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 개혁 좌절시킨 서태후…기로에 선 淸 운명
무술 개혁 좌절시킨 서태후…기로에 선 淸 운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02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태후, 3대에 걸친 권력의 화신…무술변법운동 무산시키고 의화단 난 지지

 

1861년 신유정변(辛酉政變)으로 권력을 잡은 서태후(西太后)는 공친왕(恭親王)과 함께 내란을 제압하고 자강운동을 벌여 극도로 혼란한 국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눌수 없는 법. 어린 동치제(同治帝)를 수렴청정하고 있던 서태후는 또다른 황족 섭정자 공친왕의 기세를 꺾고야 말았다.

공친왕은 총명하고 외국 대사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오만했다. 그의 오만은 서태후의 심기를 건드렸다. 1865년 공친왕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서태후는 이를 공친왕을 제거하는 기회로 판단했다.

서태후는 뇌물죄, 정실인사, 권력탈취, 당파 조성, 전횡 등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워 공친왕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황실 집안 싸움에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서태후의 편에 서지 않은데다 황족들이 수습에 나서는 바람에 공친왕은 간신히 숙청의 위기를 피했다. 공친왕은 군기대신의 직위는 유지했지만 의정왕(議政王)의 직함은 잃게 되어 도도했던 그의 기세가 꺾이게 된다. 1869년 공친왕은 서태후의 수족과도 환관 안덕해(安德海)가 환관의 규율을 어기고 수도 베이징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처형하자 서태후는 공친왕을 더욱 멀리하게 된다.

 

1872년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성년(17)이 되어 황후를 얻게 되었다. 동치제는 잔소리만 하는 생모 서태후(자희)보다 자상한 동태후(자안)를 더 따랐다. 황후 선택에서도 동치제는 서태후가 천거한 여자를 멀리하고 동태후가 천거한 여자를 맞았다. 황후는 청나라 귀족출신이었고, 교육도 많이 받은 반듯한 여성이었다. 서태후는 마지못해 황후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천거한 여성을 동치제의 후궁으로 들이게 했다.

이제 서태후는 며느리에 대한 질투 본색이 들어났다. 어머니는 아들 황제에게 황후와 잠자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후궁의 처소로 가라고 종용했다. 동치제는 잠자리까지 간섭하는 어머니가 싫어 두 여자를 모두 멀리하고 친구들과 베이징 거리의 기생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동치제가 1873년 친정에 나서자 서태후는 잠시 뒷방에 머무는 듯했다. 하지만 동치제가 몹쓸 병에 걸리자 이를 기화로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일찍 죽도록 온갖 비법을 썼다고 한다.

 

서태후 사진 /위키피디아
서태후 사진 /위키피디아

 

1875112일 동치제가 1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제 누가 황제가 되느냐는 만주족 황위승계서열에 따라야 했다. 이때 동치제의 황후는 임신 중이었다. 공친왕 등 일부 황족들은 황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후임 황제 선택을 미루자고 했다. 서태후는 그런 요구를 무시했다. 만일 동치제의 아들이 태어나면, 만주황실의 예법에 따라 보기도 싫은 황후가 섭정이 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야 했다. 또 성년이 된 황족을 황제에 올리면 자신은 섭정을 할수 없게 된다. 서태후는 자신의 섭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의 후임자를 선택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낸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이었다. 나이는 네 살. 서태후는 이 아이를 황제로 올리면 적어도 10년 이상 섭정자리를 유지할수 있다. 서태후는 이 어린아이를 함풍제(咸豊帝)의 양자로 입적시켜 제위를 물려주었으니,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 이어 서태후는 눈에 가시였던 동치제의 황후를 자결하도록 명했다.

 

광서제 /위키피디아
광서제 /위키피디아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주눅이 들어 기도 펴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엄격히 교육시키고,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했다. 광서제가 학문을 배울 때에는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으며, 수업을 마친 광서제는 서태후 앞에서 그날 공부한 내용을 암기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결혼에 간섭해 자신의 조카를 황후로 간택하고, 후궁 근비와 진비도 직접 골랐다.

1881년 동태후로 불린 또다른 섭정자 자안태후가 사망했는데, 그녀는 서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1884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청군이 무참하게 패배하자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책임을 지워 정계에서 완전히 떠나게 했다. 이제 서태후를 간섭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서태후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간 것이다. 1886년에 광서제는 16세가 되면서 친정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순친왕은 서태후가 호락호락 권력을 넘겨줄 것으로 보지 않고 아들 황제에게 친정을 2년 늦추라고 건의했다.

광서제는 당초계획보다 2년 늦은 1889년에 친정을 하게 되었고, 서태후는 새로 지은 이화원(颐和園)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겉으론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태후는 옥새를 쥐고 자신의 심복을 군기대신에 앉혀 실권을 행사했다.

 

청나라는 1894~1895년 미개한 나라로 깔보았던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다. 일각에선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기 위해 1천 양의 거금을 해군예산에 빼돌렸기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패했다고 주장한다. 청나라는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조선소가 파괴되었고, 1888년 이후 새로운 선박을 구입할 여력이 부족했다. 청일 전쟁에서 청의 해군이 패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광서제는 1898년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의 무술변볍(戊戌變法) 운동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 이화원에서 황제의 동태를 지켜보던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광서제를 궁궐의 한 섬에 유폐시키고 개혁조치를 무산시켰다. 100일만에 개혁조치를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한 사건을 무술정변이라 한다.

무술정변 때 등장하는 인물이 위안스카이(袁世凱). 광서제는 서태후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 군부 실력자였던 원세개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배신했다. 그는 광서제의 음모를 서태후의 충복 영록(榮祿)에게 알려 줬고, 음모를 알게 된 서태후는 변볍운동에 나선 모든 지식인을 잡아들였다. 캉유웨이는 해외로 망명해 목숨은 건졌지만, 다른 개혁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쿠데타로 서태후는 수렴()을 걷고 직접 통치하게 된다.

 

의화단 사건 /위키피디아
의화단 사건 /위키피디아

 

다시 실권을 쥔 서태후는 반외세를 부르짓는 비밀결사운동인 의화단(義和團)을 끌어들인다. 이 집단은 종교적 비밀결사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반제국주의를 주창했다. 의화단은 1899년 산동 서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서태후는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영국··독일·프랑스 등 8개국 연합군에게 베이징을 진격해오자 서태후는 시안(西安)으로 피신했다. 의화단의 난이 진압되고 19019월 청 조정은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굴욕적 조항이 포함된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에 돌아온 서태후의 그후 모습은 딴판이었다. 서양식 개혁에 반대해온 그녀는 입헌주의를 받아들이고, 실업(實業)을 장려하며, 교육을 진흥시키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해 서양 열강과 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청말기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것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청말기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것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의화단의 난 직후 서태후는 70줄에 들어섰고, 노쇠해졌다.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서태후는 너무 많은 음식을 먹어 이질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의 노욕은 그 나이에도 그칠줄 몰랐다. 19081114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배후에 서태후가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다음날인 19081115일 서태후는 73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이별했다.

서태후는 죽기 이틀전에 한때 애인으로 알려졌던 영록의 딸 유란(幼蘭)과 광서제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푸이(溥儀)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청 황실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청 황실은 서태후가 죽은지 3년후인 191110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인해 마감한다. 서태후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서태후(1835~1908)는 청나라 말기에 중국을 통치한 사실상의 여제(女帝)였다. 한편에선 그녀 를 악녀의 화신으로 저주하기도 하지만, 또다른 반대편에선 시대의 등불로 간주했다. 그녀는 한손엔 꽃을 쥐고, 다른 손엔 칼을 휘둘렀다.

 

 


<참고 목록>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p378~384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p529~564

Wikipedia, Empress Dowager Cixi

Wikipedia, Empress Xiaozheyi

Wikipedia, Guangxu Emperor

Wikipedia, Boxer Rebellio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