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①…영국군, 한명 빼고 전멸하다
그레이트 게임①…영국군, 한명 빼고 전멸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21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영국군 대참사…레짐체인지 위해 침공했다 2년만에 철수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를 정치외교 용어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1830년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한다. 영국 동인도회사 기병대 정보장교 아서 코넬리(Arthur Conolly)가 이 말을 처음 썼으며, 영국 소설기 루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901년 소설 킴(Kim)에서 이 용어를 쓰면서 공식화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가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인도를 점령한 영국이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 이 기간의 전투 중 대영제국이 가장 뼈아프게 패배한 전투가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아프가니스탄 /위키피디아
아프가니스탄 /위키피디아

 

1838년 아프가니스탄의 칸(국왕) 도스트 무하마드(Dost Mohammad)는 영국 쪽에 서 있다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영국 본국과 인도 총독은 무하마드를 제거하고 영국에 우호적인 인물을 아프가니스탄의 새 칸으로 옹립한다는 음모를 꾸몄다.

영국인들은 여러 인물을 칸 후보로 올려놓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무하마드에 의해 쫓겨나 지금의 파키스탄으로 망명해 재기를 꿈꾸던 전 국왕 샤 슈자(Shah Shujah)를 대체 칸으로 정했다. 그를 적극 추천한 사람은 캘커타의 정치국장 윌리엄 맥노튼(William Hay Macnaghten)이었는데, 그는 이 망명자가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맥노튼의 주장과 달리 샤 슈자는 아프간인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다.

동원된 군대는 동인도회사의 병력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도는 영국 직할령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프간 수도 카불을 공격할 군대는 인더스군’(Army of the Indus)이라 불렀다. 영국인과 인도인 21천명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보병·기병·포병대를 거느렸다. 그 뒤를 짐꾼·세탁부·요리사·편자공등 잡다한 민간인 3만명이 따랐다. 슈자가 왕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민병대도 영국군을 따라 카불로 향했다.

18393월말, 이 대부대는 볼란 고개(Bolan Pass)를 통과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했다. 아프간에 진입했을 때 현지의 발루치족은 영국이 샤 슈자를 권좌에 올리는데 성공하더라도 아프간인들의 마음을 얻을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영국인들, 특히 맥노튼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425일 영국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칸다하르(Kandahar)에 들어갔다. 하지만 칸다하르 주민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새로운 칸이 입성했는데, 환영식에 참석한 사람은 고작 100명에 불과했다. 맥노튼은 실망하면서도 현지인의 충성심은 돈을 주면 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즈니(Ghazni) 요새는 난공불락이었다. 아프간 군은 5백명의 사망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했고, 영국군도 200명 이상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영국군은 성벽을 폭약으로 폭파해 간신히 요새를 함락시켰다.

가즈니 전투에서 영국군은 아프간인 16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기서 샤 슈자의 잔혹함이 드러났다. 슈자가 포로를 자기 앞에 줄지어 걷게 하자, 그중 한사람이 당신은 신의 배반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분개한 슈자는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그 자리에서 포로 40~50명을 무참하게 죽여 버렸다. 새 칸이 되려는 인물이 저지른 잔혹 행위는 빠른 속도로 아프간인들 사이에 전해졌다.

영국군은 곧바로 카불로 진격했고, 18397월 카불에 무혈입성했다. 도스트 무하마드는 도망쳤다. 샤 슈자는 망명한지 30년만에 카불에 들어와 칸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군은 국경을 넘은지 4개월도 못되어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몇 달후 전임 국왕 무하마드는 영국인 앞에 나타났고, 영국은 그에게 예의를 지켜 인도로 망명하게 해주었다. 샤 슈자는 영국의 이중성에 크게 분노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샤 슈자가 왕권을 회복하자, 아프간인들은 신임 칸과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카불 주재 대사로 임명된 맥노튼은 그동안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봄베이 총독으로 발령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프간인들의 불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아프간 여인들을 건드리고 술을 마셨다. 이슬람 왕국에서 경건하게 살아온 아프간 주민들은 그런 게 마음에 거슬렸다. 슈자는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에게 엄한 벌을 내렸다.

영국군 일부는 인도로 철수했지만 45백명의 병력은 여전히 카불과 주요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군 주둔과 영국인들의 이주는 카불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가뜩이나 척박한 산악국가에 호화생활자가 늘어나면서 세금이 늘어나고 물가가 뛰었다. 영국 군인들은 아프간 여인들을 유혹했다. 가정을 가진 어떤 현지 여인은 남편을 버리고 영국인과 사귀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군 병영에도 여자들이 들락거렸다. 아프간 사람들은 여성의 명예를 중시했다. 그들은 가슴에 복수심을 채웠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샤 슈자와 영국군에게 대항하는 대규모 봉기를 준비했다.

 

1839년 가즈니 전투 /위키피디아
1839년 가즈니 전투 /위키피디아

 

카불을 점령한지 2년이 갓넘은 1841111일 밤, 대규모 시위대가 알렉산더 번스(Alexander Burnes) 부대사의 집을 포위했다. 그의 집에는 엄청난 금이 있다는 소문도 퍼져 나갔다.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에 찬 사람들, 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때 시위대 한사람이 총을 쏘아 영국군 장교 한사람이 즉사했다. 영국 장교들은 고용된 인도인 용병 세포이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시위대와 영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고, 번스 부대사와 때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동생 찰스 번스가 사망했다. 30명의 세포이 경비병도 모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군은 공포에 질렸다. 시위는 카불에서 벗어나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틈에 강제 퇴위되어 인도에 끌려간 전임 칸 무하마드의 아들 와지르 악바르(Wazir Akbar)6천명의 병력을 소집해 반란군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영국군은 이미 3백명을 잃었고, 규율과 용기도 잃어버리고 패잔병처럼 진지를 고수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반란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3만명으로 늘어났다. 영국군의 7배나 적 앞에 영국군은 전멸할 것인지, 굶어 죽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인도에서 지원군이 도달하기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폭설로 카불로 지원군을 보낼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험악하기로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볼란 고갯길 /위키피디아
험악하기로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볼란 고갯길 /위키피디아

 

이 때 악바르가 협상을 제의해 왔다. 악바르는 영국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조건으로 아버지 무하마드를 귀환시킬 것을 제시했다.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영국군 장교와 그 가족 일부를 인질롤 잡겠다는 것이었다.

영악한 맥노튼 대사는 악바르의 제의를 역이용하려 했다. 무하마드가 다시 제위에 오르면 반대할 지도자들을 충동시켜 아프간인들을 분열시키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악바르도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협상을 하자며 맥노튼을 끌어내 죽여 버렸다.

이제 방법이 없었다. 주둔군 사령관 윌리엄 엘핀스톤(William G. K. Elphinstone) 장군은 일부 인질을 남겨두고 무조건 철수한다는 악바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84211일 엘핀스톤과 악바르 사이에 철군 협정이 체결되었다. 악바르는 영국군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무장호위대를 제공하고, 영국군은 대포 몇문을 제외하고 모두 내주기로 했다. 16일 영국군 4천여명과 영국인과 그 가족을 합쳐 16천명이 카불을 철수했다.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의 영국인 살육 /위키피디아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의 영국인 살육 /위키피디아

 

악바르 칸은 야비했다. 안전하게 귀환하도록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철수하는 영국인 대열의 후미에 군대를 보내 약탈과 살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악바르의 부하들은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인도 주저하지 않고 죽였다. 영국군은 후방에서 전투를 하면서 철수를 했다. 불필요한 짐이 많은데다 민간인들이 대부분이어서 후퇴 속도가 느렸다. 낙오자도 있었고, 동상걸린 사람도 속출했다. 악바르는 직접 군인을 끌고와 살육을 저질렀다. 철수한지 닷새만에 영국군 750명이 죽고, 민간인 3분의2가 죽었다.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 좁은 골짜기를 통과할 때 악바르의 군대는 마지막 소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윌리엄 브라이든(William Brydon)이다. 그는 샤 슈자의 어용의사로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카불을 떠났다. 아프간 국경의 마지막 고개에서 영국인 생존자들이 내려오는데 아프간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도륙을 시작했다. 브라이든도 머리에 칼을 맞아 쓰러졌다. 그는 다행히 모자 속에 잡지책을 넣어두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보니 치명상을 당한 기병을 발견했다. 그 기병은 자신의 조랑말을 타고 가라고 간청했다. 그 병사는 곧 죽었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혼자서 어둠속을 달려갔다. 얼마후 잘랄라바드의 영국 요새에 근무하던 보초가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를 태우고 온 조랑말은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죽었다. 113, 브라이든은 유일한 생존자로 영국 본국과 인도총독에게 보고를 전했다.

잘랄라바드 영국 주둔군은 그후 며칠 동안 성문에 불을 피워 놓고 정기적으로 나팔을 불었다. 혹시 브라이든처럼 살아서 돌아오는 낙오병이 있다면,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돌아온 윌리엄 브라이든 /위키피디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돌아온 윌리엄 브라이든 /위키피디아

 

영국군은 1842년의 대참사를 잊지 않았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는 무하마드의 또다른 아들 셰르 알리(Sher Ali)였는데, 그는 친러시아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번에 영국은 5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카불로 진격했다. 셰르 알리는 직접 러시아로 찾아가 차르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유럽 열강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러시아가 영국과 충돌을 피해 그의 입국을 거부했다. 러시아에 버림 받은 알리는 홧병에 18792월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무하마드 야쿠브(Mohammad Yaqub)는 아버지와 견해를 달리했다는 이유로 억류되어 있다가 새 칸에 올랐다. 야쿠브 칸은 즉각 영국과 협상을 벌여 영국의 보호령이 될 것을 수락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