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침공 후 淸에 큰소리친 일본…중화체제 붕괴
대만 침공 후 淸에 큰소리친 일본…중화체제 붕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07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71년 일본, 淸과 평등조약 체결…1874년 류큐인 살해 이유로 대만 침공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의 복권을 달성한 일본은 또다른 황제국인 청()나라에 대등한 조건의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1860년 청조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으로 서양국가들과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한지 10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유신 지도자의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중국의 조공국인 조선, 안남(베트남), 류큐(오키나와)에 앞서 청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해 일본 정부는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1870825일 텐진(天津)에 도착한 사절단은 다음날 양강총독 증국번(曾國藩)과 직례(直隸)총독 이홍장(李鴻章)을 예방했다.

 

일본은 무로마치(室町) 막부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 쇼군(재위 1368~1394)이 집권할 때 무역수입을 늘리기 위해 명()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그후 1433~1549년까지 모두 11번의 조공 사절단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다.

16세기 중엽에 왜구(倭寇)가 중국 남부를 약탈하고, 이후 막부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고 중단했다. 1644년 베이징으로 천도한 청조는 일본을 조공국으로 삼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공관계는 300년 이상 중단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뇌리에는 일본이 과거에 조공국이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청조 내부에선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찬반 양론이 엇갈렸다. 안후이(安徽) 순무 영한(英翰)은 일본이 과거 조공국이었고, 명대에 수백년동안 우리 항구를 약탈했으며, 일본과 서양식 조약을 체결하면 조선 안남 등 조공국들이 모두 그와 같은 조약을 요구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일본과의 조약체결이 중화질서의 붕괴라고 보았다. 영국·프랑스의 무력에 눌리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떼주던 그들은 아직도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증국번과 이홍장은 현실론자였고, 개방에 긍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홍장은 일본이 명조에 조공국이었지만 청조에는 아니었으므로 조선과 베트남과는 다르고, 일본이 서구 국가의 소개 없이 자발적으로 선린우호를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청은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구리()를 수입하고 일본에 상당수의 화교(華僑)가 거주하고 있다는 점도 들었다. 이홍장은 또 일본을 조약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경우 전통적인 동양권의 틀을 벗어나 서양의 세력권으로 넘어 갈 것을 우려했다.

증국번은 이홍장의 견해에 대체로 찬성하면서 다만 일본에 대해 서양국가와 같이 최혜국대우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증국번과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한인 유학자들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청조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1871913일 청일 간에 수호조규(修好條規)과 통상장정(通商章程)이 조인되었다.

청일 조약은 서양국가와의 조약과 달리 증국번의 요구대로 최혜국대우 조항이 빠져 있었다. 또 양국 상인들은 항구에서만 교역을 하고, 서로의 내지에 들어가 상품을 구입할수 없었다. 하지만 청과 일본은 대등한 관계로 동아시아 국가간에 최초의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해석 상에 애매한 점이 있었다. 수호조규 제1조에 서로의 방토(邦土)에 대해 불가침을 약속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홍장은 조선을 청의 영토로 보았고, 일본은 조공국을 중국의 영토로 보지 않았다. 이 문제는 곧이어 터지는 대만 문제에서 드러나게 된다.

 

대만 원주민 파완족 /위키피디아
대만 원주민 파완족 /위키피디아

 

187112월 오키나와 열도의 미야코섬(宮古島)에 사는 류큐(琉球) 왕국의 주민들이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했다. 그들은 대만섬 남쪽에 피항했다가 원주민인 파완(排灣)족 마을에서 전체 66명중 54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살아남은 12명은 중국계 주민에게 구조되어 이듬해인 1872년에 송환되었다.

 

18734월 일본 외무대신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는 청일 조약 비준서를 들고 텐진항에 입항했다. 그와 사절단의 이동에 일본 군함 두척이 수행했다. 57일 소에지마는 동치제(同治帝)를 알현하는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거부했다. 일본국이 청국의 조공국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황제 알현을 끝내고 그는 대만 사건을 거론했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의 화친 및 개항 요구에 류큐가 독립국이라던 일본이 이번 사건에서는 자국의 속국으로 주장했다. 소에지마는 일본국에 속하는 류큐 번민(藩民)을 살해한 대만 원주민을 징벌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청은 지금까지 류큐가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그 대가로 하사품을 내려왔는데, 갑자가 일본의 번()이라는 소에지마의 주장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 시절인 1372년부터 중국에 조공해 왔다. 1609년 사쓰마(薩摩) 번이 도쿠가와 막부의 명을 받아 류큐를 침공해 속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청과의 교역을 위해 겉으로는 류큐가 청에 조공하도록 하면서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류큐는 중국을 아버지로, 일본을 어머니로 모시는 이중속국 상태였다. 류큐는 중국 익시가 오면 중국 역법을 사용하고, 일본과 교섭할 때엔 일본 역법을 사용했다. 청의 칙사가 마지막으로 류큐에 간 것은 1866년이었다. 사쓰마 번은 이 때 류큐 조정에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도록 했기 때문에 청은 공식적으로 사쓰마의 지배를 모르고 있었다.

류큐의 조공국 여부에 대해 서로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자 논쟁의 주제가 대만에 대한 주권의 실효성으로 넘어갔다. 청조는 대만을 통치하지만 원주민들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 사건에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소에지마는 영토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하지 않았으므로 청이 원주민에 대해 주권이 없다고 맞받아 쳤다. 소에지마는 대만사태에 대해 아무런 합의점을 얻지 못하고 귀국했다.

 

1874년 대만 원정에 참여한 일본 류조호 /위키피디아
1874년 대만 원정에 참여한 일본 류조호 /위키피디아

 

일본은 곧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300명의 사쓰마 사무라이를 포함해 36백명의 대만 이 편성되었다. 총사령관에는 유신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西郷従道)가 임명되었다.

청조도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아편정쟁 때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의 사위인 푸젠성 선정대신(船政大臣) 심보정(沈葆楨)에게 대만 방어를 지시했다.

18745월 일본 원정대는 대만을 상륙했다. 전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이 서양기술을 도입해 국내 무기공장에서 제조된 대포는 예포로는 쓸수 있었으나 실탄을 적재하지 못했다. 실탄을 쏘면 포신이 터져 죽는 것은 적군이 아니라 아군 포병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미국 해군장교를 고용했고, 영국에서 건조된 최신식 철제증기함선 류조(龍驤) 호를 동원했다.

이홍장은 대만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손쉽게 대만을 점령했다.

 

일본군의 대만 원정 (1875년 그림) /위키피디아
일본군의 대만 원정 (1875년 그림) /위키피디아

 

18749월 내무대신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직접 베이징으로 가 협상을 벌였다. 이때 일본은 대만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으나, 뜻하지 않은 말라리아가 번져 군인들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죽은 병사는 12명에 불과한데, 말라리아로 죽은 병사가 560명이나 되었다. 더 이상 전쟁을 끌고 나갈수 없는 것은 일본이었다.

하지만 오쿠보는 프랑스 국제법학자 귀스타브 부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의 도움을 받아 청의 행정력 부재를 지적하며 대만에서 주권이 결여되어 있다고 질책했다. 그는 따라서 일본의 대만 원정이 청의 영토를 침략한 게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청은 1871년에 체결된 수호조규에 따라 상호불가침의 원칙을 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오쿠보는 청의 본토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청의 관할권 밖에 있는 대만 토착민들을 징벌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강변했다.

청도 더 이상 주장을 밀고 나갈 입장이 아니었다. 변경에서 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조공국인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단 청은 대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것과 재난을 당한 류큐 선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두 개 부락내의 원주민을 징계하는 것을 허락했다.

오쿠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한 배상을 요구했다. 청은 자국령을 침범한 나라에게 배상을 할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자 오쿠보는 점령한 지역을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겠다면서 베이징을 떠나겠다고 협박했다.

이 때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토머스 웨이드(Thomas F. Wade)가 중재에 나섰다. 일본이 처음에 요구한 5백만냥의 배상금은 50만냥으로 떨어졌다. 또 중국은 일본의 대만 침공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의 대만 침공은 보민(保民)의 의거(義擧)’로 인정받았다.

일본은 청과의 합의로 군대를 철수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인 1895년에 다시 대만을 점령해 2차세계대전이 종전한 1945년까지 50년간 지배한다.)

 

1874년 대만을 원정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1874년 대만을 원정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결과론으로 볼 때 배상금의 금액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은 대만을 침공하면서 전쟁 비용으로 배상금의 7배나 되는 360만 엔을 썼다. 또 군 수송선을 구입하는데 그만한 비용이 들었다. 일본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말라리아로 인해 막대한 병력 손실도 보면서 적자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일본의 대만 침공은 돈으로, 인명피해만으로 계산할수 없는 이득을 얻었다. 일본의 군사력이 중국을 제압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조선과 류큐 등 중국의 조공국에 대해 외교적 압력을 가할수 있게 되었다.

청국은 침범을 당한 입장에서 돈을 들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런 청의 모습은 외국으로 하여금 한층 더 침략을 하도록 가르쳐 준 것이나 다름 없다.

 

일본은 더 이상 류큐가 속령이라는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되었고, 청국도 과거의 조공국을 사실상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다. 마침내 수천년간 지속되어 온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후 메이지 정권이 1876년 조선에 함대를 보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1879년 류큐왕국을 합병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본의 대만 침공은 근대국가로서의 첫 해외 출병이었다. 이 때부터 일본은 제국주의 근성의 이빨을 보이기 시작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