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②…실크로드의 칸국을 잡아라
그레이트 게임②…실크로드의 칸국을 잡아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22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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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두차례 히바 침공 실패…영국, 억류된 러시아 노예 석방

 

현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은 투르크족 계열의 우즈벡족의 나라다. 이 나라는 고대 이래 동서양 무역로였던 비단길(silk road)이 지나가는 길목에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오아시스 도시들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해 있다. 징기스칸의 후예 티무르가 광대한 이슬람제국을 건설했던 발원지도 이 곳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쇠퇴하고, 여러 독립적인 왕국이 발호해 서로 싸우고 있었다. 1800년대 전반기까지 히바 칸국(Khanate of Khiva), 부하라 칸국(Khanate of Bukhara), 코칸트 칸국(Khanate of Kokand)의 세 왕국이 현재 우즈베키스탄 땅을 분할해 다투고 있었다.

이 비단길의 소왕국들에 군침을 흘린 강대국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700년대부터 카자흐 초원을 가로질러 남하했고, 1800년대 중반엔 현재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확보하면서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완충지대(buffer zone)으로 오아시스 도시들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비단과 향료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위키피디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비단과 향료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일찍부터 이 곳을 노렸다. 첫 번째 타깃은 아랄해로 흘러드는 시르다리야강(옥서스강) 하구의 히바 칸국이었다. 표트르(Pyotr) 대제 시절인 1717, 차르는 알렉산드르 베코비치(Aleksandr Bekovich) 장군에게 키바 칸국에 원정대를 파견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분은 히바의 칸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베코비치 일행은 그해 4월 카스피해 북단 아스트라한(Astrakhan)에서 1백척에 가까운 배를 출항시켜 내해를 가로질러 갔다. 원정대 규모는 24천여명이었고, 그들은 1년치 식량을 싣고 히바를 향해 동진했다. 6월 중순의 사막은 찌는듯한 더위에 물을 찾을 곳이 없었다. 일사병과 갈증으로 대원들이 죽어나갔다. 8월 중순, 러시아 군은 히바 근처에 도착했다.

히바의 칸이 마중나왔다. 원정대가 수도로 입성하기 직전에 칸은 도성이 좁아 군대가 모두 숙식할수 없으니, 도성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군인들을 성 밖에 둔 채 베코비치 일행은 성내로 들어왔다. 그러자 히바 인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베코비치 일행을 난도질했다. 칸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성 밖에서 대기하던 러시아 병사들도 대량 학살의 대상이 되엇다. 40여명 정도가 포로로 잡혀 처형을 기다리는데, 이슬람 수도승이 나타나 승리는 배신으로 얻었는데, 포로를 죽이면 신 앞에서 죄가 더 커질 것이라고 칸을 훈계했다. 칸은 이 용감한 수도승의 말을 받아들여 러시아인 포로들을 노예로 팔고, 일부는 사막을 건너 귀국하라고 허용했다.

대학살 소식을 들은 표트르 대제는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보복은 하지 않았다. 스웨덴과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히바라는 오지의 국가에 복수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히바는 너무 멀었고, 중도에 사막이 가로막고, 투르크의 도적들이 들끓었다.

 

히바 칸국의 사람들 /위키피디아
히바 칸국의 사람들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그로부터 120여년을 기다렸다. 1839년 영국 사절단이 군사적 지원을 제안하려고 히바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샹트페테르부르크에 들여왔다. 보고서는 중앙아시아 국경 근처에 설치한 오렌부르크(Orenburg) 기지에서 바실리 페롭스키(Vasily Perovsky)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롭스키에게 히바 원정 준비를 지시했다. 120년전의 원한도 풀고 영국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로 북상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는 전쟁의 대외명분으로 러시아인 노예 석방을 들었다. 당시 히바에는 상당수의 러시아 백성들이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명분은 영국도 반대할 수 없었다.

보병·기병·포병 등 5천명이 모집되었다. 용맹한 코사크 부대도 참가시키고, 탄약과 장비를 수송하기 위해 낙타 1만 마리를 동원했다. 페롭스키는 120년전 원정대가 여름을 선택하는 바람에 고생한 점을 감안해 이번엔 초겨울을 택했다. 초겨울에 출발해 혹한이 다가오기 전에 히바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다.

1126일 첫 부대가 출발하고 순차적으로 부대가 이동했다. 12월이 되면서 눈이 오기 시작했다. 심한 폭설이 자주 내렸다. 병사들은 키가 넘는 눈을 치우며 행군했다. 추위도 동반해 찾아왔다. 낙타들이 하루에 1백 마리 이상 죽어갔다. 1월초가 되자 낙타가 절반 이상 사라졌다. 대포를 끌고 갔기 때문에 전진이 어려웠다. 1월말쯤엔 병사 200명 이상이 병으로 죽었다. 그 이상의 병사들은 동상에 걸려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하루 행군 속도는 몇 km에 불과했다.

2월에 접어들면서 지휘관들 사이에서 전진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페롭스키도 부대 상황을 점검한 끝에 213일 철수를 명령했다. 러시아군은 한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철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고 괴혈병에 걸려 죽어 나갔다. 부대는 출발한지 7개월만에 오렌부르크 부대에 돌아왔다. 한번도 싸우지 못한채 1천명 이상의 병사가 숨졌고, 낙타는 90% 가량 잃어 버렸다. 러시아인 노예는 한명도 구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남진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남진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두 번째 원정이 실패했다는 소식은 히바에 뒤늦게 알려졌다. 히바인들은 눈 속에 러시아군이 행군해 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캐러반(대상)이 러시아 행군로에서 죽어간 낙타와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히바의 칸도 알게 되었다.

이듬해인 18401월말 영국 동인도회사의 특사로 제임스 애벗(James Abbott) 대위가 히바에 도착했다. 이 무렵, 히바의 칸도 러시아군이 기후 때문에 철수한 사실을 확인하고, 날씨가 좋아지면 언제든 다시 히바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 했다. 그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영국군 장교를 만나 주었다.

에벗 대위는 하비의 칸에게 러시아의 침공 구실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인 노예 석방을 제시했다. 칸은 에벗을 활용하기로 했다. 칸은 러시아가 오렌부르크에 억류하고 있는 히바인 인질을 돌려보내기로 약속하면 러시아 노예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에벗 대위에게 러시아 황제를 만나 외교적 중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겁 없는 대위는 표본으로 뽑힌 러시아 노예 몇 명을 데리고 러시아 황제를 만나겠다며 국경도시 오렌부르크로 갔다.

 

한편 에벗 대위를 히바로 파견한 헤라트(아프가니스탄) 주둔 영국군 본부에서는 에벗에게서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혹시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리치먼드 셰익스피어(Richmond Shakespear) 중위를 추가로 파견했다.

셰익스피어 중위가 히바에 도착했을 때 에벗 대위가 오렌부르크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에벗보다 한술 더 떴다. 그는 히바의 칸을 만나 지금 당장 러시아 노예를 집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에벗을 보내 놓고도 찜찜해 하던 히바의 지배자는 셰익스피어의 말에 고분고분했다. 일부 노예를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칸의 지시로 히바에 억류되어 있던 러시아 노예 416명 전원을 모았다.

셰익스피어는 히바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노예들을 데리고 국경도시로 가서 그들을 러시아 정부에 넘겨주었다. 셰익스피어는 러시아 군영에서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오렌부르크의 러시아 사령관은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히바인 6백명을 즉각 풀어주었다.

184011월 셰익스피어는 샹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차르 니콜라이의 환영을 받았다. 니콜라이는 영국군 장교에게 이교도의 손에서 러시아인들을 구출해준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으로 돌아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에벗 대위와 셰익스피어 중위의 노력으로 히바는 당분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지대로 남게 된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1873년에 히바를 세 번째로 침공해 함락시키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찰스 스토다트와 아서 코널리 /위키피디아
찰스 스토다트와 아서 코널리 /위키피디아

 

한편 히바의 이웃 부하라 칸국에서는 영국에 적대적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히바에 에벗 대위를 보낸 것과 똑같은 이유로 찰스 스토다트(Charles Stoddart) 대령을 부하라에 파견했다. 스토다트는 부하라의 칸 나스룰라(Nasrullah)에게 러시아인 노예를 석방해 러시아의 침공구실을 없애고 영국과 친교를 맺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부하라 칸은 그가 예의를 벗어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지하 감옥에 쳐 넣었다. 영국은 러시아, 터키, 이웃 코칸트 국에도 외교적 채널을 활용해 그의 석방운동을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영국은 이번에는 스토다트 대령의 석방을 섭외하도록 아서 코널리(Arthur Conolly) 대위를 보냈다. 코널리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부하라의 칸은 코널리도 체포해 지하감옥에 넣었다.

부하라의 칸은 변덕스러운 인물이었다. 18426월 부하라의 칸은 찰스 스토다트 대령과 아서 코널리 대위를 참수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은 숱한 희생을 내면서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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