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재벌개혁⑤…3개월만에 중단한 신산업정책
6공 재벌개혁⑤…3개월만에 중단한 신산업정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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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재벌해체론으로 비화…재계의 거센 반발과 대선 의식해 중도하차

 

구체화된 내용도 없는데 재벌 해체니 뭐니 하고 여론만 나빠지니 더 이상 밀고 나갈수 없게 됐소. 지금까지 해온 연구를 일단 중지하고 자료를 모두 파기하시오.”

19924월 중순께 최각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이른바 신산업정책의 검토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송희연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도 최 부총리의 지시를 받고 연구위원들을 불렀다. “EPB(경제기획원)의 지시오. 모든 연구를 중단하시오. EPB에 보고한 문건은 모두 없애도록 하세요. 다만 자료로서 가치가 있고, 언젠가 다시 들춰낼지 모르니, 연구위원들 각자가 연구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보관하세요.”

1992년초 재계에 유령처럼 떠돌던 정부의 신산업정책은 검토 단계에서 좌초됐다.

정책 당국자들은 갈수록 불어나는 풍문을 진화하기 위해 몸소 나섰다. 최각규 부총리는 신산업정책을 구상하고 있지 않다고 강력히 부인했고, 한봉수 상공부장관은 정부가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인위적으로 제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재계를 설득했다.

때는 바야흐로 선거의 해였다. 19923월의 제14대 총선에서 집권 민자당이 의석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12월이면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가 재벌 해체를 겨냥한 새로운 산업정책을 추진한다는 풍문으로 재계와 마찰을 일으킬수 없었다. 최 부총리는 시작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연구작업을 중지하고 진화작업에 나서지 않을수 없는 여건이었다.

당시 신선업정책 추진에 관해 최각규 부총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총리에 부임한 뒤 1년 동안 물가안정·성장률조정등 경제안정화 시책에 주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크로한 정책만으로는 안 되겠고, 마이크로한 산업정책을 연결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의 정부는 공장을 지으라, 수출을 늘리라며 기업에 일일이 간섭했지만, 시대상황이 변했지 않습니까.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조세·세정·금융·공정거래 등에서 새로운 산업정책을 세워 조건을 만들고, 기업 스스로 자기 혁신의 노력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와전되어 재계는 정부가 또다시 간섭하려 든다며 반발했지요. 대선도 임박했고 해서 결국은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신산업정책은 경제기획원이 KDI에 연구를 의뢰하기 이전부터 최 부총리의 발언과 기획원의 정책 기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1726일 제주도에서 열린 전경련 주최 최고경영자 세미나에 최 부총리가 참석했다. 최 부총리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이에 따른 폐해를 집중 거론하면서 정부의 대재벌정책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룹 집중 경영방식으로 인해 전문경영인의 창의성 발휘가 제약받게 된다면 국제 경쟁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집단의 총체적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계열사간 협조 체제는 개별 기업간 독립성과 경쟁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계열기업군 내의 모든 자금·인력·내부거래 등을 종합관리하는 방식은 점치 기업별 독립성을 발휘하도록 전환돼야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 부총리는 신산업정책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신산업정책이란 단어는 92124일 최 부총리가 능률협회 주최 조찬간담회에 참석, ‘새로운 산업정책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공식용어로 정착한다.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정책이 필요합니다. 경쟁력 없는 기업의 퇴출은 불가피합니다. 일본은 정부·기업·은행 간의 협력관계를 통해 산업정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따라서 국내 산업정책도 장기적으로 정부·기업·은행 간의 일정한 협의 체제 구축에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 부총리가 능률협회 조찬회에서 새로운 산업정책을 역설하고 있을 때 KDI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 방향이 논의되고 있었다.

 

1992120일 구본호 KDI 원장에게 ‘90년대 산업정책의 방향이라는 테마의 연구를 시작하라는 최각규 부총리 명의의 공문이 전달됐다. 곧이어 경제기획원 기획국 실무자와 KDI 연구위원을 멤버로 한 연구팀이 구성됐다. 기획원측 창구는 이근경 종합기획과장이, KDI측 창구는 박준경 선임연구원이 각각 맡았다. 양측 팀은 1주일에 한번씩 만나 연구과제를 추슬러 나갔다.

기획원이 처음 잡아놓은 주제는 이것저것해서 20여 가지나 됐으나, 협의 결과 8개로 압축됐다. 8개의 연구과제는 차입경영 방식과 자기자본 경영방식의 비교 대기업의 상호지급 보증과 은행보유주식 실태 부실채권 현황 및 법정관리와 은행관리 실태 중장기 산업자금 공급실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 관계 대기업의 기술개발 실태 정부 역할의 재정립 2천년대 산업구조 고도화전략 등이었다.

2천년대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이라는 테마는 KIET(산업개발연구원)에서 이미 연구 중인 것이어서 넘겨주고, KDI는 나머지 7개 테마를 맡았다. 시간을 3개월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KDI 연구진이 모두 여기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당시 연구의 방향 및 분위기를 박준경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내기보다는 자료를 수집, 조사하는 차원의 연구였습니다. 우리 경제의 문제를 정치·경제·사회의 종합적 시각에서 냉철하게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췄지요. 선진국의 경험들과 우리의 실정을 비교, 분석도 했는데, 기업의 근본적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 범위가 방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촉박해 흐름만 잡았을 뿐입니다.”

이근경 당시 기획원 기획과장의 설명이다.

7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내용 가운데 기업경영 효율화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KDI에 자료 정리를 의뢰한 것이었지요, 과거의 산업정책으로는 국제변화에 대처할수 없었고, 이런 관점에서 재벌의 소유집중 완화, 퇴출장벽 제거, 상호지급보증 규제 등을 정책화하기 위해 이론 체계를 잡으려 했습니다. 재벌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비판여론과 반시각이 분명코 존재하는 이상, 소유 분산을 서두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KDI1992325일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중간보고 형태로 기획원에 제출했고, 최종보고서를 꾸미고 있는 도중에 최 부총리의 연구중단 지시를 받은 것이다.

정부가 재벌을 해체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확산된 진원지는 기획원과 KDI의 연구작업만은 아니었다. 9112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발표된 미국 뉴욕대 앨리스 암스덴 교수의 논문이 정부부처와 관변 연구기관, 민간연구소등에 돌아다니면서 정부가 신산업정책을 추진중이라는 풍문을 더욱 무게를 갖게 되었다.

암스덴 보고서로 불리는 50여 페이지 짜리 논문은 현재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산업정책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축소하고 시장 기능을 강조하는 영국·미국식 이론의 접근방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영미식 산업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은 오히려 정부 개입이 상대적으로 더 허용되고 기업과 정부 간의 유기적 관계가 중시되는 독일이나 일본식 공업화 모형에 더 가깝다. 따라서 시장 메커니즘에 밑기기보다는 적절한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나아가 정책 대안으로 재벌의 은행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할 것과 준공익 투자기관의 신설을 통해 재벌구조의 재편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다. 이 내용이 자기자본의 몇배나 되는 부채를 안고 있는 재벌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줬고, 기획원과 KDI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여건을 형성했다.

암스덴 보고서는 수십부 복사돼 KDI 연구진에 배포됐고, 그 연구가 우리 실정에 맞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암스덴이 제시한 준공익 투자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투자회사로, 재벌의 부채를 인수, 주주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인데, KDI의 검토과정에서 상당 부분 수용됐다.

신산업정책은 이렇게 검토에서 시작해 검토로 끝났다. 당시 최각규 부총리는 재계의 드센 반발을 의식해 검토한 사실조차 없다고 부인했지만, 이 때 검토한 내용은 경제기획원 관료와 KDI 연구위원들의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총체적인 신신업정책은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그해 추진된 재벌기업에 대한 상호지급보증과 내부거래 규제정책은 당시 여러 갈래로 검토된 내용중 일부가 구체화된 것이다. 또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의 신경제정책에도 이때 검토된 내용이 상당부분 수용됐음을 당시 실무자들은 실토했다. 전경련을 비롯해 재벌기업들은 신산업 정책이 바로 산업의 효율성을 저해한다며 공식, 비공식으로 반대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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