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시절①…대전 엑스포 유치작전
노태우 시절①…대전 엑스포 유치작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0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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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개최” 졸속 발표, 준비 부족에 93년으로 연기…국제승인 올림픽 방불

 

1989년말의 어느날, 상공부와 외무부에서 서기관 2, 사무관 2명 등 모두 4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대한항공과 브리티시 에어라인을 갈아타며 영국 북부의 글래스고에 도착했다. 이들의 목적은 국제무역박람회기구(BIE) 사무총장인 테드 앨런씨에게 대전엑스포에 대한 국제공인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물어물어 테더 엘런 사무총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절단은 다짜고짜 대전엑스포 개최를 위한 BIE의 공인이 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테드 앨런 사무총장은 대전엑스포에 대한 공인은 BIE의 규칙에 어긋난다며 부정적인 대답으로 일관했다.

대전엑스포 개최를 관장하고 있던 상공부는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BIE의 공인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누구를 만나 로비를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박람회 개최 계획이 졸속으로 기획된데다 국제정보와 국제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의 비서부장과 포철의 뉴욕사무소장을 역임한 송기오씨의 보고서가 도움이 됐다. 그 보고서를 들춰가며 상공부는 BIE의 공인을 받기 위한 로비활동에 들어갔다.

 

BIE의 공인을 받기 위해 첫 번째 과제는 테드 앨런 BIE 사무총장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BIE는 이미 2년전인 19876월 총회에서 1993~2001년 간에 모든 종류의 박람회를 2회만 개최하고, 박람회 개최 희망국은 18881120일가지 신청해야 한다고 확정해 놓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대전박람회 신청은 BIE 총회의 결정을 뒤집고 박람회 1회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글래스고까지 찾아가서 그냥 돌아올수는 없었다. 시간당 100달러의 인터뷰 요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을 앞세워 사무총장과의 설득 시간을 최대한 늘렸다. 시간이 차츰 지날수록 사무총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원래는 안 되는 것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우리측 사절단은 사무총장에게 한국에 초청할 것이며, 방한시 노태우 대통령을 접견할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슬쩍 말을 꺼냈다.

그 방법이란 2001년까지 예정된 2회의 박람회는 종합박람회이고, 전문박람회는 회원국의 동의만 얻으면 공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85BIE 결의를 깨고 불가리아가 플로브디브 전문박람회에 대한 공인을 받은 전례가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이처럼 정부의 엑시포에 관한 국제관행도 모른채 급작스럽게 대전엑스포를 추진하게 된 것은 노 대통령의 지시에서 비롯된다.

88올림픽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뒤 어느날, 노 대통령은 한승주 상공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1991년까지 국제무역박람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하도록 해보시오.”

노 대통령으로선 서울올림픽으로 결집된 국민적 화합 분위기가 국민 역량을 국제박람회 개최를 통해 경제·문화 선진화의 에너지로 응집시키려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명분을 들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한 장관에게 무역박람회 개최를 지시할때는 이러한 명분도 있었지만, 올림픽을 유치한 전임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경쟁심에서 비롯됐다는 게 당시 상공부 실무자들의 느낌이다.

이 무렵 대통령은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올린 엑스포 개최에 관한 건의를 보아둔 터였다. 일본통인 박 회장은 일본의 경우 1964년 동경올림픽에 이어 1970년 오사카 국제박람회와 1985뇬 쓰쿠바 국제박람회를 개최, 올림픽으로 일어난 상승무드를 산업발전으로 접목시켜 사회를 선진화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상공부는 엑스포 개최 후보지에 대한 입지 물색에 들어갔다. 후보지 물망에 오른 곳은 대전 대덕지구 경기도 안양평촌 지구 광주시 외곽지역 경기도 과천경마장 옆 부지등 4. 그중 엑스포 유치에 가장 적극적인 지역은 대전시였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자신의 지역기반을 의식, 엑스포 유치에 발 벗고 나섰고 대전시가 엑스포 유치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나왔다. 입지도 대덕연구단지가 인근에 있어 대전이 후보지 4곳중 가장 적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엑스포 과학 공원에서 이어지는 다리 /위키피디아
엑스포 과학 공원에서 이어지는 다리 /위키피디아

 

입지가 선정되자 1989210일 노 대통령은 연두 지방순시차 첫방문지인 대전에 들러 1991년 무역박람회의 대전 개최를 공식 발표했다.

이어 324일 서울 삼성동의 한국종합전시장(KOEX)에서는 국제무역산업박람회의 조직위원회가 현판식을 갖고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위원장에 나웅배 전 부총리, 상근부위원장겸 사무총장에 허남훈 전 상공부 차관, 비상근 위원장에 오명 전 체신부 장관, 이선기 무역진흥공사 사장등 전직 각료급으로 스태프가 구성됐다.

그러나 예산이 문제였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정한 엑스포 예산은 450억원에 불과했다. 집행부처인 상공부는 예산내역의 인쇄가 잘못돼 ‘0’이 하나 빠진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으나, 경기도 불투명한데 그 돈으로 개최하라는 게 예산당국의 고집스런 입장이었다.

어쨌든 상공부는 무역진흥공사 직원 몇 명과 함께 팀을 구성하고 엑스포 프로젝트의 윤곽을 잡아 나갔다. 태스크포스 팀이 석달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먹고 자고 하는데 드는 운영비만 해도 3,000만원이 들었다. 예산이 집행되기를 기다리지 못해 무역공사에서 차출된 멤버가 개인 대출로 돈을 빌려 우선 써야 했을 정도였다.

태스크포스 팀은 예산규모를 3,000여 억원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기획원은 이 돈을 전액 정부 예산으로 충당할수 없으니 기업에 분담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상공부가 하는수 없이 엑스포의 개최를 위해 재벌그룹당 100억원을 내라고 하자 기업들이 즉각 반발했다. 재벌기업들은 대전엑스포가 명실상부한 국제박람회가 되려면 국제박람회기구(BIE)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도 정부가 일방적으로 엑스포 개최를 결정해 공인을 받을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BIE 공인이 없으면 국가관 설치를 할수 없고 기업관을 유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업의 부담만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재벌그룹들은 이러한 의견을 모아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대전엑스포를 1993년으로 2년간 연기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문 수석은 1991년 개최를 밀어붙였다. 상공부의 실무 국·과장도 문 수석을 찾아가 연기를 건의했다.

안팎으로 연기 주장에 시달리던 청와대는 그해 830일 강영훈 국무총리를 통해 대전국제박람회 개최를 1993년으로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116일에는 나웅배 조직위원장이 서울 국회의원 보궐선거(영등포을)에 여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자,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이 청와대의 낙점을 받아 조직위원장에 임명됐다.

 

대전엑스포 과학공원 /대전마케팅공사
대전엑스포 과학공원 /대전마케팅공사

 

해를 넘겨 1990614일 상공부와 엑스포 조직위는 파리에서 열릴 예정인 BIE 총회의 공인을 얻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에 들어갔다. 43개 회원국 대표단에 대한 득표활동은 10년전 올림픽 유치활동을 방불케 했다.

19905월 중순 외무부 본부대사 2명이 파리회의에서 찬성표를 얻기 위해 호주와 일본·영국·벨기에·덴마크를 순회했다. 곧이어 임인택 상공부 차관, 김철수 특허청장, 김태준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전계묵 공업시험위원장 등이 지역별로 나눠 회원국을 순방했다.

오명 조직위원장은 4월말 남미 국가를 순회한데 이어 5월 프랑스와 북유럽을 순방했고, 상공부 장관에서 물러난 한승수 의원도 조직위 고문 자격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였다. 나웅배 전 조직위원장과 이진기 무역공사 사장은 소련과 동구 국가들을 방문해 찬성표를 부탁했다.

재계에서는 포항제철과 현대자동차·삼성전자·한전 등 민간기업과 공기업을 총동원해 거래선을 통해 해당국가 정부에 찬성 투표 압력을 넣도록 업체 별로 전담국가를 정해 뛰었다. 서울에 나와 있는 국제박람회 회원국 대사들은 한두번 이상 상공부 장관이나 조직위원회의 오찬 또는 만찬 초대를 받았을 정도다.

그러나 미국과 오스트리아, 쿠바가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은 BIE 규정을 들었고, 오스트리아는 1995년 박람회 신청을 냈기 때문에 각각 반대했다. 조직위는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미국과 쿠바를 제처두고 오스트리아를 설득해보기로 했다. 포철의 박태준 회장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해 설득에 나섰다.

당시 이 일을 추진한 포철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포항제철은 오스트리아의 페스트 알피네라는 철강회사로부터 전로 6기를 구매했고, 최신설비인 코렉스 제철법도 도입키로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대구매자인 포철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박태준 회장이 직접 나서 동의를 요청하자 페스트 알피네사가 정부에 한국 지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1990614일 파리에서 열린 BIE 총회에서 회원국 43개 중 투표에 참가한 38개국 전체의 찬성표를 얻어 1993년 개발도상국으로는 처음으로 대전엑스포가 한국에서 열렸다.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 한빛탑 /위키피디아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 한빛탑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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