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의 북방외교④…남북 비밀접촉
노태우의 북방외교④…남북 비밀접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25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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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밀사가 헬기 참사 당할 뻔…김일성에게 정상회담 촉구했으나 불발

 

1989년 가을에 한시해 등 북측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서울에 왔다.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우리측 대표단이 백두산을 다녀오고 난 직후였다.

북측 밀사들이 성남비행장에서 공군기를 이용, 제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헬기가 백록담이 멀지 않은 한라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잔뜩 흐려졌다.

북측 대표단과 우리측 요원들이 천막 속에 점심식사를 마칠 즈음 강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고 철수를 서둘러야 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고 강풍이 몰아치자, 되돌아간 헬기를 불렀으나 조종사는 땅에 내려앉기를 주저했다. 조종사는 여러차례 착륙을 시도하다가 어쩔수 없이 헬기를 되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육지에 있던 우리측 관계자들은 무전연락을 통해 무조건 착륙하라고 했다. 조종사는 위험한 착륙을 시도해 일행을 태우고 떠올랐으나 헬기는 어디가 땅인지 하늘인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하지만 북한에서 온 밀사가 잘못되는 날이면 무슨 말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남측이 북측 인사를 억류한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며, 간신히 연 비밀창구마저 막혀버릴 것은 불 보듯 명확한 실정이었다. 이들의 안전문제가 손님을 접대하는 우리측 요원들로선 가슴 서늘한 한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88 라인이라고 불린 남북간 비밀대화 창구를 통해 북한과의 비밀창구를 개설해 놓고 있었다. 이 때 접근한 우리측 정보 기관들은 숱한 막후 고생을 해가며 남북대화의 길을 트는데 기여를 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안기부 특보로 있던 박철언씨를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에는 평양과 연결하는 직통전화를 가설했다. 박씨가 안기부 특보로 근무할 때 사용하던 남북 직통 핫라인을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임명되면서 청와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남북 핫라인은 1985년부터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박철언 특보가 남북한 접촉을 위해 사용해 오던 것이었다.

핫라인은 박 보좌관과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 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적접 연락이 닿도록 되어 있었다.

비밀전화 접촉을 통해 19891월 제3국인 싱가포르에서 박철언 보좌관과 한시해 부부장이 만나 남북간 통일방안에 관해 협의했고, 그해 6월에는 박철언 보좌관등 청와대 관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허담 조평통 위원장등과 향후 남북대화 전반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 핫라인은 서울올림픽 때에는 평양의 올림픽 방해 공작을 차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6공화국 기간 남북한 비밀접촉은 40여 차례 이뤄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9096일 노태우 대통령이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를 분단 45년만에 공식적으로 만나게 된 것도 남북간 비밀접촉 대화를 통한 고위급 회담의 진전 때문이었다. 남북간 공식대화는 이면의 비공식 대화 채널을 통해 대화의 수준과 내용을 조정한 다음 6개월 내지 1년 뒤에 가시화돼서 나타났던 것이다.

비밀접촉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1989년말 청와대 정책보좌관실에서는 북한이 판문점을 통해 보내온 북한산 룡성 맥주와 황주산 사과등 선물을 놓고 송년 파티를 하면서 피로를 씻기도 했다. 이러한 남북간 비밀대화는 1991년초까지 이어졌으나, 박 보좌관이 청와대를 떠난 뒤에는 물밑 대화도 뜸해지기 시작했고, 비밀창구를 통해 쌓았던 인간 관계도 소원해졌다. 따라서 비공식적인 대화의 조정기능도 어느 틈엔가 끊어져 버렸다.

 

88 서울올림픽 성화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추진되었다. /사진=위키피디아
88 서울올림픽 성화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추진되었다. /사진=위키피디아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은 88 올림픽이 끝난후 유엔총회 연설에서 나타났다. 노 대통령은 유엔연설에서 북한을 일방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대결의 시대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이를 위해 북한의 발전을 돕겠다고 밝혔고, 이 연설은 북한과 관계 깊은 사회주의권에 깊은 영향을 줬다.

처음에는 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선언을 선전으로만 해석하던 북한측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측 진심을 이해하게 됐고, 남북대화에 임하는 태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남북대화도 잦아지게 됐다.

정부의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와 민주화의 진전, 경제적 성취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은 남북관계를 종전의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 자세로 전환시켰고, 동유럽 개혁등 동서화해 분위기도 남북관계의 변화에 기여했다.

노 대통령은 남북 문제의 가장 빠른 해결방법은 남북 최고당국자가 만나는 것임을 강조해왔고, 공식적인 연설이나 비공식 비밀접촉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촉구했다.

박철언씨는 북한의 외교실세인 허담과 교대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협의하기도 했다.

199096일 청와대를 찾은 연형묵 정무원 총리를 맞아 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 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연총리, 김일성 주석에게 전해주시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정상회담을 하든 안하든 손해볼 것이 없어요. 김 주석은 나보다 20살이나 많고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 아니겠소. 김 주석은 6·25를 일으킨 전범자로 남아 있는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상회담을 한번 못하고 죽게 되면 그는 영영 역사에 낙인이 찍히고 말 것이 아니겠소.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남북통일을 위해 뭔가 노력한다면 그나마 역사에 새로이 기억될수 있지 않겠소. 그럼에도 정상회담을 하기 싫다면 그만두라고 하시오.”

노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남북 고위급 회담의 진전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가장 역저멩 둔 것은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정상회담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면 노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최대치적의 하나로 자부하던 북방 정책을 정리해보자.

북방정책의 시발점은 서울올림픽이었다. 1986년까지만 해도 북한의 공작으로 서울올림픽 개최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북한의 입김으로 소련과 동구권이 올림픽 서울 개최를 반대했고, 심지어 1984년에는 미국 상원도 서울올림픽 개최는 한반도의 불안정성 때문에 개최지를 변경해야 한다고 의결할 정도였다.

대회장소를 뉴욕으로 바꾸느냐, 다시 LA로 하느냐로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집행위원회 회의가 열리는등 서울올림픽 개최가 유동적인 상황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무렵 당시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친북한 노선의 동구권에 대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당초 계획대로 서울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나라가 헝가리였다. 이에 정부는 헝가리에 올림픽 시설공사를 주선하는 등 달래가면서 헝가리를 통해 동구권 국가들의 분위기를 돌려놓게 했다.

이 것이 인연이 되어 한반도에 전쟁의 불씨를 끄고 평화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노대통령은 미수교국가 중에서 헝가리를 제일 먼저 떠올렸고,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부다페스트에 파견했다.

노 대통령이 외무부를 제쳐두고 청와대 참모를 파견한 것은 공식 외교경로로는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 보좌관은 끈질긴 면이 있었다. 카롤리 그로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과 면담이 이뤄지지 않아 고생을 했지만 노 대통령이 옛날의 친분을 통해 박 보좌관을 도와주고 박 보좌관이 물고 늘어져 성사될 수 있었다. 헝가리는 동구권 국가 중에서 서울올림픽 참가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때마침 동유럽의 개혁바람을 타고 북방정책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북방정책은 박씨와 그의 뒤를 이은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을 중심으로 밀실에서 결정, 추진됐고, 범정부적으로 합의 아래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이 문제를 놓고 고위대책회의를 가졌는데 아직은 위험 부담이 크지 않느냐는 부정적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외무부는 뒷전이었고 경제부처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자료나 챙겨주는 정도였다.

이같은 구도는 박씨가 19897월 정무장관으로 임명돼 청와대를 떠나고 소련과의 수교에 김종인 경제수석이 전면에 나서면서 조금씩 깨지고 경제부처가 간여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수교나 유엔 가입등은 외무부가 중심이 됐지만 한참 지난 뒤의 일이다. 북방정책의 최종 목표는 노 대통령이 스스로 밝히듯 임기중 남북통일의 성사였다. 이를 위해 단기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서두르다보니 흥정을 하게 됐고 이는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졌다.

그 부담은 차관제공으로 나타났다. 첫 성과인 헝가리와의 수교도 4~5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전재로 한 선경협-후수교였고, 소련, 폴란드, 유고등도 마찬가지였다. 경제부처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청와대는 실리 차원에서 북방 국가와 수교를 하자며 차관 지원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경제부처에 대해 판단은 우리가 한다. 당신들은 우리 능력으로 어느 정도까지 지출할수 있는지만 검토해달라고 지시조로 내려왔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추진됐던 6공화국의 북방정책은 한소, 한중 수교와 동구권 공산국과의 외교관계 개선 등 큰 성과는 얻어냈지만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최종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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