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공연 도중에 터져나온 벨기에 독립운동
오페라 공연 도중에 터져나온 벨기에 독립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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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종교, 언어, 경제가 네덜란드와 다른 지역을 합병시켰다가 분리독립

 

현재 벨기에 땅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네덜란드의 독립이 인정될 때, 네덜란드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 땅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과 리에주(Liege) 주교령으로 신성로마제국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4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과 리에주 주교령을 점령해 프랑스 영토에 편입시키고, 이듬해인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점령해 속국으로 만들었다.

1813년 프로이센과 러시아 군대에 의해 네덜란드가 해방되었고,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 왕국이 엣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과 리에주 주교령을 합쳐 연합왕국으로 통치하도록 인정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이 프랑스를 억제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완충지대(버퍼존)을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네덜란드는 벨기에 땅을 거저 먹은 셈이다.

 

네덜란드에 합병되기 이전의 합스부르크령과 리에주 주교령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에 합병되기 이전의 합스부르크령과 리에주 주교령 /위키피디아

 

하지만 빈 회의의 결과로 벨기에 지역을 네덜란드에 붙인 조치가 잘못이었음이 드러났다. 네덜란드의 벨기에 통치는 일방적이었다. 네덜란드 왕국은 벨기에 주민들의 자치권 요구를 무시하고 하원 의석을 적게 배치해 새로 편입된 남부인은 정치적 소외감을 강하게 느꼈다.

네덜란드에 편입된 남부지역은 북부와 많은 차이점을 드러냈다. 남부 지역이 인구 350만명으로 북부 네덜란드 지역 200만보다 많았고, 북부는 신교(프로테스탄트)이며, 남부는 구교(카톨릭)였다. 북부는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공업화가 진전되었고, 남부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언어도 남부 왈로니아(Wallonia) 지역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새로 차지한 남부 주민을 이등국민으로 대우했다. 인구가 적은 북부는 11개 주로 하고, 인구가 많은 새 영토에는 6개 주를 두어 정치적 참정권을 제한했다. 연합왕국의 정치와 정책은 북부 위주로 전개되었고, 남부는 소외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지역은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남부 농업지대는 보호무역을 원했다. 북부 정권이 밀을 자유무역을 통해 수입하자 말 기격이 떨어져 남부 농민들이 고통스러워했다. 종교적 자유가 인정되었지만, 남부 카톨릭 주교들은 북부 신교도들에게 지배당하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결정적인 차별은 1823년 국왕 빌럼 1세가 네덜란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 조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부인들에게 강한 반발을 사 18304월에 폐기되었다. 하지만 법안 폐기 후에도 현실적으로 프랑스어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는 지속되었다.

 

1830년 8월 25일 벨기에 혁명운동 /위키피디아
1830년 8월 25일 '오페라의 밤'에 시작된 벨기에 혁명운동 /위키피디아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 국왕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자유주의적인 루이 필립이 새로운 국왕에 올랐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바람이 네덜란드 남부 프랑스어권에도 파급되어 벨기에인들 사이에 독립의 기운이 확산되었다.

1830825일 오후 630분 브뤼셀의 모네 극장에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내용은 나폴리의 벙어리 처녀 페넬라가 나폴리 주재 스페인 총독의 아들 알폰소의 유혹에 넘어가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버림받게 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오빠가 알폰소에 반기를 든다는 스토리다. 스페인 지배를 받던 나폴리 시민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내용의 이 오페라가 벨기에 독립 운동을 촉발했다.

오페라는 네덜란드 국왕 빌럼 1(William I)의 통치 1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 마지막날의 피날레 행사로 예정되었다. 네덜란드 왕실은 벨기에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자 벨기에인의 감성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의 공연을 중단시키려 했지만, 국왕 축제일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 그게 화근이 되었다.

벨기에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 공연을 이용하기로 했다. 공연이 진행되던 도중에 오페라를 관람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었다. 독립세력들은 오페라 결투 장면에서 일제히 일어나 시위대로 전환하기로 예정해 놓고 있었다.

오페라 관람객들은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네덜란드의 정부청사들을 점령하고 독립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었다. 브뤼셀의 무산대중도 합류했다. 시민들은 시내에서 가두 투쟁을 벌였다.

 

네덜란드 국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왕세자인 빌럼(William)과 프레데릭(Frederik)이다. 왕세자는 온건파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브뤼셀에서 살았기 때문에 벨기에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는 호위병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브뤼셀로 가서 독립운동 대표들과 만났다. 타협안이 나왔다. 네덜란드 왕국을 둘로 나누고, 남쪽은 왕세자가 왕권을 맡는다는 조건이었다. 빌럼 왕세자는 아버지 빌럼 1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버지 빌럼 국왕은 자신의 허락 없이 합의를 해온 왕세자의 방자함에 분노하고 타협안을 거절했다. 대신에 또다른 왕자 프레데릭에게 8,000명의 병력을 주고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프레데릭 왕자는 브뤼셀에서 유혈 시가전을 벌였지만, 진압에 실패했다. 독립운동 세력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네덜란드 군은 마스트리히와 엔트워프로 퇴각했다.

104일 벨기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이 선포되었다. 11월엔 벨기에 의회가 구성되고 입헌군주국을 국체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프랑스의 벨기에 분할안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벨기에 분할안 /위키피디아

 

프랑스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자 영토적 욕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주변국가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영국은 도버해협 바로 건녀 편에 프랑스 영토가 생기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트의 영지였다는 이유로, 프로이센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이유로, 러시아는 자국을 침략한 프랑스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견제했다.

벨기에 독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830년 런던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이 프로이센 러시아 등 5개국이 참가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는 런던주재 대사 샤를 탈레이랑( Charles Maurice de Talleyrand)을 파견했다. 탈레이랑은 벨기에를 분할해 안트워프(Antwerp)를 자유국가로 분리하고, 동쪽 지역을 프로이센에 주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프랑스가 차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탈레이랑 안은 벨기에의 대부분을 프랑스가 차지하는 것으로, 독립세력은 물론 다른 강대국들의 반발을 샀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는 프랑스가 벨기에를 합병할 것을 우려해 원래대로 벨기에를 네덜란드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며 군대 파병에 합의했다. 하지만 어느나라도 내부문제에 휩쓸려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1831년 벨기에 초대국왕 레오폴드 1세 즉위식 /위키피디아
1831년 벨기에 초대국왕 레오폴드 1세 즉위식 /위키피디아

 

이제 벨기에 독립세력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차례가 왔다. 벨기에 의회는 우선 빈 체제의 앙시앙레짐(ancien regime)을 인정해 입헌군주제로 국가를 운영하기로 하고 국왕 선택에 나섰다.

국왕 후보자로 일단 네덜란드 왕가를 배제했다. 3명의 후보자로 좁혀졌는데 모두 프랑스 왕가였다. 그런데 그들은 반대쪽을 선택했다. 프랑스가 벨기에 독립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결국은 그 땅을 집어 삼키려는 의도를 보이자, 독일계 왕가로 선택을 바꾸었다. 최종 선택은 독일계 작센 코브루크(Saxen-Coburg)에서 레오폴드 1(Leopold I)를 초대 국왕으로 영입했다. 레오폴드 1세는 처음에는 프랑스계 나라의 국왕을 꺼려했지만, 결국엔 제의를 수용하고 브뤼셀로 떠났다.

벨기에에 독일계 국왕이 들어서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등 독일어권 국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영국도 프랑스와의 완충지대에 독립국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1831721일 즉위했다. 벨기에는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해 경축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벨기에의 독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3182일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를 침공해 신생 벨기에 왕국의 레오폴드 1세의 군대를 무찔렀지만 프랑스가 개입하겠다고 위협하자 개전 10일만에 물러났다. (10일 전쟁)

1839419일 네덜란드와 유럽 열강이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벨기에 독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벨기에 독립은 폴란드, 헝가리, 노르웨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등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 민족주의 형성에 표본이 되었다. 그후 독일과 이탈리아에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분열된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 졌다.

 

벨기에 /위키피디아
벨기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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