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 신성로마제국 해체…합스부르크가 쇠퇴
1천년 신성로마제국 해체…합스부르크가 쇠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08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폴레옹에 패전한 이후 프란츠 2세, 황제직 포기…오스트리아제국 변신

 

180686,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Franz II)는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 직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1천년 가까이 중부유럽을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처럼 신성로마제국의 소멸도 큰 충격을 주지 않았다. 제국의 해체 소식을 듣고 독일의 괴테는 내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 더 관심이 없다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는 역사의 줄기를 바꾸었다. 제국이 해체된 이후 독일이란 지명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진정한 의미의 독일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제국이 소멸된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쇠퇴하고,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의 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은 중세 초기에 형성되어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유럽 중앙을 포괄하는 대제국이었다. 한때 독일, 체코, 헝가리, 북부이탈리아, 동부 프랑스를 포괄하는 이 정치복합체는 교황과 싸우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며 중세 역사를 이끌어왔다. 그러던 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늙은 코끼리마냥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 /위키피디아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 /위키피디아

 

신성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을 계승하는 의미로, 교황에 의해 제위가 수여되었다. 이 제국은 초기엔 다민족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영토가 쪼그라들어 독일어를 쓰는 민족의 영역으로 좁혀져, 독일 역사의 과거 부분이라 할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우선 8001225,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샤를마뉴)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서로마 제위의 부활을 선언한 시점을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다. 다른 견해는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하고 제위를 부활하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후자를 지지한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은 962년부터 1906년까지 844년간 지속되었던 제국으로 규정된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명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제국(Holy Empire)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1512년 쾰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제국의 공식 국명을 독일 국민의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반포했다.

1254년부터 1273년까지 선제후들 사이에 패가 갈리면서 황제를 없는 대공위시대를 겪기도 했다. 그후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황제 선출권을 갖는 선제후들이 특권을 갖게 되면서 제국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말기에 들어가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황제 자리를 독주했다.

서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이 중앙집권적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독일 지역이 중심이 된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의 왕국, 공국, 후국, 백국, 자유시 등의 영방국가들로 이루어진 분권화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독일 영주들은 영토 주권자로 규정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적대하지 않는한 외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도 인정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수십개의 작은 주권국으로 분리되어 왕국과 공국들 사이에 대립해왔다. 황제의 권력은 제한적이었고, 여러 영주와 자유시 시장들이 시장들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는 사실상의 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볼테르는 말기 신성로마제국을 두고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전성기(972~1032)의 신성로마제국 영역 /위키피디아
전성기(972~1032)의 신성로마제국 영역 /위키피디아

 

아무리 이름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지만, 독일인들은 이 제국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 제국의 황제는 독일의 맹주는 물론 유럽의 황제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프란츠 2세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신성로마제국 맹주로서 프랑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오히려 라인강 서안을 프랑스에 빼앗기게 되었다.

180412월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프란츠 2세도 영주 직함을 대공(Archduke)에서 황제로 스스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제 서유럽에 두명의 황제가 존재했다. 유럽에서 황제는 고대 로마제국의 법통과 카톨릭의 신앙적 지지를 명분으로 한다. 두 명의 황제중 한명은 쓰러져야 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 이외의 또다른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해체에 나섰다. 그는 라인강 서쪽의 독일 영주와 자치도시들을 회유했다. 프랑스 영향권에 들어간 영주들은 합스부르크가 프란츠 2세에게 등을 돌리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점령지역 영주들을 대거 선제후로 임명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뺏으려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차르와 손잡고 나폴레옹에 대항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회전 /위키피디아
1805년 아우스터리츠 회전 /위키피디아

 

1805122일에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2,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Aleksandr I),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직접 전투에 참가해 삼제회전(Battle of the Three Emperors)라 부른다. 지금의 체코 슬라브코프우브르나(Slavkov u Brna)에서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의 포병은 맹활약을 했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은 완패했다.

아우스터리츠 회전은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라인강 서쪽 땅의 영토를 확고히 했고, 합스부르크로부터 바바리아, 버텀베르크, 바덴을 빼앗아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독일 동맹에게 가입시켰다. 프랑스군은 남부 독일에 주둔하며, 여차하면 오스트리아를 침공할 태세를 보였다.

18066,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3개월 안에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해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연방이 나폴레옹을 보호자로 하는 라인동맹을 결성하고, 81일을 기해 제국을 탈퇴해 버렸다.

마침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는 8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와 제국에서의 모든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기나긴 세월동안 중부 유럽 역사를 뒤흔들었던 신성로마제국은 멸망을 고했다.

 

1812년 오스트리아 제국 /위키피디아
1812년 오스트리아 제국 /위키피디아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프란츠 1(Franz I)로 오스트리아 황제 직위는 유지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 소멸과 함께 합스부르크 영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변신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후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해온 헝가리 왕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연합왕국 형태로 변경한다.

 

독일인들은 신성로마제국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카를 폼 슈타인은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열린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했다.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한지 60년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북독일연방을 결성하고, 1870년 프랑스를 공격해 이듬해 118일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독일인들은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프로이센 호엔쫄레른가에 의한 제국을 제2제국,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제3제국이라 일컫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