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와 금이 동시에 터진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와 금이 동시에 터진 남아프리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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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개발로 킴벌리, 요하네스버그 등 대도시 형성…보어인들과 마찰

 

남아프리카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인은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즈(Bartolomeu Dias)였다. 그가 1487124일 도착한 곳은 지금의 나미비아의 월비스만(Walvis Bay)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남아프리카를 인도로 가는 경유지로만 활용했을뿐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다.

1600년대초 영국과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함대와 상선들이 남아프리카에 들러 물을 얻고 휴식을 취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가 좌초해 선원 두명이 남아프라카에서 몇 개월 동안 야채도 기르며 원주민들에게서 고기도 얻으며 살았다. 그들은 귀국해 아프리카 남쪽에 살기좋은 곳이 있다고 보고하게 된다.

남아프리카에 최초로 이주한 사람은 네덜란드인이었다. 1652년 동인도회사 출신 네덜란드인 얀 반 리베크(Jan van Riebeeck)가 희망봉 근처에 케이프타운(Cape Town)을 건설한 것이 유럽인 최초의 식민지다. 이후 네덜란드의 칼뱅파 신교도들이 종교탄압을 피해 대거 이주해 정착했다. 그들의 후손을 보어(Boer)인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1797~1815) 기간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이 케이프타운을 빼앗았다. 영국인들에 의해 쫓겨난 보어인들은 북동부 내륙으로 들어가 목축업을 하며 생활했다. 보어인들은 칼뱅 원리주의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목초지를 찾아 내륙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다. 보어인들은 물질적인 욕구에 연연하지 않고 종교적 구원을 추구했다.

당시 남아프리카는 네 개의 식민공화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영국인들이 지배하는 케이프식민지(Cape Colony)나탈식민지(Natal Colony), 보이언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트랜스바알(Transvaal)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이었다.

처음에는 영국인들과 보어인들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지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견되면서 두 종족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물욕에 눈이 뒤집한 군상과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인간 사이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남아프리카의 4개 식민지 /위키피디아
남아프리카의 4개 식민지 /위키피디아

 

1866년 어느날, 에라스무스 제이컵스라는 15살 어린이가 오렌지강(Orange River) 근처에서 반짝이는 돌덩어리를 주워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그 돌을 상인에게 팔았다. 그 상인이 확인했더니 21.25캐럿(4.3g)의 다이아몬드였다. 유레카(Eureka Diamond)라 불린 이 귀금속은 남아프리카에 다이아몬드 러시를 촉발했다. 곧이어 1869년엔 남아프리카의 별’(Star of South Africa)이라는 83.5캐럿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유레카 다이아몬드 /위키피디아
유레카 다이아몬드 /위키피디아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채굴자들이 오렌지강과 바알강 일대로 몰려 들었다. 1867년에는 다이아몬드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강가에 수km에 걸쳐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텐트가 줄을 이었다.

보어인 드비어스(De Beers) 형제가 소유한 땅에서 많은 양의 다이아몬드가 나왔다. 영국 외무상 킴벌리(Kimberley)의 이름을 따서 그 일대를 킴벌리라고 명명되었다.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산은 오래가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다이아몬드는 화산 용암이 굳는 과정에서 생성되는데, 킴벌리 일대의 초기 광산은 화산의 화도(火道)가 지표에 노출된 부분이었다. 지표의 채석장이 다 파헤쳐진 다음에 수직으로 채굴해 들어가야 했다.

수직 채굴도 한계를 드러냈다. 부드러운 사력층을 파고들면 그 아래에 단단한 푸른돌층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개인 채굴업자가 도전하기 힘들고, 다이너마이트와 중장비를 동원할수 있는 대규모 광산기업의 몫이었다. 3천개가 넘던 개인사업자가 통폐합되면서 100개 기업으로 합병되었다. 100개 기업도 많았다. 많은 기업이 시장에 다이아몬드를 내놓는 바람에 가격이 폭락하고 채산성을 잃었다. 결국은 하나의 회사만 다이아몬드를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가 생겨냈다.

기업들간 M&A가 시작되었다. 다이아몬드 경쟁의 축은 세실 로즈(Cecil Rhodes)와 유태인 바니 바르나토(Barney Barnato)였다. 세실 로즈는 드비어스 광산을 사들여 이 회사를 통해 기업인수에 나섰다. 바니 바르나토도 교묘하게 기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때 런던 금융가를 휘어잡던 로스차일드(Rothchild) 은행은 세실 로즈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회사는 거의 로즈와 바르나토에게 흡수되고 마지막으로 프렌치 다이아몬드만 남았다. 이 회사 인수를 위해 세실 로즈는 로스차일드에게서 100만 파운드의 보증을 얻었다. 바르나토는 로스차일드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으며, 자신의 회사도 합병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회사로 통합된 세계최대 다이어몬드회사가 드비어스(De Beers).

 

킴벌리의 옛 다이아몬드 광산 빅홀(big hole) /위키피디아
킴벌리의 옛 다이아몬드 광산 빅홀(big hole) /위키피디아

 

드비어스로 다이아몬드 광산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킴벌리에서 떨어져 나간 채굴자들은 남아프리카에 금광산이 있을 것으로 믿고 금맥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보어인들이 살고 있는 트랜스바알에 금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883년 트랜스바알과 스위질랜드(지금의 에스와티니) 국경근처에서 노다지를 발견했다. 금은 단단한 석영 속에 함유되어 있었다.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수십개 기업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그 금광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많은 채굴자와 기업들이 파산했다.

18862월 요하네스버그 근처 위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라는 곳에서 또다시 금이 발견되었다. 대박을 쫓던 스트루벤 형제가 발견했는데, 이 곳의 금맥은 층이 두터웠다.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산에 참여했던 많은 채굴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킴벌리의 모든 광산업자들이 이곳 금광에 뛰어들었고, 세실 로즈도 지사를 설립했다. 사람들은 위트워터스랜드라는 긴 이름을 랜드로 줄여불렀다.

세실 로즈 /위키피디아
세실 로즈 /위키피디아

 

랜드 광산은 파헤친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암반층을 만났다. 그 암반에는 금이 함유된 것이 분명했지만, 암석에서 금을 추출하는 방법을 몰랐다. 수은을 부어도 금이 추출되지 않았다. 1890년에 랜드에서 수십개의 광산회사가 파산했다. 금광개발로 갑자기 번성한 요하네스버그는 정적이 감돌았다.

문제는 암석에서 금을 추출해 내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존 스튜어트 맥아더(John Stewart MacArthur)라는 화학자였다. 그는 여러 실험을 걸쳐 시안화물이 금을 녹일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광석을 시안화물을 이용해 용해한 다음에 아연 분말을 사용하면 금이 침전되었다.

맥아더의 시안화물 처리법(cyanidation process)은 전세계 금산업에 획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캘리포니아의 금광산에서 버려진 폐석들을 재활용해 금을 추출하게 되었고, 쇠락해가던 남아프리카의 랜드 광산에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하나의 문제가 남았다. 금맥은 평탄하게 구성되지 않고 수시로 수직으로 파고들었는데, 수직 광맥을 만날 때마다 광산회사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사라진 금맥이 어디로 뻗었는지, 어디에서 나타날지 지표에서는 알수가 없었다. 이를 해결해준 것이 다이아몬드 드릴 공법이다. 수백m를 드릴로 구멍을 파 금맥을 찾으면 그곳에서 채굴하면 되었기 때문에 광산기업들은 안정적으로 채굴을 할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공법들이 개발되면서 랜드광산과 인근의 요하네스버그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드비어스의 세실로즈도 로스차일드와 손잡고 랜드광산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랜드광산은 세계 제1의 금광산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금광산은 가장 큰 장애에 부딛쳤다. 바로 보어인들이었다. 금광이 발견된 트랜스바알은 보어인의 공화국이었다. 보어인들은 노다지로 돈을 번 사람들이 술집에서 떠들썩하게 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 금에 미친 영국인들은 천박했고, 금광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켰다. 드디어 영국식민지와 보어인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금광개발로 건설된 도시 요하네스버그 /위키피디아
금광개발로 건설된 도시 요하네스버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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