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①…위정척사파와 손잡고 洋夷와 전쟁
대원군①…위정척사파와 손잡고 洋夷와 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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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 승전후 척화비 세우며 쇄국정책 강화

 

<순조실록> 32년조(1832) 721일에 충청도 해안에 어느 나라의 배인지 모르지만 이상한 모양의 배(異樣船)가 도착한 사실이 기록된다.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의 장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영길리국(英吉利國)는 영국인데, 기독교를 믿고 대청국에 조공도 않고 청국 황제에게 머리도 조아리지 않는 존재로 기록된다. 이들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올리려 했지만 지방관이 받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이 배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에머스트(Lord Amherst) 호였다.

곧이어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 호가 제주도와 거문도, 남해안 일대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조선 조정은 곧바로 청국에 외국선박의 출몰 사실을 알렸다.

18531854년에 러시아 함대가 동해안에 연달아 나타났고 1856년에 프랑스 군함이 조선 해안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1850~1860년 사이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등의 배가 모두 65회나 조선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거나 해안선을 측량하고 지방관 또는 주민과 충돌을 했다.

조선은 서양선이 나타나 교역을 요청할 때 조선은 청의 조공숙이므로 외국과 교역할 권한이 없다고 답하고, 서양배의 출몰 사실을 청에 보고하는 것으로 그쳤다. 오히려 조선 조정은 청()나라 외교담당 부서인 예부(禮部)광동(廣東)에 있는 영국인들에게 조선이 더 이상 배를 보내질 말 것을 꾸짖어 달라고 부탁했다.

 

1860년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는 중국과 조선, 일본만이 존재했다. 조선은 명·청을 거쳐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어왔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사대(事大), 일본과 교린(交隣)의 외교관계만 있을 뿐이었다. 명과 청의 교체기에 어느 나라를 사대하고 조공하느냐의 문제로 두차례 호란이 터졌지만, 그후 200년간 조선은 평화기에 젖어 있었다. 좋든 싫든 청나라에 때때로 조공하고 책봉을 받으면 상국은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는 현상유지(status quo)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평화공존을 깨는 이양선(異樣船)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촉발되어 제2차 아편전쟁이 벌어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했다. 중화의 수도가 서양 오랑캐의 군대에 의해 짓밟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러시아가 중국에게서 연해주를 빼앗아 함경도와 경계를 접하게 되면서 조선은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기에 조선왕조는 19세기 전반기에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국왕은 어리고 허약했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있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제26대 고종으로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이에 이하응은 대원군(大院君)으로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노론 세력의 주축인 안동 김씨 세력과 대결에 나서게 된다. 그는 기득권력 적폐의 본산인 서원을 철폐했다. 1865년 대원군은 충청도 괴산군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이 사당은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의 유언으로 명 신종(만력제)와 의종(숭정제)를 모시던 곳으로, 조선 유림의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상징이었다. 그는 사액서원과 사당을 제외하고 전국에 650개의 서원을 없애 버렸다. 사원 철폐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의 궐기에도 대원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포법을 만들어 양반세력의 특권을 부인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유화적이었다. 집권전 파락호 시절에 교우했던 남인들 중에 천주교도가 많았고, 고종의 유모, 부인 부대부인 민씨도 천주교도였다. 이런 기미를 알아챈 남종삼이 프랑스의 힘으로 러시아를 견제하자고 의견을 제시해 대원군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는 새로 얻은 영토에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조선사람들을 유인했다. 러시아가 이주온 조선인들에게 시민권과 땅을 제공하자 조선 관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가 연해주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고, 조선 조정도 함경도 인구 감소를 걱정해 국경을 봉쇄했다.

1864~65년 러시아인들은 함경도 경흥(慶興)에 나타나 교역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러시아인들과 직접 대화를 거절하면서 러시아가 국경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해달라고 청에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와의 접촉이 무산되고,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돌아서게 된다. 천주교에 대한 용인과 서양과의 접촉은 국내 유림들의 쇄국론과 싸워야 하고, 청나라에 밉보이기 십상인 어려운 일이었다. 대원군은 노론 세력의 강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손쉬운 길을 택했다.

 

대원군은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된다. 186615일 대원군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천주교도를 고발하는 자는 포상하고 숨겨주는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을 영을 내렸다. 국내 신도는 8천명이 학살되었다. 12명의 프랑스 신부들 가운데 9명이 순교하고, 3명이 살아서 베이징으로 도망쳤다.

그해 미국의 전함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함포를 쏘아 평양 백성 7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평양감사는 박지원(朴趾源) 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였다. 평양 관민들은 미국 전함에 저항했고, 제너럴 셔먼호는 퇴각하다 모래톱에 걸려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박규수는 공격명령을 내렸고, 평양군민들은 선원 전원을 살해했다.

 

문수산성 /김현민
문수산성 /김현민

 

병인박해에서 신부 9명이 살해된데 대한 프랑스의 보복은 그해 즉각적으로 단행되었다.

리델(Félix-Claire Ridel)이란 신부는 간신히 베이징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 주중 프랑스 공사관에 소식을 알렸다. 프랑스는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얼마나 죽었는지엔 관심이 없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는 자국인 신부 9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제독에게 조선 원정을 명령했다. 로즈 제독은 일단 군함 3척을 이끌고 918일부터 10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 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지형 정찰과 수로 탐사를 하고,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이어 1011일에 군함 7척에 10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조선 원정길에 나섰다. 리델 신부를 앞세우고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을 앞잡이로 세웠다.

로즈는 곧바로 1016일에 강화부를 점령했다. 최신식 함대에서의 포격에 강화부는 저항도 못하고 점령당한 것이다. 로즈는 우리는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고 밝혔다.

 

1866년 병인양요 /위키피디아
1866년 병인양요 /위키피디아

 

대원군은 2만명의 군사를 강화도로 보냈다. 하지만 1026일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 갑곶 건너편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韓聖根)이 대원군의 명을 받고 성을 수비해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군은 성내 민가를 불태우며 유린했다. 이 결전으로 성의 해안선 성벽이 파괴되고 문루가 모두 불타 없어졌다.

프랑스군의 침공은 정족산성에서 패하면서 끝났다. 양헌수의 조선군은 전등사(傳燈寺)가 있는 정족산성에 배수진을 치고 매복에 들어갔는데, 로즈 제독은 매복사실을 모른채 정족산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조선군은 정족산성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 군에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사망자 6명으로 포함해 60~5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의 패전으로 퇴각을 단행했다. 이 때 프랑스군은 우리의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대원군은 제너럴 셔먼호와 병인양요에서 승리하면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이 탈취한 조선 어재연장군의 장군기 /위키피디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이 탈취한 조선 어재연장군의 장군기 /위키피디아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5년후에 전개되었다. 미국의 반격이 늦어진 것은 일단 제너럴셔먼호의 생존자가 없어 정보전달이 늦었는데다 우선 전함의 행방을 알아보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미국은 프랑스에 공동 파병을 제안했지만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멕시코 침공으로 미국과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암살후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탄핵 사태등도 조선 원정의 시일을 늦추었다.

조선은 제너럴셔먼 호 격침후 그 배가 영국 배인줄 알고 청에 그렇게 보고했다. 청이 조선의 보고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격침된 배는 영국 배가 아니라 미국 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의 외교권을 행사하는 공친왕(恭親王)은 미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조선과 전쟁을 벌일 것을 예감하고, 조선에 서양 세력과 가급적 마찰을 피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신미양요 때 강화도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 /위키피디아
신미양요 때 강화도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 /위키피디아

 

1870년 미국은 조선에 파병할 것을 결의하고, 청과 조선과의 관계를 면밀히 조사했다. 미국의 결론은 조선은 청에 조공은 하지만 독립국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미국의 프레더릭 로우(Frederick Low) 주중대사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만 청과는 적대적 의도가 없음을 사전에 알리고 중재를 부탁했다. 청은 미국의 이러한 입장을 조선에 전달했다.

미국은 18715척의 전함과 85문의 포, 1,230명의 해군과 해병대를 파견했다. 1853년 일본을 개방시킨 페리제독의 흑선(黑線) 함대와 와 비슷한 규모다. 미국 함대는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해 점령하고 조선정부를 상대로 개항을 시도했지만 대원군의 강경한 거부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국은 함포 외교가 조선조정을 강경하게 하는 역효과를 내자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 또한 무산되었다. 미군은 조선을 움직일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그해 73일 중국 옌타이로 철수했다.

미국은 막강한 화력으로 조선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병사가 죽어나가는데도 조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사 로우는 국무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의 실력행사는 어떤 정권이라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부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번 전투는 중국으로 하여금 텐진조약을 맺도록 한 전투보다 치열했다. 그러나 전세계 모든 나라와 맞서겠다는 이 정부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졌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수 없다.”

 

정족산성의 프랑스군 포격흔적 /김현민
정족산성의 프랑스군 포격흔적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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