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③…러시아, 중앙아시아 차지하다
그레이트 게임③…러시아, 중앙아시아 차지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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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매파 대두하며 무력으로 점령…영국, ‘신사적 무위’ 정책으로 방관

 

차르 니콜라이 1(Nikolai I)제국의 깃발이 한번 나부꼈던 곳에는 절대로 그 기를 내릴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후임 차르 알렉산드르(Aleksandr)제국의 깃발을 먼저 꽂고 그 다음 허락을 받아라고 했다. 변방의 장군들은 팽창주의적인 차르의 격려에 힘입어 일단 저질러 놓고 성공하면 두둑한 상금과 승진의 기회를 가졌다.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Nikolai Ignatiev) 백작은 러시아 매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58년에 그는 차르의 사절단을 이끌고 히바 칸국으로 갔는데, 통상 교섭을 다 마무리하고도 자그마한 사건 하나에 칸이 뒤집는 것을 보고 그곳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하겠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어 부하라 칸국도 방문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그는 보고서에서 영국이 선수를 치기 전에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을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그는 베이징에 파견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쫓아내 주겠다는 명분으로 1860년 연해주 일대를 러시아 영토를 만드는 베이징 조약 체결에 성공한다.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마키야벨리적 수완을 가지고 러시아 영토를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샹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차르로부터 훈장을 받고 매파의 선두에 섰다. 그 무렵 미국에서 남북전쟁(1861~65)이 발발해 면화 생산이 중단되면서 국제 면화가격이 급등했다. 중앙아시아는 면화 재배에 적당한 지역이었다. 러시아 매파들은 면화 생산지인 중앙아시아를 집어 삼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그나티예프는 정복만이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당시 크림 전쟁(8531856)에서 완패한 이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경파들에겐 새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타깃이 중앙아시아였다.

 

1800년대 중반의 중앙아시아 /위키피디아
1800년대 중반의 중앙아시아 /위키피디아

 

당시 중앙아시아 국경지대 지휘관은 미하일 체르냐예프(Mikhail Chernyayev) 소장이었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타슈켄트(Tashkent)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당시 인구 10만으로 과수원 포도밭 목초지를 보유한 이 도시는 코칸트 칸국(Khanate of Kokand)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코칸트의 칸은 타슈켄트에 살인적인 세금을 부과했고, 상인들은 코칸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타슈켄트의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웃 부하라 칸국(Khanate of Bukhara)에 구원을 요청했다.

체르냐예프는 부하라 칸국이 개입하기 전에 타슈켄트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차르와 조정에게 보고하거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단 타슈켄트를 점령해 놓고 보고하기로 했다. 만일 실패하면 그는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체르냐예프는 도박을 걸었다.

18655월초 체르냐예프는 13백명의 예하 부대를 이끌고 3만 병사가 지키는 타슈켄트로 쳐들어갔다. 그는 타슈켄트로 흐르는 강의 물줄기를 바꿔 버렸다. 러시아군이 타슈켄트에 접근했을 때 방어군은 긴 성곽을 빙 둘러 포진했다.

체르냐예프는 가장 약한 고리를 선택했다. 615일 러시아군은 성벽의 한 지점을 관통해 성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도시의 장로들은 체르냐예프에게 항복했다. 병력수에서 120의 압도적 열세에서도 러시아 군은 고작 사망 25, 부상 89명만 희생했을 뿐이다. 이 전투로 체르냐예프는 타슈켄트의 사자’(Lion of Tashkent)라는 칭호를 얻었다. 역사 기술자들은 체르냐예프의 천재적 전략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군의 화력과 무기가 타슈켄트 방어군의 재래식 무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체르냐예프는 타슈켄트의 이슬람 지도자들에게 종교에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1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샹트페테르부르크의 승인 없이 저지른 일을 보고하고 운명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타슈켄트 정복을 찬란한 업적이라고 칭찬하며 명령 불복종을 눈감아 주었다.

러시아 조정은 예르냐예프를 수도로 불러들이고 콘스탄틴 카우프만(Konstantin Petrovich Von Kaufman)을 현지 총독으로 보냈다.

 

타슈켄트는 부하라 칸국과 코칸트 칸국 사이에 있었다. 코칸트 칸국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을 지배하고 있었다.

코칸트의 칸은 영국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당시 영국은 중앙아시아의 문제에 신사적 무위’(masterly inactivity) 정책에 입각해 개입하지 않았다. 영국은 184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16천명의 영국인이 몰살당하는 참사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문제에는 관찰만 하지, 개입하지 않는다는 독트린을 고수했다. 영국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된 코칸트의 칸은 러시아에 저항하지 않고 1868년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스스로 보호령이 되었다.

 

1868년 러시아군의 사마르칸트 장악 /위키피디아
1868년 러시아군의 사마르칸트 장악 /위키피디아

 

카우프만은 부하라로 눈을 돌렸다. 부하라가 먼저 움직였다. 부하라는 18684월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사마르칸트에 집결했다. 카우프만은 35백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출병했다. 하지만 부하라 군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주민들은 항복했다. 그해 52일 사마르칸트는 러시아 제국에 흡수되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는 티무르의 묘가 있는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상징적인 곳이다. 러시아가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중앙아시아 투르크 족에게 심리적 압도감을 주게 되었다.

카우프만은 이제 부하라 수도로 진격했다. 부하라 군은 러시아 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연이어 패전하면서 부하라의 칸은 러시아의 보호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하라 칸은 러시아 차르의 봉신으로, 칸 위만 유지하게 되었다.

 

1873년 러시아군의 히바 점령 /위키피디아
1873년 러시아군의 히바 점령 /위키피디아

 

1868년 부하라가 항복한 이후 이제 히바 칸국(Khanate of Khiva)이 남았다. 러시아는 1717, 1839년 두 차례의 히바 원정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선 카스피해 동쪽 연안에 크라스노보츠크(Krasnovodsk)에 항구를 건설했다. 이 항구는 러시아 중부에서 볼가강을 따라 물자를 싣고 내려와 카스피해를 활용해 히바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중간 요지였다.

히바 칸국에 대한 공격 결정은 187212월에 이뤄졌다. 18733월 카우프만은 카스피해에 건설한 크라스노보츠크 항구와 북부의 오렌부르크 군사기지, 새로 점령한 타슈켄트 등 세 곳에서 13천의 병력을 출발시켜 사막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히바는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 러시아 군이 수도에 바짝 다가오자 칸은 억류된 러시아 노예와 포로를 석방할 터이니 진군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칸은 무조건 항복했다. 부대는 전투 없이 18735월 히바에 입성했다. 일부 히바 군이 항복에 반대하고 저항했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히바는 전쟁 배상금을 무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게옥-테페 요새 내부 /위키피디아
게옥-테페 요새 내부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남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 보호국으로 만든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이란 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이 넓게 펄쳐져 있고, 산맥들이 뻗어 있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람이 드믄드믄 살고 있었다. 이 일대는 별도의 국가가 조직되어 있지 않고 주민들은 키바 칸국에 용병으로 나가거나 약탈과 노예 납치를 하며 생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국이 차지하기 전에 이 척박한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1879년 미하일 스코벨레프(Mikhail Skobelev) 장군은 투르크메니스탄을 공격했다. 투르크멘인들은 게옥-테페(Geok Tepe) 요새에 집결했다. 러시아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 7, 투르크멘측은 병력 1만에 민간인 4만명이었다. 투르크멘인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성벽은 단단했다. 러시아군은 성벽 밑까지 터널을 파고 들어가 폭약을 설치했다. 폭약이 터지면서 성벽에 큰 구멍이 뚤리고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군은 성내로 들어갔다. 그다음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러시아군은 아이 노인,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한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도망가는 사람들도 쫓아가서 죽였다. 성내는 주검으로 덮였다. 많은 여자들은 죽기 전에 강간을 당했다.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가 없다. 성내에는 65백구의 주검이 나왔고, 도망가다 죽은 자만 6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스코벨레프 장군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적을 많이 학살할수록 평화도 오래 지속된다. 세계 때릴수록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

공포는 증오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증오감으로 쫓겨났지만, 러시아는 공포심으로 지배했다. 그동안 페르시아인이나 러시아인을 잡아 노예로 팔고 캐라반(대상)을 약탈하던 투라크멘 사람들은 러시아인에 대한 공포에 더 이상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

이 학살 사건이 유럽에도 알려졌다. 영국은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러시아는 마지못해 스코벨레프를 직위해제하고 참전 군인들을 벽지로 보냈다. 그렇다고 투르크메니스탄을 본래대로 돌려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1884년에 오아시스 도시 메르프(Merv)마저 점령해 투르크메니스탄을 러시아 영토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20년의 짧은 기간에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크스탄의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며 영국령 인도를 긴장시켰다.

 

현재의 중앙아시아 국경선 /위키피디아
현재의 중앙아시아 국경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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