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①…개국왕조 박씨
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①…개국왕조 박씨
  • 아틀라스
  • 승인 2019.04.1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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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석탈해에게 왕권 내주었다가 김씨와 손잡고 8대 아달라까지

 

신라는 초기에 박(), (), ()3개 족단이 서로 왕을 내며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박씨가, 그 다음엔 석씨가 왕을 냈고, 그리고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가 이어졌다. 초기 박··3성은 서로 협력 및 경쟁관계를 왕권 다툼을 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가장 먼저 왕권을 잡은 것은 박씨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박씨였다. 박씨 왕조는 남해를 거쳐 유리까지 3대를 이어가다가 4대에 석씨인 탈해에게 왕권(이사금)을 넘겨줬지만, 5대 파사에 이어, 지마(6), 일성(7), 아달라(8)까지 지배권을 이어갔다.

석씨는 4대 탈해가 왕권을 차지한뒤 5대부터 박씨에게 넘겨주고, 9대 벌휴에서 다시 왕권을 되찾아 내해, 조분, 점해를 거쳐 13대 미추에서 김씨에게 넘겨준다. 다시 14대 유례에서 석씨가 집권에 성공해 16대 흘해까지 간다.

김씨 왕조는 4대 탈해때 시조 김알지의 설화가 나온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후 13대 미추이사금을 한번 내고, 17대 내물이사를 금을 등극시키며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경주시 탑동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다. /문화재청
경주시 탑동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다. /문화재청

 

가장 먼저 경주를 장악한 족단은 박씨 집단이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남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라벌 여섯고을 사람들이 알에서 나온 박씨를 거서간으로 모시고 신라의 시조로 삼는 설화 내용이다. 박씨 집단은 여섯 고을을 지휘하며 건국초기 신라를 이끌어가는데, 혁거세 시기에 석씨 집단의 수장인 탈해가 바닷가로 들어온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탈해가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싸우다가 져서 신라로 도망을 치는 장면이 나오고, 삼국사기에서도 탈해가 금관국을 거쳐 신라 해변에 도착했다는 설화를 실었다.

 

(수로왕)이 탈해가 머물면서 난리를 꾀할까 걱정이 되어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어 뒤쫓도록 했다. 하지만 탈해는 계림의 땅 안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수군들은 모두 그대로 돌아왔다. (삼국유사)

“(탈해와 보물을 실은 궤짝이)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두 사서를 연결해 해석하자면, 해상세력인 석씨 집단이 금관가야와 싸우다가 밀려 신라 해안인 아진포로 들어와 박씨가 이끄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박씨 집단과 석씨 집단의 연대가 이뤄진 것이다. 금관국은 두 세력의 결합이 두려워 더 이상 탈해에 대한 추격을 멈추었다는 내용이다.

혁거세를 이은 남해는 탈해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최고관직인 대보 자리도 준다. 남해가 죽고 박씨와 석씨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박씨가 우세했던 것 같다.

 

남해(南解)가 돌아갔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지만, 대보(大輔) 탈해(脫解)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에게 왕위를 사양했다. 이에 탈해는 임금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라며 떡을 깨물어 나이를 재보자고 했다. 유리의 잇자국이 많았으므로 신하들이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떡을 깨물어 잇자국이 많은 사람이 왕권을 차지한다고? 두 세력이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힘이 센(잇자국이 많은) 박씨 집단의 족장 유리가 권력을 차지했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유리가 죽기 앞서 더 이상 석씨 세력을 누를수 없다고 보고 탈해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탈해 때 김씨 집단이 경주에 들어오니, 김알지 신화다.

 

경주 오릉. 삼국사기에는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경주 오릉. 삼국사기에는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석씨 족단은 탈해 한 대를 넘기고 박씨에게 왕권을 내주는데, 5대 파사가 박씨다. 파사는 탈해때 들어온 김알지의 세력 즉, 김씨 세력과 연대해 왕권을 되찾는다.

 

탈해가 돌아가셨을 때, 신하들은 유리의 태자 일성(逸聖)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맏아들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 미치지 못하다.”고 해서,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꼈고, 백성을 사랑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위엄있고, 현명하며, 절약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맏아들을 제치고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까. 비밀은 일성과 파사의 부인에게 있다.

 

파사의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으로, 갈문왕 허루(許婁)의 딸이다.

일성의 왕비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의 왕비는 김씨고, 일성의 부인은 박씨다. 삼국사기파사이사금조에 박씨들이 유리의 맏아들인 일성을 임금으로 내세우려 하자, 김씨 세력의 누군가(或者)’가 반대하고 둘째인 파사를 밀었고, 파사는 김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형을 제치고 임금이 됐던 것이다.

박씨가 다시 왕권을 되찾은 것은 김씨의 세력과 연합해 석씨를 밀어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파사의 큰아들인 지마도 어머니 사성부인과 왕비 애례부인(愛禮夫人)이 모두 김씨였기에 김씨 세력의 지원으로 무탈하게 왕위를 이었다. -김씨 연대 세력이 두 대에 걸쳐 박씨 임금을 낸 것이다.

 

하지만 파사에게 밀렸던 일성은 조카인 지마가 죽은후 임금이 된다. 일성의 부인은 앞에서 보았듯이 박씨. 일성은 박씨 정통파를 이끌고 절치부심 끝에 임금이 된 것이다.

이때 박씨 집단 내에 내분이 발생한 흔적이 보인다. 동생과 조카에게 왕권을 내줬던 일성은 김씨 세력과 연대한 파사-지마의 박씨 세력을 물리치고 왕권을 차지할 정도로 박씨 세력의 힘이 켜졌다고 볼수 있다.

그 기세는 일성의 맏아들인 아달라까지 내려간다. 아달라의 왕비도 박씨다. 김씨 세력은 일성-아달라 시기에 권력에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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