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조선왕가와 결혼한 비운의 미국 여인
줄리아, 조선왕가와 결혼한 비운의 미국 여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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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손 이구와 결혼한 조선의 마지막 세자빈…아들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

 

영국 왕실에 미국인 부인 징크스가 있는 것 같다. 해리 왕자(Prince Harry)가 미국인 부인 메건 마클(Meghan Markle)과 결혼한 이후 왕실과 삐걱거려 독립했고, 앞서 1936년 에드워드 8(Edward VIII)가 미국인 부인 월리스 심프슨(Wallis Simpson)과 결혼하면서 국왕 자리를 포기한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왕가가 미국인 부인을 둔 일이 있다. 바로 영친왕 둘째 아들 이구(李玖)의 부인부인 줄리아 리(Julia Lee). 본명은 줄리어 멀록(Julia Mullock, 1928. 3. 18.~2017. 11. 26.)이며, 한국 이름은 이주아(李珠亞)였다.

 

이구(李玖, 1931.12.29.~2005.7.16.)는 도쿄 치요다구(千代田區) 아카사카(赤坂)의 저택에서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인 부인 이방자(李方子, 마사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428일 결혼한 영친왕과 이방자 사이에는 1921818일 태어난 첫아들 이진(李晋)이 있었지만 이진이 이듬해 사망하면서 이구가 대한제국의 황태손(皇太孫)이 되었다. 시호는 회은(懷隱).

어린시절 일본에서 자란 이구는 19508월 도쿄의 가쿠슈인(學習院) 고등과를 졸업하고 1950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구는 19565월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건축과에 입학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 아이엠페이(I. M. Pey) 건축사무소에 입사했다. 이때 3년 연상인 미국인 줄리아를 만나게 된다.

줄리아는 아버지가 우크라이나에서 이민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이민 2세였다. 아버지는 탄광노동자로 1930년 사망하고 어머니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남자와 재혼해 줄리아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줄리아는 1944년 미 해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2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프랭클린전문미술학교(Franklin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 입학해 미술과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했다.

1955년 줄리아는 아이엠페이라는 건축설계회사에 취직했는데, 중국계 건축설계사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녀가 취직한지 2년 후에 이구가 입사했는데, 줄리아는 당시 미술공부를 더 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유학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구가 줄리아의 집을 찾아와 젊은 여자가 혼자서 외국에 가는 것은 좋지 않다며 설득했다. 세 번 반복해 설득하는 바람에 줄리아는 이구에 이끌렸다.

줄리아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청혼하지 않았어요. 일방적으로 선언했지요. ‘우리 결혼할 거야.’ 그게 전부였죠, ‘나와 결혼해 주겠소가 아니었어요. 미국식으로 무릎을 꿇고 청혼하거나 제 부모님께 달과 결혼을 허락하 달라고 찾아간 것도 아니었어요.”

줄리아는 스페인 유학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다.

195712월 어느날, 이구는 미국을 방문한 영친왕 부부에게 꼭 봐주실 사람이 있는데, 만나 주시겠어요?”라며 서양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구는 이듬해인 19585월 정식으로 약혼했다. 곧이어 영친왕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해 1025일 이구와 줄리아는 뉴욕 세인트조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까운 사람들만 모였고, 하객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의 신분도 밝히지 않은 평범한 결혼식이었다. 부부는 브루클린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때 이구의 국적은 일본인, 미국에서는 영주권을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 왕가에 대해 한국 국적을 내주지 않았다. 조선 이씨 왕가에 대한 한국 국적 회복은 5·16 군사정부가 19621215일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을 고시하며 성사되었다.

줄리아는 이구와의 결혼후 남편의 부임지였던 하와이 등지에서 머물다 1963년 한국에 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시어머니 이방자(李方子)의 복지사업을 도왔다. 1979년 한국에서의 사업 실패로 일본으로 떠난 남편과 사이가 급격하 악화되었고,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친들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구와 줄리아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 그것이 이혼사유가 되었다. 1982년 이구와 이혼했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손 이구와 그의 부인 줄리아 멀록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손 이구와 그의 부인 줄리아 멀록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이혼 후에는 플라자 호텔에서 공예점을 운영하고 장애인 복지사업에 힘썼다.

줄리아는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 20054월 자신의 삶을 소재로 제작되는 영화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전남편 이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구의 영결식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렸다.

그는 남편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줄리아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멀찌기서 남몰래 전남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고 당시 장례식 르포 기사에서 전해진다.

이구 장례식에서 전주 이씨 종친회는 이구의 양자를 발표했다. 의친왕(義親王)8남 이충길의 아들 이원(李源)을 죽은 이구의 양자로 입적했다. 몰락했지만 왕가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의친왕 가문에선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양자를 세웠다는 항의가 제기되었다고 당시 언론보도가 전한다. 법률적으로도 민법상 사후 양자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구와 줄리아는 한국에서 법적으로 결혼신고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 이씨 왕가도 줄리아를 가문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미국 법에 의해 결혼하고 이혼했을 뿐이다.

 

줄리아는 20171126일 미국 하와이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그의 임종은 낙선재에 거주하던 시절 입양한 이은숙(지나 리)씨가 지켰다고 한다.

줄리아 멀록, 그는 조선 왕가의 마지막 세자빈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멸망하고, 왕실의 권위도 무너졌다. 게다가 줄리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당했다. 줄리아에게 조선왕실의 마지막 세자빈이라는 호칭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구와 줄리아 /순종 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 왕비의 일생(문화재청) 캡쳐
이구와 줄리아 /순종 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 왕비의 일생(문화재청)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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