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재벌개혁⑥…현대그룹 압박
6공 재벌개혁⑥…현대그룹 압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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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 정치참여에 노 대통령 “정치자금 댄 현대 한두 개사 부도내라”

 

당장 현대 계열사 중에서 한두 개를 부도처리하시오. 재벌이 정부에 대항하고 회사 돈을 빼내 정치자금으로 쓴 데 대해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하오.”

재벌 해체를 겨냥한 신산업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문이 재계를 강타하던 19924월초의 어느날. 노태우 대통령은 이진설 경제수석을 불러 다그쳤다.

노 대통령은 현대그룹, 특히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에 나선 정주영 대표에 대해 더 이상 참을수 없었다. 지난 3월의 14대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도 정 대표와 국민당의 탓이라 생각하니 가만 놓아둘 수 없었다.

이진설 경제수석은 대통령의 지시를 해당 부처에 내려 보냈다. 돈줄을 쥔 재무부와 은행감독원이 나섰다.

실무자들은 당황했다. 대통령이 홧김에 한 얘기인지, 정말 현대를 죽이기 위해 목을 조르라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현대의 모든 계열사가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서로 물려 있는 것을 노 대통령이 모르고 한 소리였고, 한두 개의 계열사만 떼내 부도를 내게 할 수는 없었다.

현대전자가 걸려들었다. 현대그룹의 주력업체인 현대전자가 은행대출금 483,000만원을 정주영 대표와 국민당에 제공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43일 황창기 은행감독원장은 대출금을 회수함은 물론 현대전자를 주력업체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 측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정주영 대표의 소유 주식을 현대전자 종업원들에게 팔아 모은 돈을 정 대표에게 전달한 것이지, 은행대출금을 유용한 것이 아니라고 나섰다. 게다가 44일까지 소명자료를 제출하라고 해놓고 소명도 하기 전에 발표, 기정사실화했다고 따지고 들었다.

415일 노 대통령은 최각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이용만 재무부장관, 한봉수 상공부장관을 청와대로 호출, 질책했다.

장관들은 현대만 제재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진언했다. “지금 국민들은 정부가 불공평하게 현대를 제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공정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날 회의 탓인지 황창기 은행감독원장은 423현대전자에 대한 대출금이 유용된 사실을 확인했으나, 현대전자가 첨단수출업체이고 주식매각 대금이 납부되었다는 점을 감안, 주력업체 취소 등 제재조치를 당분간 유예한다고 밝혔다.

이 무렵 최각규 부총리는 신산업정책 추진의 유보를 지시했지만, 노 대통령과 경제팀의 재벌에 대한 경고는 그 강도를 더해갔다.

1992425일 노 대통령은 전경련의 유창순 회장, 최창락 부회장, 현대의 정세영, 삼성 이건희, 럭키금성 구자경, 대우 김우중, 선경 최종현 회장 등 7명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노 대통령은 말문을 열었다.

노 대통령= 회사 주식이나 땅을 팔아서 정치자금으로 쓰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가족경영 체제를 고수하면서 회사 돈을 개인 돈처럼 운용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현대는 정경 분리를 해야 합니다.

유창순 회장= 대기업의 정치 참여로 정경 분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염려를 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정세영 회장= 예기치 않게 저희 명예회장이 정치에 참여, 사회·경제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정경 분리가 빨리 이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건희 회장= 기업이란 국가와 국민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경 분리는 너무나 당연해서 헌법 제1와 같은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에게 정경 분리를 촉구하고 금융 자금의 유용을 경고한 뒤인 428. 이용만 재무장관은 7월부터 30대 재벌에 대해 비주력 계열사의 상호지급 보증한도를 동결한다는 내용의 방안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3단계 스케줄을 짜서 재벌의 상호지급보증한도를 축소하겠다는 플랜도 제시했다.

다음날인 429일 이 장관은 전경련 초청 오찬강연회에 참석해 톤을 높였다.

한동안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영국이 미국·일본 등에 뒤처진 것은 업종전문화와 경영 현대화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재벌그룹이 앞장 서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해 창의와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은행감독원은 이미 32830대 여신관리 그룹에 대해 불요불급한 가지급금의 조기회수 및 신규취급 금지를 각 은행에 지시했고, 5월 들어 10대 그룹의 계열사주에 대한 가지급금 취급 전면금지 조치를 취했다. 말은 30대 그룹이니, 10대 그룹이니 했지만, 현대그룹이 정주영씨 일가에 빌려준 가지급금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현대그룹에 대한 제재가 직접적으로, 또는 재벌에 대한 규제라는 명분으로 시시각각 가해오자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재벌 해체론을 들고 나왔다.

512일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자본의 집중을 막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전문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늕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면서 현대에 대한 제재와 정부의 신산업정책에 대한 선제공격을 했다. 그는 국민당이 집권하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급격한 실시를 통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1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시행에 옮기면 된다는 방법론까지 제시, 상당한 상황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임을 엿보이게 했다.

 

그러면 정주영 대표의 재벌해체론은 정부가 신산업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린 재벌해체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정 대표의 발언 일부를 인용해 보자. “재벌은 정부가 기업 통제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상법에도 없는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룹별로 30~40개 기업이나 있어 이걸 개별기업 별로 통제하기가 힘들어져 만든 게 재벌이에요.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기업이 활력을 갖는데, 그러려면 해체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는 그러나 소유·경영의 분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재벌 해체의 경우 상법상 주권이 이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유는 그대로 있되, 상호 지급보증을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유와 경영이 반드시 분리되어야만이 경영이 잘된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미국의 포드사나 일본의 도요타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았어도 세계적인 회사로 우뚝 서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 대재벌정책을 입안, 추진했던 실무자들은 경제력 집중 완화, 즉 소유 분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최각규 전 부총리의 설명이다. “사촌·형제들 사이에도 빚 보증을 안 선다는데, 계열사를 담보로 하고 결국 국민경제를 담보로 하는 금융 관행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대주주의 경영권 문제는 시간이 가면 자연히 해소되지만, 이를 좀더 앞당기라 했지요.”

신선업정책을 연구한 박준경 KDI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한다. “재벌의 가족이 49.6%의 내부 지분을 갖고 서로 얽혀 보증해주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자본의 몇배나 되는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도 소수의 자본금을 투자, 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지요. 은행의 재벌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자는 것도 이런 취지였는데, 우리 운행이 워낙 취약해 검토를 보류했습니다.”

시각은 달랐지만, 정부의 신산업정책은 현대에 대한 규제, 정 대표의 재벌해체론과 맞물려 재계를 더욱 불안케 했다.

1992522일 유창순 전경련 회장은 롯데호텔에서 최각규 부총리를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이런 모임은 으레 부총리가 주선해 이뤄지는 게 관례였지만, 이날은 전경련의 유 회장이 별러서 자리를 만들었다.

재계를 불안케 하고 있는 신산업정책에 대해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해주십시오. 부동산 투기가 어느 정도 사라진 만큼 해체할 때도 되지 않았니까. 상호지급보증 축소, 가지급금 회수 등 일련의 조치로 기업하기가 힘들어 졌으니, 대폭 수정해야 합니다.”

최 부총리는 이미 신산업정책의 연구를 중단한 만큼 자신이 있었다.

신산업정책이란 있지도 않소. 앞으로 정책을 검토할 때 재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그런데 전경련도 더 이상 대기업 이익만 대변해서는 안됩니다. 경제주체 간의 협력체제 구축이나 공평한 경쟁의 을 확립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날 회동은 외견상 서로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기본적인 시각차를 좁히는데는 실패했다.

전경련은 624일 정부의 논리를 반박하는 세미나를 개최했고, 기획원은 713계열사간 지급보증을 자기자본의 100%로 제한한다는 내용의 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돈과 권력. 이들의 갈등은 노태우 정권, 6공화국말까지 차기 정권 획득을 위한 숨가뿐 질주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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