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의 북방외교③…적과 동지가 바뀐 한중수교
노태우의 북방외교③…적과 동지가 바뀐 한중수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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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구한 ‘하나의 중국’ 인정…초기엔 박철언·이순석씨 물꼬 터

 

때는 199262. 장소는 중국의 국빈을 영접하는 북경의 조어대(釣魚臺). 우리측과 중국측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한중 수교를 위한 제2차 비밀회담이 열렸다. 양측 사이에는 팽팽한 설전이 오갔다.

“‘하나의 중국원칙을 인정하기로 했습니까.”

대만과 우리는 특수한 관계입니다. 적어도 대표부를 설치하게 해 주시오.”

예외는 있을수 없습니다. ‘하나의 중국에는 변함이 없소. 대표부는 두 개의 중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교한다면 중국이 취해온 대북한 일변도의 입장을 바꾸고 중국과 북한의 동맹조약은 파기되는 것으로 보아도 좋습니까? 북한의 핵 위협이 있질 않소. 중국과 북한의 조약등 군사적 협력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하고 사찰을 받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큰 진전 아닙니까. 남북 상호사찰이 남북협의로 이뤄지길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북한에 대해 계속해서 핵 문제를 종용하겠습니다.”

이 회담에서 한중 수교에 대한 의견이 어느 정도 좁혀졌다. 3차 회담은 서울에서 열렸다. 620일 서울 워커힐에서 만난 양측 대표단은 수교에 관한 가서명만 남겨 놓은 채 발표문에 들어갈 공동성명 내용과 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원칙에 합의했다.

728일 역시 북경의 조어대. 노창희 외무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대표단은 수교 원칙에 관해 양국 실무자들의 교섭을 거친 6개 항의 원칙에 가서명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노태우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을 만난다는 데 합의했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정부 인사와 민간 기업인들이 밀사로, 두 나라의 국경을 넘나들며 가장 중요한 막후대화 채널 역할을 한 사람은 박철언 의원과 ()선경의 이순석 사장이었다.

중국 정부와 막후 비공식 대화는 19877월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가 아시아·태평양 변호사회 고문 자격으로 죽의 장막을 넘어 북경을 방문, 당시 국무원 부총리와 법무 장관, 차관, 변협 회장 등을 만나 한중 관계에 대해 처음 논의했다. 그후 박 의원은 청와대 정책보좌관 자격으로 은밀히 중국을 다시 방문, 노 대통령의 친서를 중국 고위층에 전달, 중국과의 막후 교섭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그러나 중국과의 수교는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뜻대로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중국측이 정치인을 피하고 경제인들만의 교류에 치중한 것이 눈에 띠게 역력했다. 그래서 올림픽 이후 민간기업의 대화 채널에 상당한 비중이 실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선경의 이순석 사장이 중국 고위층과의 대화 채널을 열게 된 때는 북경지사를 열기 위해 북경을 오가던 19904월 무렵이었다. 이 사장은 중국국제우호연락회의 이사이자 李先念 전 중국국가주석의 사위를 통해 중국의 막후실력자인 田紀雲 경제담당 부총리겸 국제우호연락회 부회장과 선이 닿았다.

양국 정부간 비공식 접촉에는 이 사장 이외에도 김복동씨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 장치혁 고려합섬 회장, 천진환 럭키금성상사 사장등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순석 사장을 가장 신뢰했고, 정부도 이 사장을 통한 메시지 전달이 가장 정확하고 보안이 지켜졌으므로, 중요한 일은 그를 의존했다. 이 사장은 북경아시안게임이 열린 199010월을 전후해서 중국우호연락회의 전기운(田紀雲) 부총리와 수차례 접촉, 경제교류부터 우선하자는 중국측 입장과 외교적 관계를 희망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양측에 전달했다. 박철언 의원도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 고위층과 막후 접촉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북경과 서울에 각각 무역대표부가 교환, 설치됐다. 당시 정부는 소련보다 중국과의 관계 진전이 먼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중국측이 그동안 민간 기업인의 중국방문은 허용하면서 정부 관리의 방문에는 난색을 표명했다.

정부는 더 이상 중국과의 수교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우고 정부 차원의 교섭제의를 사실상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19911월 북경에 무역사무소를 이미 개설, 수교의 전단계에 와 있었고, 민간 차원의 협력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므로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199111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 총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미 수교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 대통령은 첸 부장에게 관계개선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첸 부장은 시간이 지나면 될 것입니다라면서 중국측 방침이 바뀌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924. 첸지천 부장은 북경 ESCAP(아태경제사회이사회) 총회에 참석한 이상옥 외무부 장관에게 비밀리에 수교화딤을 정식 제의해왔다. 비밀 수교회담을 제의받은 이 장관은 이를 북경에서 청와대로 즉시 보고했고, 귀국과 동시에 수교교섭을 위한 예비회담 대표단이 구성됐다.

수교교섭은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총괄했고, 대표는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가 맡고 청와대 비서실과 외무부·안기부 관계자로 대표단이 구성됐다.

서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구두로 사표를 냈고, 와병으로 집에서 요양을 하거나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인사발령을 내는등의 방법으로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 첸지천(錢基琛) 외교부장이 북경시내 조어대에서 양국 외교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교환하고 있다. /mbc 캡쳐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 첸지천(錢基琛) 외교부장이 북경시내 조어대에서 양국 외교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교환하고 있다. /mbc 캡쳐

 

1992514일과 15일 북경의 조어대에서 한중수교를 위한 첫 번째 회담이 개최됐다. 회담에서 중국측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모든 나라에 예외없이 적용된 원칙인 하나의 중국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즉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우리측은 대만은 오랜 우방이라며 중국측도 북한과 단교하라고 했으나 중국측은 고집스럽게 원칙을 고수했다.

수교 교섭의 진척 상황은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을 통해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됐다. 우리측은 서두르지 않겠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수교 날짜와 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되자 공식발표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수교를 위한 가서명이 이뤄진 뒤 김 수석은 비밀리에 워싱턴에 날아가 스코크로프트 백악관 보좌관에 진전사항을 설명했다. 스코크로프트는 부시 대통령에게 한중수교가 임박했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만과의 정리였다. 때마침 공교롭게 매년 열리는 한·대만 연례각료회의가 계속 미뤄지다가 수교발표 직전인 819일로 날짜가 잡혔다. 수교회담 사실을 모르던 경제부처쪽에서 대만측과 협의, 날짜를 결정한 것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외무부는 고심 끝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대만 연례각료회의를 연기한다고 대만측에 통보, 회의를 연기했다.

수교발표 1주일 전인 818일 이상옥 외무장관은 주한 대만대사를 불러 한중수교가 곧 이뤄질 것 같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나 수교날짜가 잡혔다는 이야기는 차마 못했다.

그러자 대만측이 이 사실을 대만 언론에 알리면서 결국 외신을 타고 말았다. 외무부는 외신 보도를 부인했다. 이 외무장관은 화가 나서 한중수교 날짜를 대만측에 통보하자 대만 언론들은 한국이 중국에 20억 달러의 차관을 수교 조건으로 제공할 것이라고 보도하는 한편 감정적인 보복기사를 게재했다. 대만측은 중국이 수교발표 시까지 언론보도를 통제할 것을 외교원칙으로 하고 있는 점을 감안, 수교에 제동을 걸어보겠다는 시도였다는 게 한국측 분석이었다.

대만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당시 대만 언론에서 흘러나온 20억 달러의 차관설에 대해 당사자들은 외교관의 양심을 걸고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차관이 중국에 제공됐다는 증거가 없었다. 이 설은 대만과 대만 언론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821일 이상옥 외무장관은 기자들을 불러놓고 점심식사 겸 간담회를 개최하면서 공식발표 때까지 보도 자제를 전제로 수교합의를 공식으로 밝혔다.

한중수교로 또 하나의 고민거리는 서울 명동에 위치한 대만대사관 건물과 부지 처리 문제였다. 도심의 알짜배기 땅 3,000여 평의 당시 시가가 3,000억원에 이르렀고, 국제관계상 단교한 대만의 재산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대만측이 한중 수교 이전에 명동 대사관 건물을 처분하려고 살 사람을 찾기도 했으나, 워낙 거액이어서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 화교들이 영원한 중국재산을 한국법에 따라 한국측에 넘겨서야 되겠느냐며 반대도 했다. 그래서 대만측은 대사관 열쇠를 순순히 중국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927일 하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북경공항. 노태우 대통령은 태극기와 오성홍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인파들의 영접을 받으며 우리나라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방문하는 감회를 느꼈다. 노 대통령은 양상쿤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장쩌민(江澤民) 공산당 총서기, 리펑(李鵬) 총리와도 만났다. 인민대회장에 휘날리는 태극기 물결을 지나 천안문 광장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노 대통령 내외는 만리장성을 올랐다.

노 대통령은 열흘전 이른바 ‘9·18 선언을 통해 민자당 당적을 포기한 상태였다. 홀가분한 대통령은 그의 치적 중의 하나인 북방외교의 대미를 장식했다는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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