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②…위태로운 석씨
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②…위태로운 석씨
  • 아틀라스
  • 승인 2019.04.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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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 김씨와 연대해 박씨 세력 밀어냈다가 박씨와 손잡고 권력 장악

 

세 세력이 권력 다툼을 벌일 때 한쪽이 두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않으면, 캐스팅보트를 쥔 쪽이 어디로 붙는지에 따라 세력 판도가 달라진다. 박씨·석씨·김씨의 신라 삼두체제의 캐스팅 보트는 김씨가 쥐고 있었다. 박씨를 지지했던 김씨 세력은 이번에 석씨를 지지해 박씨를 견제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박씨 왕조는 아달라를 끝으로 석씨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아달라의 뒤를 이은 왕은 벌휴 이사금인데, 탈해의 손자이고,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석씨 세력과 김씨 세력이 연대를 형성해 박씨를 밀어낸 것이다. 김씨 세력은 독자적인 임금을 낼 힘이 없었고, 박씨와 석씨 세력중 어느 한쪽에 붙어 힘을 키워 나갔다.

석씨 벌휴 이사금때 김씨 세력의 우두머리는 구도(仇道)였다. 그는 김씨 첫 임금인 13대 미추의 아버지다. 벌휴 이사금때 구도가 군권을 장악한 듯 싶다.

 

2(185) 2,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

5(188) 2,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왔다. 파진찬 구도에게 병사를 줘 막게 했다.

6(189) 가을 7, 구도가 백제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승리해 5백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190) 가을 8,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진군해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니 백제의 병사가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가 뒤쫓아 갔다가 와산(蛙山)에 이르러 백제에게 패했다. 임금은 패장 구도를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이사금조)

 

구도는 신라 방위군의 한축을 담당하는 군주의 자리에 올라 소문국(경북 의성)을 정벌하고 백제와의 전투에 공을 세운다. 그러다가 백제에 패하는데, 벌휴 임금은 백제에 패한 구도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관직을 삭탈해 실각시킬 정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구도를 부곡 성주로 좌천시키면서 일정한 권력을 남겨놓은 것은 벌휴 임금이 김씨 세력의 힘을 제압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김씨 세력의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석씨 왕조는 김씨 세력의 연합을 통해 내해-조분-점해를 이어가다 13대에 드디어 구도의 아들 미추에게 왕권을 내준다.

미추는 석씨와 박씨 세력의 힘을 고루 얻어 임금이 된다. 삼두체제 권력 균형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조)

 

석씨의 시조 탈해는 최고관직인 대보를 하고 나서 임금이 되었는데 비해 김씨의 시조 알지는 대보에 그치고 임금이 되지 못해 대조를 이룬다.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의 세대를 거쳐 미추에서 왕이 나오도록 초기 김씨 세력은 힘이 미약했고, 석씨와 박씨의 틈바구니에서 이합집산을 거쳐 드디어 임금을 냈다.

그것도 한 대에 그치고 다시 석씨에게 임금을 내준다. 김씨 세력에게 임금을 내준 석씨 세력은 이번엔 박씨와 손을 잡는다. 미추의 다음 임금인 유례는 조분왕(助賁王)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내음(奈音)의 딸이다. 석씨와 김씨 세력의 연대로 권력에서 밀려났던 박씨 세력이 이번엔 석씨와 손을 잡고 김씨 세력과 대항한 것이다. 박씨 세력이 왜소해졌지만, 석씨 세력과 손잡고 왕을 만들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씨의 세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석씨와 박씨의 연대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경주시 동천동 숭신전. 1898 경주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가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다. /문화재청
경주시 동천동 숭신전. 1898 경주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가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다. /문화재청

 

하지만 김씨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음이 유례 때 미추왕 전설이다.

 

유례 14(297) 정월,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기에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병사들이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꽂고 있었다. 우리 군대와 함께 적을 공격해 깨뜨렸으나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먼저 임금(미추왕)이 음병(陰兵, 신령한 군대)을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석씨 세력이 박씨 세력의 지원을 얻어 왕권을 되찾았지만,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이서고국이 쳐들어왔을 때 김씨 세력이 병력을 동원해 이서국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죽장릉은 미추왕릉으로 경주 황남동에 있다.)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대(竹葉軍)의 설화는 김씨들이 수도 금성이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쳐하자 구원병을 보낼 정도로 지방에 거대한 군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스토리다.

 

경주 동천동의 탈해왕릉 /문화재청
경주 동천동의 탈해왕릉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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