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조문국 고분군, 사적 된다
사라진 고대왕국 조문국 고분군, 사적 된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1.2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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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금성면 374기 고분군, 5~6세기 경 축조…185년에 신라에 병합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는 신라가 경상북도를 영토로 만들기 이전에 조문국(召文國)이라는 소왕국이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고분군이 있다.

경상북도 의성(義城) 금성면(金城面)의 고분군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되었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은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에 걸쳐 조성된 374기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5~6세기 삼국 시대 의성지역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의 역사·문화와 신라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경북 의성은 조문국(召文國)의 땅이었다.

한자 라고도 읽고, ‘라고도 읽힌다. 한자 사전에는 부를 소또는 대추 조로 나온다. 경북 의성군에서는 조문국으로 통일해 발음하고 있다. 의성에는 조문국 박물관을 세워 그 고장의 옛 나라를 추억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 이사금 2(서기 185) 2,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召文國을 정벌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후세 사람들은 신라에 합병된 이 소국을 소문국이라고도 읽기도 하고, 조문국이라고도 읽는다.

<삼국사기> 잡지 상주조에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召文國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의성부(義城府)라는 구절이 있다.

 

조문국(召文國)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짧은 글귀가 전부인데, 이를 통해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작은 나라로, 석씨 왕조 벌휴이사금 2(185)에 신라에 의해 정벌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의성은 영남 북부에 위치해 있어, 조문국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탑리리, 대미리 일원에 고분군이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1960년 의성 탑리리 고분군이 발굴된 이래로 17차례의 매장문화재 조사와 9번의 학술조사를 통해 이곳에서는 신라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을 독자적으로 수용한 점, 경주와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관(머리장식)과 귀걸이(이식, 耳飾), 허리띠장식(과대금구, 銙帶金句), 고리자루칼(환두대도, 環頭大刀)과 같이 지배자가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하사한 착장형 위세품(威勢品)이 다양한 형태로 나왔다.

고분군에서 나온 출토 유물의 수량과 위세품의 우수성이 월등히 뛰어나며 고분의 형성 시점을 추정해보면 국읍(國邑, 중심 읍락) 지배계층의 분묘(墳墓)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의성지역의 독특한 토기형식인 의성양식 토기가 발견되어 꾸준한 생산과 유통을 해왔던 사실도 확인되었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에 고분군이 자리한 점은 의성이 전략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의 위치, 출토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의성지역은 신라의 발달과정에서 단순한 북방의 거점지역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군사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람들은 신라에 의해 합병된 조문국의 고분군으로 파악하고 있다. 296,825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고분들은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이 삼국시대 조문국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엔 서기 185년에 멸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가 5~6세기라면, 이 고분군은 멸망한 조문국의 후예들의 무덤이란 얘기인가.

 

의성군 금성산 고분군 1호분 경덕왕릉 /문화재청
의성군 금성산 고분군 1호분 경덕왕릉 /문화재청

 

고분군 가운데 경덕왕릉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35대 임금(재위, 742765)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조문국의 마지막왕을 의미한다. 신라 경덕왕의 무덤은 경주에 있다.

의성의 경덕왕릉은 능의 둘레 74m, 높이는 8m이고, 능의 앞면에 있는 비석은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0cm.

이 무덤에 관해 신비로운 전설이 내려온는데, 전설은 조선 숙종때 출간된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먼 옛날, 한 농부가 참외를 키우기 위해 작은 언덕을 갈던 중에 괭이 밑에 사람이 드나들만한 독을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해 구멍에 들어가보니 돌로 쌓은 석실이 나타났는데,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했고, 금소상이 있었으며, 그 머리에 금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했는데, 그만 손이 금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 곳에 와서 살펴보고 그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하고 현몽했다. 이튿날 꿈에 말한 곳에 당도하니, 과연 굴이 있고 사람이 금소상에 붙어 있었다. 현령은 현몽이 사실임을 믿고 봉분을 높이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분군 출토 금귀걸이 /문화재청
고분군 출토 금귀걸이 /문화재청

 

이 지방에는 대대로 또다른 얘기가 전해온다.

왕릉이 있는 땅은 500년 전에 오극겸의 참외밭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조문국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무덤자리니, 속히 철거하여라라고 말하면서 한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召文王事與誰論 (조문국 임금의 일을 누구와 함께 의논하랴)

千載猶存景德墳 (천년이 지나도록 경덕왕의 무덤만 남았구나)

飛鳳曲終人不見 (비봉곡도 사라지고 사람은 불수 없으니)

召文琴去香難聞 (조문국의 거문고도 가버리고, 소리조차 들을수 없구나)

 

참외밭 주인이 놀라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의 팔에 쓰여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극겸은 이 사실을 현령에게 고했는데, 그때서야 팔에 새겨진 한시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 영조 원년에 이우신이 지방 유지들과 의논해 묘를 증축하고 하마비를 세우고, 사람을 써 묘를 지키도록 했다.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탑리리 고분을 발굴했을 때 조문국 왕관으로 보이는 금동관을 비롯해 많은 토기, 철제 등 유물이 나옸다.

의성을 중심으로 안동, 예천, 상주 등지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옛 조문국은 찬란한 신라 황금문화의 원산지로서, 신라 김씨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지금은 매년 봄철에 향사(제향)를 지낸다고 한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 /문화재청
의성 금성면 고분군 /문화재청
의성 금성면 고분군 /문화재청
의성 금성면 고분군 /문화재청
의성 고분군 출토 금동관 /문화재청
의성 고분군 출토 금동관 /문화재청
의성 고분군 출토 그릇받침 /문화재청
의성 고분군 출토 그릇받침 /문화재청
고분군 출토 금동관묘 /문화재청
고분군 출토 금동관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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