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시절⑨…보험시장 개방
노태우 시절⑨…보험시장 개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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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합작선 동부 포함 요구 “발끈”…“외국 몫” 국내사 무더기 인가도

 

1988년초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협상대표들이 재무부 관리들에게 보험시장 개방을 요구하며 불쑥 특정업체를 들먹거렸다. “합작기준을 정할 때 동부그룹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해주십시오.”

국가와 국가 간의 협상에서 특정업체의 이해관계를 거론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재무부 실무자들로선 당황했다.

협상이 끝나자마자 재무부 보험국은 낌새가 이상하다 싶어 앞뒤 사정을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동부그룹이 미국 보험회사인 애트나사와 합작교섭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가 개방요구를 하기도 전에 동부그룹이 미국회사와 합작을 추진하고 그들을 통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안 사공일 장관이 발끈했다. 사공일 장관은 동부그룹 이준기 회장을 장관실로 불러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을 등에 업고 혼자 잘 돼서 되겠습니까. 돈 있는 재벌이라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김 회장은 장관 앞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진땀만 뻘뻘 흘렸다. 나이는 비록 장관보다 아래였지만 그래도 어엿한 재벌그룹 회장이 아닌가.

동부그룹은 1980년대 중반기부터 생보시장에 참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재무부 인가를 받지 못해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어떻게든 생보사를 가지고 싶었던 동부는 작전을 바꿔 미국 보험회사를 업고 생보시장 진출을 모색했다. 동부측은 합작 파트너인 미국회사 임원들 가운데 미 연방정부 관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고, 그게 재무부의 오해를 산 것이라고 밝혔다.

 

보험시장 개방은 5공화국 때부터 시작됐다. 19859USTR은 한국의 보험시장이 미국 통상법 301조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한국과 미국 간에 보험시장 개방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시 우리나라 생보시장은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보이고 있었다. 1985년 한해동안 6개 생보사가 거둬들인 수입보험료가 39,872억원이었고, 자산규모는 69,215억원이었다. 또 수입보험료와 자산의 증가율이 매년 30~40%에 이를 정도로 초고속성장을 거듭했다. 게다가 한국의 금리도 외국에 비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생보사들이 자금을 유가증권에만 굴려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수 있었다. 이런 구미 당기는 시장에 미국이 눈독을 들인 것이다.

재무부는 USTR의 요구를 받아들여 1887년 라이나·알리코·아플락등 3개 생보사에 대해 지점 설립을 허가했다. USTR87년말 또다시 301조를 내세우며 합작사 진출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정부로서도 본격적인 개방을 피할수 없었다. 6공화국 초대 재무장관인 사공일 장관은 보험국에 면밀한 개방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더불어 사공일 장관은 국내 시장을 최대한 보호하되 여기에다 개방압력을 부추긴 재벌의 참여를 어떻게든 제한하라는 특별지침을 실무자들에게 덛붙였다.

당초 재무부는 16위권 밑으로 밀려나 있는 동부그룹의 합작사 참여를 제한하기 위해서 30대 재벌에 대해 포괄적으로 진출을 불하한다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USTR은 참가자격에 제한을 두는 것은 불공정한 행위라며 문제삼자 15대 재벌만 아니면 합작사를 세울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했다.

재무부는 15대 그룹에게는 보험시장 진출을 불허하되 16~30대 그룹은 지분율 50% 미만의 소주주가 되도록 제한한다는 방침을 확정, 시행에 들어갔다. 물론 미국측도 미국보험사를 대주주로 만들어주는 정책을 환영했다.

 

생보 시장에 대한 개방 방침이 서자 국내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외국보험사와 합작교섭에 들어갔다. 1989년에는 동부애트나·동양베네피트·코오롱메트·고려씨엠·삼신올스테이트가 각각 생명보험사업 허가를 받았다. 1990년 영풍매뉴라이프, 92년 고합뉴욕이 생겨나 합작사는 모두 7개사로 늘어났다. 여기에 푸르덴셜·조지아·프랑스등 외국사도 추가됐다.

재무부는 이와함께 국내업체에 대한 문호도 활짝 열었다. 외국회사에 국내시장을 내주기보다는 보험회사를 늘려 상대적으로 외국회사의 몱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재무부는 서울에는 전국적인 영업망을 갖춘 내국사를, 지방에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지방사를 각각 인가해 줬다. 서울과 지방에서 국내업체들이 외국회사의 영업을 철저히 방어하도록 한다는 전략이었다. 결국 생보시장은 6개 기존사를 비롯, 6개 내국사, 8개 지방사, 7개 합작사, 5개 외국사등 32개사가 각축을 벌이는 완전 경쟁 체제로 돌입하게 됐다.

개방한지 7년이 되는 93년초 외국사 및 합작사가 차지하는 시장 점유율은 수입보험료를 기준으로 전체의 4.3%에 불과했다. 이 부분에서 미국의 압력을 되받아 친다는 재무부의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고 할수 있다.

 

재무부는 또 합작사의 상호에까지 걸고 넘어졌다. 동부와 애트나는 처음 한국생명으로 합작사 인가신청을 냈다. 그런데 재무부 실무자의 눈에는 이것이 눈에 거슬렸다. 미국 보험회사가 대주주로 돼 있는 합작회사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무자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미국측 파트너의 이름을 상호에 넣어 계약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결론을 내렸다.

실무자들은 또 합작 상대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감독기관의 임무라고 알려줬다. 명분도 그럴듯하고 해서 합작추진 업체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합작사의 이름이 길어지고 상호에 외국업체의 이름이 들어갔다. 결국 이들 회사가 혼혈아에 대한 한국인 이용자들의 이질감을 활용, 영업에 어려움을 겪도록 한다는 속셈이었다. 합작사들은 이러한 이름 때문에 기왕이면 한국업체에 보험 들겠다는 소비자들의 심리로 곤욕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재무부의 작전이 주효한 것이다.

그런데 재무부의 시장 개방 원칙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우선 지분규정에서 재무부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16~30대 재벌은 소주주로만 생보시장에 참가할수 있다는 규정을 뒀는데, 이 기준에 걸려든 동부와 코오롱이 소주주로 전락, 경영갈등을 빚고 말았다.

 

동부와 코오롱은 다른 그룹들보다 생보사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이들 그룹은 재무부의 개방 원칙이 정해지기 전에 미국측과 자산운용·영업·인사등 주요경영권을 양측이 협의해 행사한다고 합의했다. 파트너였던 애트나와 메트로폴리탄사도 처음 진출하는 입장에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주주로 참가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측 파트너가 재무부의 지분율 제한에 걸리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대주주로 올라섰던 것이다.

처음에는 합작회사의 운용에 별 문제가 없는 듯했다. 미국측도 한국시장 진출 초기에 경영문제에 적극 개입히기보다는 물러서서 배운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국측 파트너들이 지분율에 맞는 경영권을 요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측 파트너는 외형 위주의 한국식 영업에 강한 제동을 걸로 단기적인 수익을 중시하는 경영을 주장했다. 동부와 코오롱은 한국식 영업을 내세웠으나 소주주의 한계에 부딛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부애트나의 이석룡 사장은 91년 애트나측의 간섭과 압력을 참지 못하고 태평양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코오롱메트는 925월 미국측 부사장이 한국측 우재구 사장에 대해 대표이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내 경영권 다툼은 법정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코오롱과 메트로폴리탄은 논란 끝에 한국측 사장과 미국측 부사장을 동시에 해임함으로써 타협점을 찾았다.

합작사의 경영권 다툼은 파트너 모두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개방 초기에 합작사 가운데 선두를 지켰던 동부애트나는 경영갈등 후 중위권으로 떨어졌다. 코오롱메트도 영엽직원들이 대거 다른 보험사로 떠나는 사태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외국사의 발목을 잡기 위해 생보사들을 무더기로 인가해준 정책은 신규 참여자들의 영업 재무구조를 취약하게 했다. 서울과 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국내 생보사들이 시장 각축전을 벌이는 바람에 미국업체들의 영업활동 범위가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다. 아플락과 조지아가 3년만에 손을 털고 한국을 떠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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