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왕국 에티오피아, 이탈리아군 격퇴하다
흑인왕국 에티오피아, 이탈리아군 격퇴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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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유럽군대 이기 독립 유지…현대식 무기로 무장해 침략군 궤멸시켜

 

에티오피아(Ethiopia)는 아프리카 동부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흑인 국가로, 역사적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BC 1000, 이스라엘의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이주해 건국한 나라라는 신화를 갖고 있다. 종교도 기독교의 한 계열인 에티오피아 정교가 주류를 이룬다. 유럽인들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나라는 1800년대 말엽, 아프리카가 유럽 열강에 의해 찢겨지며 식민지로 전락할 때에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침략군을 격퇴하고 저지시켰다. 일시적으로 점령된 적이 있지만, 끈질긴 투쟁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1896년은 윤년이었다. 229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칠흑 같은 밤, 이탈리아군 3개 여단은 아프리카 동부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에티오피아 국경지대인 아두와(Adwa)를 향해 남하했다.

이탈리아군은 4개 여단으로 편제되었다. 좌측은 알베르톤(Matteo Albertone)이 맡고, 중앙은 아리몽디(Giuseppe Arimondi) 장군이, 우측은 다보르미다(Vittorio Dabormida) 장군이 각각 맡았다. 4여단은 예비대로 진지를 지켰다. 3개 여단은 개별적인 동선으로 움직여 아두와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사령관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였다.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Menelik II)를 가볍게 보았다. 19세기말 유럽인들 사이에는 무지한 아프리카 부족을 무차별 공격하는 영웅적인 스토리가 흥밋거리로 식탁에 올랐다. 뒤늦게 통일국가를 형성한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화하지 않은 땅 가운데 에티오피아를 노리고 있었다.

바라티에리 휘하의 이탈리아 군은 17,000. 메넬리크 2세의 병력은 73,000, 민병대까지 합치면 12만명에 이르렀다. 병력수로는 에티오피아군이 이탈리아군에 비해 6배 이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군은 각 부족들에게서 동원됐기 때문에 결속력이 약했다. 또 갑자기 동원하는 바람에 식량 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3개월여 대치하는 동안에 비축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시간을 끌수록 에티오피아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교활한 바라티에리는 지구전을 벌였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즉각적인 공격을 요구했고, 부하들도 사령관이 겁을 먹은 게 아니냐며 비웃었다. 싸움에서 성미 급한 쪽이 진다.

바라티에리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황제는 첩자들 동원해 이탈리아군의 공격 시간과 공격로를 미리 알았고, 길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밤새 산을 넘어오느라 기진맥진했다.

 

아두와 평원 /위키피디아
아두와 평원 /위키피디아

 

이탈리아군에 결정적인 실수가 발생했다. 좌측을 맡은 알베르톤 여단이 배치하기로 약속한 고지를 지나쳐 에티오피아군의 진지로 접근해왔다. 작전 지도에 오류가 있었다. 그들은 지도만 믿고 가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메넬리크 황제가 그 정보를 듣고 쾌재를 불렀다. 에티오피아군은 알베르톤의 여단을 포위해 집중 공격을 가했다. 알베르톤은 생포되고 그의 여단은 2시간만에 궤멸됐다.

아리몽디의 중부여단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 몇시간은 버텼지만,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에티오피아군에 무너졌다. 우측의 다보르미다 여단도 이웃 여단을 지원하지 못하고 서둘러 후퇴했다. 다로르미다 장군은 좁은 협곡으로 도망가다가 에티오피아 기마병에 도륙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7,000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했으며,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에티오피아군도 5,000명이 사망하고 8,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부대의 절반 이상을 잃은 이탈리아군은 전의를 잃었다.

아두와 전투(Battle of Adwa)는 아프리카 흑인 정부가 유럽의 백인 정부와 싸워 이긴 최초의 전투였다. 이탈리아는 수치스러웠지만, 에티오피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에티오피아는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19세기말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아두와 전투도 /위키피디아
아두와 전투도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흑인왕국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유럽 군대를 이긴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군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에티오피아군이 병력수에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100배 이상의 흑인들과의 교전에서도 승리했다.

19세기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과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오피아 왕국은 일본처럼 일찍 근대화에 나섰고, 서양무기로 군대를 무장시켰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에 맞서 승리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근대화를 이끈 황제는 테오드로스(Tewodros)였다. 지방총독이었던 그는 군벌들을 타도하고 1855년 황제에 올랐다. 그는 병기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을 억눌렀다. 그의 군대에는 머스킷총은 물론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선교사로 온 영국인 기술자를 활용해 캐넌포를 주조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우월한 화포에 눌렸다.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가 반발했고, 1868년 영국군이 후장식 총으로 무장하고 황제군을 무찔렀다. 그는 영국군이 물밀 듯 밀려오자 자살했다.

 

하지만 그의 후임들은 유럽인들이 보유한 현대식 무기의 위력을 알고,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테오드로스의 후임인 요하니스 4세는 영국인을 고용해 군사를 훈련시켰고, 내부의 군벌과 외부의 적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유럽의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이어 1889년 메넬리크 2세가 즉위했다. 그는 국가 통치에 관료제를 도입하고, 고원지역인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했다. 전선과 전화를 개설하고 프랑스 식민도시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철도를 부설했다. 에티오피아 최초의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개축하는 등 근대화(서구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남쪽과 동쪽으로 식민지 정복활동을 했으며, 그 결과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이전보다 두 배나 확장시켰다.

 

아두와에서 이탈리아군과 결전을 벌인 1896년에 이르러 메넬리크의 군대는 아프리카의 어느 통치자보다 더 좋은 무기를 갖추게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병기고엔 수천 정의 후장식 총과 몇정의 기관총, 심지어는 야포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메넬리크의 군대는 활과 창을 보유한 아프리카 부족군대가 아니었다. 전원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숫적으로 월등하게 우세한데다 대등한 수준의 무기기를 확보하고 있는 흑인군단에 백인들이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두와 전투로 인해 백인들의 종족적 우월감은 사라졌다. 그동안의 승리는 과학기술과 무기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인종적 우월은 아니었다. 아드와 전투는 백인이 흑인에게 패할 수도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유럽인들에게 각인시켰다.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경마 시합처럼 결말이 예상되는 오락거리가 되지 못했다.

 

1908년 에티오피아 /위키피디아
1908년 에티오피아 /위키피디아

 

이탈리아는 아두와 전투의 패배를 잊지 못했다. 40년 후인 193510월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과거의 설욕을 씻기 위해 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다.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에티오피아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데다 독가스까지 사용하는 이탈리아군에게 허물어졌다. 이듬해인 1936년 무솔리니군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고,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군의 도움을 얻어 이탈리아군을 쫓아내고 복귀했다.

 

아두와 전투의 경우 아프리카 토착왕국이 당대에 개발된 신무기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케이스다.

유럽식 무기로 유럽인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전투는 이티오피아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아프리카 서부 니제르강과 세네갈 상류의 고지대에 권력을 잡고 있던 이슬람 지도자 사모리 투레(1878~1898 지배)는 근대 무기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 병사들에게 총으로 무장시켰다. 사모리는 전투에서 적의 무기를 빼앗든지, 구입하든지 모든 방법을 동원해 현대식 무기를 확보했다. 188736정이던 연발총은 18984,000정으로 늘어났다. 그는 근대 무기를 확보한 덕분에 전진하는 프랑스 군을 저지할수 있었다. 그는 직접적으로 무기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그도 결국엔 프랑스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19세기말에 무기만 제대로 확보하면 아프리카 부족장들이 유럽인들의 공격을 방어할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9년 미국의 미국 위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윌슨의 제안은 마치 서구인들이 피지배자에게 배려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앞서 흑인 왕국이 현대식 무기를 확보함으로써 이길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켰다. 서구인들도 더 이상 무력으로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차대전 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은 피지배인들도 무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를 지배해서 얻는 경제적 이득보다 토착인들과의 전쟁에 드는 비용이 컸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식민지를 포기했다.

 

에티오피아 메넬리크 2세 /위키피디아
에티오피아 메넬리크 2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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