원 신년업무 보고를 통해 실명제 단계적 실시와 신중한 추진을 강조했다. 문희갑 수석은 실명제 준비단을 다그쳐 실명제 추진작업에 박차를 가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1223당 합당으로 당내 실명제 반대 의견이 가시화됐고, 그해 3월 조순 부총리, 문희갑 수석의 경제팀이 물러 가고 이승윤 부총리, 김종인 수석의 팀이 등장, 실명제는 실명(失明)하고 만다. 외견상으로는 노 대통령의 재계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정부의 정책이 재벌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대한뉴스 캡쳐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대한뉴스 캡쳐

 

그러나 1989년말에서 90년 초의 정국 대전환 시기에 노 대통령은 재벌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다른 한편에선 재벌의 부동산 투기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1989년말부터 노 대통령은 재벌의 부동산 투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이라면서 경제 비서실에서 대응책 강구를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또 30대 재벌 총수를 몇차례에 걸쳐 청와대로 불러 문어발식 기업확장, 부동산 투기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재벌들은 당시 노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 가늠치 못했으나, 다음에 4·4 조치, 5·8 조치와 재벌의 업종 전문화 정책으로 이어져 6공화국 후반의 대재벌정책은 규제 일변도로 강화된다.

한 경제 비서관의 말이다.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재벌이 부동산이나, 재테크에 자금을 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특히 재벌들이 자기 분야에서 업종전문화, 기술개발에 노력하지 않고 골프장을 만들고 금융산업에 뛰어들어 돈벌이하는데 부정적이었습니다.”

5·8 조치는 이같은 노 대통령의 재벌관이 표현돼 집행된 정책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 조치에 이어 재벌의 업종전문화, 세무조사 강화등을 밀어붙였으며,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재벌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6공화국 초기 2년간 노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재벌에 대해 뚜렷한 대책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6공화국 초기의 경제환경은 전두환 정권의 5공 초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회의 각 이해집단이 민주화, 탈권위주의를 주장하며 욕구를 분출시켰다. 근로자들의 노조 결성 및 파업, 농민들의 추곡가 인상시위, 학원가의 데모등이 격류처럼 밀려들었고, 게다가 여소야대의 국회였다. 여야가 경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기보다는 이들 욕구에 뒷바라지하기에 바빴고, 경제가 정치 논리에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6공화국 초기 노 대통령의 재벌관과 정책을 당시 경제수석으로부터 들어본다.

노 대통령은 재벌과 정치권과의 비정상적 관계, 즉 정경 유착에 대해 뭔가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치 자금을 달라고 재벌에 손을 벌리지 않도록 기존 정책을 절반쯤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토지공개념과 실명제는 이런 관점에서 추진됐습니다.” (박승 경제수석)

법을 만드는 국회마저 재벌에 크게 흔들렸습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경제개혁이 필수적이었지요. 토지공개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입법화되자, 실명제 실시도 가시화될 것을 우려, 기득권층이 들고 일어나 결국 무산됐습니다.” (문희갑 경제수석)

 

노 대통령은 실명제를 포기하지만 재벌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는 강한 의지로 밀어붙였다. 3저 현상 덕분에 호황을 구가하던 6공화국 초기 경제가 1989년말부터 불황의 늪에 빠져 재테크나 일삼는 재벌에 무언가 통치권 차원의 힘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여소야대의 정국도 타개해 정국 주도권을 쥔 시기였다. 5·8 조치는 이같은 맥락에서 나왔지만 노 대통령은 재벌을 마냥 다그쳐 혼쭐만 낼 생각은 아니었다. 세계에 내놓을수 있는 번듯한 기업으로 키우고 싶은 욕심도 최고통치권자의 마음이었다.

5·8 조치와 병행해 추진된 재벌의 업종전문화 정책은 대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으나, 정재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또다른 변수가 되었다. 재벌의 신규업종 진출을 막을수 없어 청와대가 직접 나서야 했으며, 신고사항인 분야에서도 해당관청이 접수를 거부하는 파행 행정이 이뤄졌다. 현대의 카프롤락탐, 삼성의 자동차, 대우의 디지털피아노 사업 진출 좌절이 그것이었다. 이들 분야는 1987년부터 자율화시켰던 업종인데 정부가 정책을 변경하니 재벌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주력업체 선정시 현대엔 주력업종이 아닌 게 없다고 반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와대의 재벌 정책은 현대그룹의 정씨 일가에 대한 세무조사를 계기로 보다 강화된다. 당시 세무조사 대상은 현대·한진등 여럿이었으나 주공격목표는 현대였다.

노 대통령은 이진설 경제수석을 불러 당장 현대 계열사를 한두개 부도처리해 본때를 보이라고 지시해 정부와 재벌의 싸움은 정책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전환하게 된다.

집권 5년간 노 대통령은 재벌에 대한 정책 강도를 높여 나갔지만 말기에 결정적 흠을 내게 된다. 노 대통령 스스로가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실명제를 유보하면서 최 회장의 견해에 공감했을 때만 해도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퇴임 6개월을 앞두고 발표된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때는 사태가 달랐다. 정부 당국자들은 선경의 선정 사유에 대해 공정성·형평성을 주장했지만, “노 대통령의 재임 기간중 사돈 기업에 특혜를 주었다는 여론을 막을수 없었다. 야당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 공세를 폈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도 선정 유보를 들고 나왔다. 결국 선경은 대선 투쟁의 와중에서 이동통신을 자진 반납할 수밖에 없었고, 노 대통령에게도 큰 타격이 가해졌다.

정치권과 재벌. 5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유착관계로 비난 받던 이들 두 거대 이익집단은 6공화국 후분기 들어와 갈등관계로 돌아선다. 갈수록 증폭된 이 갈등관계는 노 대통령의 재벌관과 처ᅟᅧᆼ와대 비서진들의 가치관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재벌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어느덧 정치권력의 경계 영역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6공화국 후반 정치와 재벌의 갈등은 한 세대를 거친 경제개발의 필연적 과정으로 볼수 있지만 노 대통령은 끝내 결자해지의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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