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 개통…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차지
수에즈 운하 개통…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차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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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로스차일드 자금 빌려 이집트 지원…반란 제압하고 보호령 삼아

 

18691117일 수에즈 운하(Suez Canal)가 시작되는 포트사이드(Port Said)에서 호화로운 준공식이 열렸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Eugenie)3일 동안 황제 전용요트 에이글(L'Aigle)을 타고 도착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프로이센 대공, 독일 헤세의 대공, 러시아 대공 등 내로라는 국제적 인물들이 참석해 샴페인을 터트렸다. 수에즈 운해 개통식은 세기적 사교모임이었고, 비용만 130만 파운드가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는 형식적으로 오스만투르크의 속령이었지만, 총독은 사실상 독립국가 군주나 다름없었다.

 

1869년 개통당시의 수에즈 운하 /위키피디아
1869년 개통당시의 수에즈 운하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 사이 지협 164km를 뚫은 것으로, 프랑스 기술자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Ferdinand Marie de Lesseps)1859425일 포트 사이드에서 기공식을 한 지 10년만에 개통되었다.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추진했지만 기술력 부족과 정치적 이유로 실패했다.

수에즈 운하 인공위성 사진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 인공위성 사진 /위키피디아

 

고대 이집트 제26왕조 네카우 2(재위 BC 610~BC 595)는 지중해~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해 완성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신탁에서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고 전했기 때문에 완성 직전에 공사를 중지했다. 무려 12만 명의 사망자를 낸채 중단한 고대운하는 현대의 수에즈 운하와는 달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하려 했다. 네카우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도록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다.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와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진흙이 덥히는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1897~18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엔지니어들에게 과거의 운하루트를 측량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엔지니어들은 홍해가 지중해보다 32인치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잘못된 계산으로 나폴레옹은 운하건설을 포기했다.

1830년대에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수에즈 지협을 측정했을 때 나폴레옹 측량사들의 오류를 발견하고,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수위에 차이가 없음을 발견했다.

1853년 프랑스인 드 르셉이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자고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획이 실행 불가능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영사로 근무하면서 이집트 지배층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무함마드 사이드(재위 1854~1863)가 이집트 총독이 되자, 르셉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면 장차 이집트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설득했고, 총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운하건설은 시작되었다.

사이드 총독는 르셉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을 허가했다. 자금은 프랑스가 빌려주고, 노동력은 이집트가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르셉은 황후 외제니에게 수에즈 운하건설에 필요한 기금과 재원을 조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후는 외교적 지원은 물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운하 건설 과정에서 수십만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됐고 수천명의 이집트인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 영양실조와 과로, 전염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땅을 파고 건설이 시작되면서 비용이 예상보다 두배로 불어나 이집트 정부가 재정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국(上國)인 오스만투루크가 운하건설에 반대했다. 운하가 준공되면 이집트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완전독립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운하를 건설하는 도중이었던 1863년에 무하마드 사이드 총독이 죽고 그의 조카 이스마일이 총독에 올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869년 바다와 바다를 있는 세계 최대의 운하 개통식이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운하 개통 이전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면 두가지 길이 있었다.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방법과 수에즈 지협을 건너 홍해로 가는 방법이었다. 당시 수에즈 지협에는 악명 높고 더러운 호텔에서 열흘 가까이 자야 했고, 인도행 증기선에 쓰일 석탄을 낙타에 싣고 가야 했다.

하지만 운하길이 열리면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희망봉 루트와 비교했을 때, 런던에서 봄베이까지 51%, 콜카타까지는 32%, 싱가포르까지는 29%의 시간을 단축했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는 미국 항공모함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는 미국 항공모함 /위키피디아

 

화려한 개통식이 끝난후 이집트는 곧바로 재정난에 봉착했다. 건설비가 당초 계획보다 두배나 늘어난데다 운하 이용 선박이 기대 이하였다.

영국은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당시의 기술로는 운하 건설이 어렵다고 보았고, 설마 프랑스인들이 해낼까에 의구심을 가졌다. 운하공사가 착공하자 영국은 빈정거렸고, 오스만투르크와 손잡고 운하건설을 훼방했다.

하지만 운하가 프랑스 기술에 의해 뚫리자 영국 지도층의 생각이 달라졌다.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준공 몇 년 내에 운하를 사용한 배의 4분의3이 영국 배였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서 인도 식민지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통치하기가 수월해졌다.

이집트는 운하를 건술한 후에 부채에 허덕였다. 이집트 정부는 유럽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고금리였다. 187511월초 이집트는 재정 파탄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마일 총독은 자신이 보유한 운하의 지분 44%를 담보로 프랑스 정부에서 돈을 빌릴 계획을 제시했다. 프랑스는 빚에 허덕이는 이집트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이스마일은 프랑스의 고압적 태도에 분개했다.

이스마일 총독은 영국 로스차일드(Rothchild)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영국 총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였다.

디즈레일리는 이집트 총독의 제의를 가로채 로스차일드 돈으로 이집트의 부채를 갚아 주면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필요로 하는 돈은 300~400만 파운드였다. 영국 정부와 로스차일드 사이에 대출계약이 맺어졌다. 이자율 연5%, 수수료 2.5%였다. 1124일 각의는 대출건을 승인했고, 영국정부는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이집트의 빚을 갚아 주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한방 먹였다. 프랑스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줄 생각을 하며 드 레셉스 회사를 통해 협상을 벌이던 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끼어들게 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수에즈는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 프랑스가 작전에서 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영국은 이전에 수에즈에 소액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 확보한 지분을 합쳐 수에즈에 대한 운영권을 확보했다. 영국은 곧바로 수에즈 운하에 대해 자유통행권을 채택했다. 프랑스가 자국선 이외의 선박에 대해 통행을 제한하거나 높은 통행료를 물리던 관행을 바꿔 영국은 모든 나라 선박에 대해 정치적 방해를 받지 않고 동일한 통행료로 운하를 통행하도록 허용했다.

 

우라비 반란군 /위키피디아
우라비 반란군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 관리권이 영국에게로 넘어가자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 불길이 당겨졌다.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모든 외국인을 추방해 운하 관리권을 되찾자고 주장했다.

이집트 이스마일 총독은 민족주의 열기를 이용해 운하 관리권을 빼앗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상국인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에 압력을 넣어 운하관리권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오스만 술탄은 이스마일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허울만 남은 제국이었지만 술탄의 지시로 1879년 이스마일이 사임하고 아들 테우피크(Tewfik Pasha)에게 총독 자리를 물려주는 것으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운하 지배권이 영국에 다시 넘어갔고, 프랑스도 운하관리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82년 영국 함대의 알렉산드리아항 함포사격 /위키피디아
1882년 영국 함대의 알렉산드리아항 함포사격 /위키피디아

 

운하가 유럽인의 손에 다시 넘어가자 이집트 민중들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그들은 반기독교, 반유럽을 외치며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을 무차별 습격했다. 영국의 자금 지원에도 이집트의 재정난은 악화되었다. 신임 총독은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대를 9만명에서 3만명으로 줄였다. 봉급도 받지 못한 채 해고 위기에 놓인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879년 우라비 파샤(Urabi Pasha)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테우파크 정권을 지지하고 동시에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출병을 약속했다. 하지만 18809월 영국군은 프랑스를 따돌리고 이집트에 선제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행동을 개시했다. 프랑스는 출병할 여력이 없었지만 영국 단독 출병에 굴욕감을 느꼈다.

우라비 반군은 3년간 저항했다. 1882년 영국 전함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에 정박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가했다. 4일간 포격에서 이집트 반군 7백명이 죽어 나갔다. 영국군은 이스마일 총독과 손잡고 우라비 반군을 제압했다.

이때부터 영국은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영국은 겉으로는 이스마일 총독의 통치를 인정하면서 군대를 통해 압력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집트를 위장 보호령(Veiled Protectorate)으로 삼는다. 1914년 오스만투르크가 1차대전에서 항복한 이후 영국은 가면을 벗고 정식으로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통치했다. 수에즈 운하도 영국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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