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②…노론 척결하려다 노론의 칼에 실각
대원군②…노론 척결하려다 노론의 칼에 실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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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의 실패…경복궁 증축으로 경제파탄, 무기 근대화 무시한 위정척사론

 

19세기말 미국과 프랑스는 세계 강대국이었다. 이런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 개방을 하지 않은 나라는 흥선대원군 영도 하의 조선이 유일하다. 그러나 대원군이 손잡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유학자들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위정척사 사상의 주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가 주도하는 화서학파였으며, 대원군이 혁파하려 했던 노론파 유학자들이었다. 서양오랑캐들의 무력 사용에 대처하는 방법론으로 조정 내에 주전(主戰)-주화(主和)로 갈려 있을 때 이항로는 관직에 물러나면서 주화론에 따르면 인류는 금수(禽獸)의 세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상소했다.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이고, 인륜의 기본인 효()와 충()을 부정하므로 금수의 세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항로는 서양 도적의 침입을 유발하는 내적 요인으로 기이한 기술과 지나친 기교로 만든 물건’(奇技淫巧之物), 즉 선진기술로 만든 서양 상품을 꼽았다. 이항로를 따르는 유학자는 김평묵(金平黙),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의 외로운 보루로서 서양오랑캐들의 침략으로부터 사수하고 서양문물을 배격하는 반근대화 이론을 펼쳤다.

 

대원군이 소중화론자의 상징인 만동묘(萬東廟)와 붕당의 근거지인 사원을 철폐하며 유림의 반발을 억누를때까지만 해도 개혁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화론자와 손잡지도 않았고 천주교와 화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노론의 위정척사파들과 손잡고 보수로 회귀했다.

역사가들은 이 대목에서 대원군을 비판한다. 권력 유지에 뛰어난 기지를 보였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역사적 안목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초기 치세(1863~1873)의 시기는 일본에서 미국 흑선(黑船)에 대한 반발로 메이지(明治) 유신이 일어나고, 중국에서는 베이징 함락에 대한 반성으로 변볍자강운동이 벌어지는 시기였다. 동양권이 서양의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각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도를 찾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하고 미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했고, 러시아는 우리 국경까지 진출했다. 이런 시기에 권력을 쥔 지도자가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국내 개혁을 단행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대원군은 그런 그릇이 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대원군은 부국강병은 물론 국민통합에도 실패했다.

1862년 한해동안 경상도 진주(晉州단성(丹城) 등지에서 민란이 37회나 발생해 관리들의 세금횡포와 양반 지주층의 부정부패에 저항했다. 대원군은 부정부패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환곡과 군포제도를 개혁하면서 백성들의 애환을 풀고 세수를 늘리려 했다. 하지만 그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본질적인 조치로 양반들에 대한 과세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병인사옥은 대원군이 수세적 입지에서 공세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러시아의 통상교섭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다는 소문이 자신에게 화로 미칠 가능성이 커지자 그는 병인사옥(丙寅迫害)을 일으켰다. 1866년에서 1871년까지 8천명의 천주교인들이 학살되었다. 한강변에는 하느님 맙소사”(하느님 마시옵소서)라는 통곡이 진동했다.

 

경복궁 근정전 /문화재청
경복궁 근정전 /문화재청

 

그는 오히려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쥐어 짜는 경복궁 증축 사업을 벌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270년만에 재건하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 국정을 주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궁궐을 새로 짓느라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목재를 구하기 위해 민간신앙의 대상인 거목과 명문가의 묘지 보호림까지 서울로 옮겨왔다. 1865년에 착공해 1868년에 완공한 경복궁은 왕실의 위용을 강화했지만 백성들의 원한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비가 모자라다 보니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미명하에 세금을 강제 징수하고, 당백전(當百錢)이라는 악화(惡貨)를 발행했다.

어느 정부든 가장 손쉬운 재정확보의 방법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다. 대원군은 양반과 지주계층으로부터 재정 확보의 방법을 피해 쉬운 길을 택했다.

당백전은 이미 통용되고 있는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백배 액면가를 갖는 신화폐였다. 하지만 이 돈이 대량으로 발행되어 유통되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실제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에 그쳤다. 단시일에 대량의 악화가 시중에 나돌자 상평통보를 가진 사람은 당백전과 교환을 기피했다. 물가가 5~6배로 폭등하고 상평통보는 사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재정이 궁궐 하나 지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비난여론이 비등하자 1867년 당백전 주조를 중단하고 이듬해 유통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화폐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청나라 동전이 밀수입되었다. 대원군은 밀수입한 청전(淸錢)을 양성화했다. 당백전 중단으로 구멍 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청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액면가는 같은 가격으로 통용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직접 청전을 사면 조선에서 사는 것의 3분의1 가격이었다. 따라서 많은 상인들이 환차익을 얻기 위해 중국에서 청전을 사서 국내에 유통시켰다. 1874년 조선에 유통된 상평통보는 1천만 냥이었는데 청전은 3백만~4백만 냥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가치가 낮은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

 

대원군은 또 서양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군사력을 육성하지 않았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의 승리는 어쩌면 행운이었다. 병인양요에서는 양헌수(梁憲洙)의 매복작전이 성공했고, 신미양요에선 조선이 두들겨 맞고도 개항의사를 보이지 않자 미 해군이 그냥 돌아가면서 승전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투에서는 패했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강화유수 이인기는 저항도 한번 못하고 달아났다. 청나라 사태를 조금만 연구했더라면 서양 군인들이 강화도로 올 것이 예견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때 영국함대는 양쯔강 대운하를 봉쇄해 청의 물자공급을 막았고, 이에 청이 항복했다. 같은 방법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이 강화도로 진격한 것은 한양의 조운선(漕運船) 루트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선진 화기로 무장했어야 했다. 결국 강화 주둔군은 패배했고, 서울에서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양헌수는 사냥꾼이었다. 그는 정규군을 모집하기 어려워 지방의 포수들을 끌고왔다. 병사들은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고, 오합지졸이었다. 강화 해협을 건너면서 19명이나 도망갔다. 다행스럽게 양헌수는 오합지졸로 선진화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이기는 묘안을 선택했으니, 정족산성 길목을 지키는 야간매복작전이었다. 양헌수의 기대이상의 선전으로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전함 콜로라도호에 승선한 조선인 대표 /위키피디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에 나포된 조선 선박 /위키피디아

 

하지만 전쟁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이후 미국이 조선을 침공할 것이란 정보는 청국에서 미리 알려주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사이 5년간 조선군의 무기선진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병인양요에서 승리하자 조정은 포수(砲手)를 양성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쓰던 화승총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포르투갈 포를 개량한 블랑기포를 개발하고 강화도 돈대를 개보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실력은 신미양요에서 나타났다. 존 로저스(John Rogers)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은 군함 5척에 병사 1,230, 대포 85문을 싣고 나타났다. 조선군이 강화도에 신무기로 배치한 블랑기포의 포탄은 미국 군함에 미치지도 못했다. 반면에 미 군함의 정확한 포격으로 수비진의 포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라이플로 무장한 미국 육군은 야포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수비병을 전멸시켰다. 조선측 자료에는 전사자 53명으로 기록되었으나, 미국측 기록에는 전사자 350, 부상자 20명이으로 기록되었다. 미군 사망자는 3, 부상자 10명이었다.

이 일방적인 전쟁에도 조선은 굴하지 않았다. 그 대단한 용기를 가상히 여겨 미 해군이 돌아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신미양요 5년후인 1776821일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에 접근했다. 영종도의 조선 수비대가 발포했지만 포의 사거리가 미치지 못해 전혀 적함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이에 비해 운요호는 정확한 포격으로 수비대 포진지를 날려버렸다. 일본 전함 5척이 강화도 진지를 일제히 포격, 초토화시킨후 육군이 상륙하자 조선수비대는 달아났다. 조선수비대 6백명중 36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부상당했지만 일본군 피해는 없었다.

 

대원군은 병인양요 때 어쩌다 승리한 것을 승전으로 착각했고, 신미양요 때 미군이 스스로 철수한 것을 왜곡했다. 그 결과는 일본군과의 진검승부에서 나타났다. (운요호 사건때엔 대원군은 실각해 있었다.) 대원군의 형으로 민비측에 가담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병인양요에서 서양 배를 격퇴시킨지 10년 동안 병력을 열배로 늘리고 포대와 성곽을 구축했는데, 이양선 한척에 진지가 무너지다니 이해가 안된다고 한탄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전함 콜로라도호에 승선한 조선인 대표 /위키피디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전함 콜로라도호에 승선한 조선인 대표 /위키피디아

 

19세기 제국주의 본질은 무력이고, 무기였다. 신무기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은 대원군 뿐만 아니다. 당시 척화론의 기치를 내걸었던 화서학파는 서양식 무기를 기기음교지물로 보아 관심조차 없었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영국 유학중에 서양과 대적하다간 패배한다고 인식하고 개국을 주장한 것과 정반대의 지적풍토가 조선에서 횡행했다.

중국 학자 위원(魏源)은 아편전쟁 패전후 쓴 해국도지’(海國圖誌)에서 다수의 병력보다 오직 대포의 정교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해국도지는 조선에도 보급되었다. 하지만 신미양요 때 영의정 김병학(金炳學)미국이 어떤 나라인가라는 고종의 물음에 해국도지에 나와 있기를, 미국은 작은 부락이라 하였습니다. 화성돈(華盛頓, 조지 워싱턴)이라는 사람이 성을 쌓아 개척하는 기반을 만들어 해외에 오랭캐들끼리 서로 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권력의 수뇌부가 적의 실체조차도 모른채 전쟁을 했던 것이다.

 

위정척사 운동은 무()가 빠진 문()의 양이 사상이었다. 위정척사파는 서양의 기술과 군사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도와 문을 업신여긴 오랭카를 무찌르자는 대안없는 발상이었다. 그 결과는 무력에 의한 개국이었다.

 

대원군은 결국 자기함정에 빠졌다. 대원군의 집권은 법적 근거가 없었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등극하면서 수렴청정은 조대비가 맡았고, 대원군은 어린 국왕을 돕는다(補政)는 명분으로 권력을 사유화했다.

임금의 나이가 22세가 되자 위정척사파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권력을 국왕에게 되돌려주라고 상소를 하고, 고종도 못이기는척 최익현의 상소를 받아주면서 1873년 대원군은 훗날을 기약하며 권좌에서 물러났다. 최익현도 노론이었다. 결국 대원군이 개혁을 부르짖다가 보수로 회귀하면서 노론의 칼에 맞아 권력을 잃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 /위키피디아
흥선대원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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