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뮨, 공산주의 혁명 싹을 틔우다
파리코뮨, 공산주의 혁명 싹을 틔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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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프로이센에 패전한 상황에 파리 좌파 봉기…폭력시위의 갈림길

 

1871318일부터 528일까지 프랑스 파리는 극도의 혼란한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수만명의 시위자들이 도심 거리거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포를 설치해 정부군과 대치했고, 그 안에는 혁명가들이 저항군을 지휘했다. 역사에서 파리코뮨(Paris Commune)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분류된다.

파리코뮨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미래 혁명정부의 원형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비해 당대 시인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살인 위원회이자, 폭도의 무리이며, 광기와 범죄의 정부라고 혹평했다.

파리코뮨은 후에 일어나는 러시아 혁명이 그렇듯 패전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외국 군대의 진입, 자국 정부의 무기력한 항복에 민중들이 분노하면서 투쟁에 나서고, 여기에 좌파 이념이 침투해 일어난 무장봉기였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지막 수단인 군대를 투입해 진압함으로써 코뮨은 70일간의 바리케이트 정권으로 그치고 만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상비군이 없고 경찰력도 없기 때문에 코뮨을 국가로 보기 어려우며, 공산주의 정부로 가는 과도적 성격이라고 규정했다. 엥겔스의 표현대로 파리코뮨은 봉기자들의 방어조직으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파리코뮨 이전의 프랑스는 산업혁명이 진행되어 파리, 리용, 마르세이유와 같은 대도시에서 노동자가 도시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다. 파리는 당시 200만 도시였는데 전시민의 60% 정도가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이트였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도시에는 근대적 공업이 발전하면서 각지에서 밀려온 임금근로자들이 도시 교외에 밀집해 살았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노동자 임금은 명목상으로 상승했지만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그들의 생활수준은 악화되고 있었다. 또 근대적 노동법 체계가 구현되지 않아 기업주들이 수시로 근로자를 해고함에 따라 수많은 실업자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 정치 중심지인 파리는 저항의 도시였다. 1869년 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유권자들은 나폴레옹 3세의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지만, 파리에서는 공화파가 우세했다.

파리는 혁명가들의 온상이었다. 급진적인 자코뱅파, 블랑키파, 프루동파, 무정부주의자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해 지하에서 사상운동을 펼쳤고, 국제사회주의 운동인 제1차 인터내셔널이 파급되어 있었다.

 

세당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와 대화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세당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와 대화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결정적인 상황이 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숙적 프로이센에 항복한 것이다.

백부의 후광을 업고 영웅으로 추앙받던 나폴레옹 3세는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는 백부가 독일을 지배하던 상황에 도취해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 나가자 이를 방해했다. 급기야 나폴레옹 3세는 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프링스인들은 아무도 프로이센에 패전할 것이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는 비참했다. 나폴레옹 3세는 197092일 세당 전투(Battle of Sedan)에서 프로이센군에 참패해 포로가 되어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에게 항복했다. 다음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황후와 섭정이 망명길을 떠나고 프랑스 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황제가 항복했지만 파리의 프랑스군은 수도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병력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때 파리시민들은 나폴레옹 3세 황제 폐위와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국민방위군을 결성해 결사항전에 나섰다. 이 때 국민방위군에 참여한 사람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군대는 메츠(Metz)에서 프랑스군 16만을 격파하고 파리를 향해 진군해왔다. 10월말 파리는 프로이센 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런 와중에 031일 루이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를 비롯한 좌파 지도자들은 군 지도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코뮨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며 무장한채 시위를 벌였다.

그해 프랑스의 겨울은 추웠다. 센강이 얼어붙었고, 식량이 떨어졌다. 굶주린 파리시민들은 동물원으로 쳐들어가 동물들을 먹어 치웠다. 그것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쥐까지 먹었다고 한다.

이 무렵, 보수진영의 국민의회파 지도자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는 유럽을 돌며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낸후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만나 협상을 벌였다. 티에르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제의했고, 프로이센도 이에 동의했다.

프로이센 군은 당당히 파리로 입성했고, 19711월 빌헬름 1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했다. 파리시민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졌다.

 

파리코뮨 당시의 바리케이트 /위키피디아
파리코뮨 당시의 바리케이트 /위키피디아

 

187128일 실시된 선거에서 왕당파가 60퍼센트가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데 비해 공화파는 20퍼센트를 겨우 넘기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 구성된 의회는 왕당파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파리는 달랐다. 파리는 급진적 사상가들의 온상지였고, 1789년 대혁명 이후 혁명의 근원지였다. 게다가 시민들은 굴욕적인 패배와 협상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성격의 국민방위군에는 상당수의 혁명가들이 침투해 있었다.

임시정부 수반아돌프 티에르에겐 국민방위군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프랑스 신정부는 318일 국민방위군 해체를 명령하고 그날로 국민방위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포를 접수하기 위해 정규군을 파견했다. 정규군이 몽마르트 언덕에 도착해 대포를 차지했지만 이내 시민들과 국민방위군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이 모여들자 정부군 여단장은 발포를 명령했지만 군인들이 돌아서 시민의 편에 서면서 진압은 실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의 주도권은 시위대로 넘어가고 코뮨이 시작된다. 좌파들은 즉각 코뮨을 설치하기로 하고, 326일 좌파들은 평의원 선거를 치렀다. 파리에서만 실시된 선거에서 92명의 평의원이 선출되어 코뮌 평의회를 구성했다. 평의원들은 대다수가 자코뱅과 공화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고,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328일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파리코뮌의 성립을 선언했다. 곧이어 파리 코뮌은 내각 격인 10개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비공식 자치 정부로 활동을 시작한다.

 

코뮨은 여러 개혁적인 강령을 내걸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정교 분리 노동시간 최대 10시간으로 제한 아동 노동과 야간 노동의 금지 노동조합의 공장 접수와 운영 무상 교육제도 실시 빈곤층 구제 공창제 폐지 도박 금지등도 포함되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개혁조치들이었다. 코뮨은 또 여성들과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고, 독신 여성에게도 연금을 지원하는 조항도 넣었다. 하지만 이런 조항들은 곧바로 정부군에 진압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진압군이 파리코뮨 리더를 체포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진압군이 파리코뮨 리더를 체포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티에르 정부는 코뮨을 진압하기로 작정한다. 신정부는 지방에서 군대를 징집하고 비스마르크와 교섭해 40만의 정규균 포로를 귀환시켰다.

42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뮌 측의 군대는 훈련이 부족한데다 규율이 잡혀 있지 않았다. 지휘관이 제멋대로 군대를 운영했기 때문에 지휘계통이 명확치 않았다. 결국 정부군과의 대치에서 코뮨군은 계속해서 패배하게 된다.

5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일주일이 전개된다. 코뮨측 중 과격파들은 파리 대주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반혁명파를 학살했다. 또한 튀일리 궁전, 루브르 궁전, 팔레 루아얄과 중세 시절부터 건축된 각종 청사 건물 등 많은 역사적 건물들을 불태웠다.

진압은 가혹했다. 정부군은 코뮨측에 서 있는 사람이면 즉석에서 처형했다. 코뮨군이 완강하게 저항하면 정부군의 보복도 강해졌다.

정부군 진압작전에 죽은 수는 정확하지 않다. 사망자가 15, 2만명이란 주장도 있고, 3만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군 공식 기록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사람만 43,522명이고, 이중 여성이 1,054, 16세 이하 어린이가 615명이었다고 한다.

파리코뮨의 참가자는 물론 진압자도 폭력을 사용했다. 폭력이 폭력을 부른 대참사로 귀결되었다. 이후 프랑스 좌파운동은 폭력의 무모함을 깨닫고 평화 시위로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파리코뮨에서 나타난 폭력 시위는 후진국으로 수출되어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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