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인종 우월주의가 빚어낸 참혹한 보어전쟁
영국의 인종 우월주의가 빚어낸 참혹한 보어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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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로즈의 앵글로색슨 우월주의, 인종청소로 귀결…히틀러가 공감

 

세실 로즈(Cecil Rhodes, 1853~1902)는 대영제국의 대표적인 제국주의자로 꼽힌다. 콧수염 을 기른 근엄한 얼굴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연상시킨다. 히틀러는 세실 로즈야말로 앵글로색슨족의 이상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영국인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로즈는 앵글로색슨이 가장 우수한 인종이라며 영국인이 지구에 더 많이 지배할수록 인류가 더 잘 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에서 목사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병약했다. 17살 되던 1870년에 따듯한 곳에서 요양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형과 함께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로 건너왔다. 1년후 킴벌리로 가 다아이몬드를 채굴해 시드머니를 마련했고, 그 돈으로 또다른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De Beers)를 사들였다. 그는 당대 유럽 최고의 금융회사 로스차일드의 돈을 끌어들여 남아프리카의 모든 다이아몬드 광산을 인수해, 188835세의 젊은 나이에 전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90%를 독점했다.

세실 로즈는 중도에 다이아몬드 사업을 형에게 맡기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존 러스킨(John Ruskin) 등 당대 철학가들의 영향을 받아 제국주의적 신념을 확고하게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자신의 전재산을 영국 식민장관에게 기증한다는 유언장을 써 놓았다. 그의 유언장에는 영국이 전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비밀협회를 조직하고, 이 협회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 팔레스타인, 말레이반도, 남아메리카, 일본, 중국을 식민지화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는 4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미리 쓴 유언장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케이프 식민지에서 카이로까지 붉은 선’(red line)을 그어 영국이 철도를 놓고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은 후에 인도 캘커타~카이로~케이프타운을 잇는 영국으 3C 정책의 배경이 된다.

세실은 다이아몬드 회사에서 돈을 많이 번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운동에 나섰다. 1880년에는 케이프 식민지 의원, 1884년 케이프 식민지 재무장관이 되었고, 1890년에는 마침내 케이프 식민지 총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번 돈, 동료 광업자의 지원금, 영국 본토에서 투자받은 돈 등을 합쳐 남아프리카회사(BSAC: British South Africa Company)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처럼 경찰도 보유했다. 경찰은 사실상 군인이었고, 그의 제국주의 이념을 수행하는 침략군 조직이었다. 세실은 BSAC를 개인 조직처럼 부렸다.

 

세실 로즈 /위키피디아
세실 로즈 /위키피디아

 

식민지 총리가 된 세실 로즈는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아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의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지역이다.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속였다.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Matabeleland) 지역의 추장에게 동업자 찰스 러드(Charles Rudd)를 보내 광산영업권을 얻어왔다. 러드는 백인 10명만이 광산에 참가하겠다고 해놓고 계약서에는 그 내용을 빼버렸다. 영어를 모르는 추장은 계약서에 서명을 했는데, 계약서에는 광업권 전체를 넘겨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추장 은데벨레(Ndebele)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계약 폐기를 요구했지만, 로즈는 그의 요구를 무시했다. 케이프식민지와 마타벨레족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894년 세실 로즈는 BSAC을 앞세워 원정군을 북쪽 내륙으로 파견해 영국 본토의 4.5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토지를 빼앗았다. 군대는 로디지아를 점령하기 위해 은데벨레족과 두차례의 전쟁(1893~1894, 1896~1897)을 벌였다.

이때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맥심 기관총(Maxim gun)이 사용되었다. 1차 전쟁에서 은테벨레 부족은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이중 2만명이 소총을 보유했다. 이에 비해 BSAC의 병력은 750명에 타부족 지원병 700명이 고작이었다. 숫자상으론 토착 부족이 1001로 압도했지만, 기관총 앞에는 추풍낙엽이었다. 아프리카 왕국과 토착인들에겐 전쟁이었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인에겐 사냥이었다. 세실 로즈의 군대는 마타벨레족에게 야만적인 공격을 퍼부어 흑인 전사들을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대량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끝났다. 로즈의 군대는 게임을 즐기듯 잠베지 강까지 점령했다. 로즈의 부하들은 이 넓은 땅은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Rhodesia, 로즈의 땅)라고 명명하고 아부를 떨었다. 세실 로즈가 새로 뺏은 땅을 남북으로 나눠 남()로디지아, ()로디지아라고 했다. 북로디지아는 지금의 잠비아, 남로디지아는 지금의 짐바브웨에 해당한다.

 

2차 보어전쟁 직전의 남아프리카 /위키피디아
2차 보어전쟁 직전의 남아프리카 /위키피디아

 

세실 로즈의 다음 목표는 네덜란드 후손들인 보어(Boer)인의 땅을 뺏는 일이었다. 보어인들은 영국인들에게서 쫓겨나 동북쪽에 트랜스바알과 오렌지자유국을 건설해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바알에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 광산업자들은 이 지방으로 진출해 땅을 파헤치고 귀금속을 가져갔다. 다이아몬드 광산지 킴벌리, 금광 개빌지 요하네스버그는 트랜스바알의 영토내에 있었다.

영국은 1877년 트랜스바알을 합병했다. 하지만 보어인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세금에 반발해 1870년 무장봉기를 일으켜 영국에 대항했다. 보어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영국인들이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려 했지만, 마주바힐 전투(Battle of Majuba Hill)에서 대패했다. 영국은 트랜스바알은 어쩔수 없이 트랜스바알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1차 보어전쟁)

 

체포된 린더 스타 제임슨 /위키피디아
체포된 린더 스타 제임슨 /위키피디아

 

세실 로즈가 케이프 식민지 총리가 되고 이 설욕을 잊지 않았다. 그는 로디지아 마타벨레족 공격을 지휘한 린더 스타 제임슨(Leander Starr Jameson)을 중용했다.

당시 트랜스바알은 1차 보어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을 수립해 폴 크루거(Paul Kruger)를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자국내 금광촌으로 밀려들어오는 탐욕스러운 영국인들을 불신했다. 칼뱅파 근본주의를 신조로 하는 보어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프레토리아(Pretoria)에서 한 시간 거리에 외국인(영국인)들이 건설한 요하네스버그를 소돔과 고모라라며 분개했다. 보어인들에겐 금광촌에 밀려든 이방인들이 하느님에 순종하는 자신들을 붕괴시키는 이교도들이었다.

크루거는 영국인 광부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그들의 자녀 교육에 보조금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크루거는 자국 영토에서 사업하는 광산주와 광부들에게 세금을 매겼다. 당연한 조치였다.

세실 로즈의 케이프 식민지는 크루거의 이러한 조치를 차별조치라며 영국인 광부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크루거는 말도 되지 않는 세실 로즈의 요구를 거부했다.

세실 로즈의 심복 제임슨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냈다. 그는 트랜스바알의 광산주와 광부들을 선동했다. 제임슨은 세실 로즈의 또다른 부하 알프레드 베이트(Alfred Beit)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요하네스버그의 영국인들과 짜고 크루거 정부에 대한 반란을 도모했다. 석유드럼통에 총기가 숨겨져 요하네스버그로 반입되었다. 189511월 제임슨은 트랜스바알 국경에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배치했다. 요하네스버그의 내부자들은 거사일 연기를 요청했지만, 제임슨의 부대 5백명은 그해 1229일 국경을 넘어 요하네스버그로 진격했다. 트랜스바알 수비대는 사전에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국경에서 수km 떨어진 지점에서 제임슨의 부대를 격파했다. 살아남은 무리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실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리에서 물러났다. 트랜스바알은 침략자 우두머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제임슨만 살려 돌려보냈다.

제임슨의 무모한 공격(Jameson Raid)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이 파렴치한 침략행위를 하고도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는 트랜스바알에 영국인 광부들에게 참정권을 줄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당시 트랜스바알에는 보어인 유권자가 3만명이었는데, 영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면 6만명의 유권자가 정권을 교체시킬수 잇었다. 크루거는 참을수 없는 도전에 직면해 케이프 식민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

 

보어인 부대 /위키피디아
보어인 부대 /위키피디아

 

189910월 보어인들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재개되었다. 영국은 본국은 물론 케이프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에서 병력을 동원했다. 영국군 병력수는 보어인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영국인들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공격에 나서 19006월 트란스바알을 점령하고 병합을 선언했다. 또다른 보어인 국가인 오렌지자유국도 트랜스바알측에 가담하자 영국군은 이 공화국도 점령해 병합했다.

하지만 보어인들은 게릴라 전술을 취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영국군은 보어인 인종청소에 나섰다. 보어인의 농토와 가옥을 불사르고,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그래도 보어인들은 저항했다. 영국인들은 보어인들 시체를 구덩이에 묻고 표시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죽은지 구체적인 통계가 없다. 영국의 여성반전단체 에밀리 홉하우스(Emily Hobhouse)1902년 남아프리카 현지를 조사한 결과에서 26천명의 보어인 여성과 어린이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최후까지 저항하다 잡힌 포로 5천명은 세인트 헬레나, 버뮤다, 실론 등 섬으로 추방했다.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세실 로즈의 백인 우월주의를 이어받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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