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함포 외교에 굴복한 조선, 강화도조약 체결
일본 함포 외교에 굴복한 조선, 강화도조약 체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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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후 천황 호칭에 분쟁 시작…운요호 사건 후 협상으로 전환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가 이뤄진 직후인 16691, 일본 정부는 조선에 막부 체제에서 천황 체제로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정부에 알리는 서계(書契)를 보내왔다.

서계는 일종의 외교문서다. 그 안에는 메이지 천황을 황()으로, 천황의 말을 칙()으로 표현하는 문자가 들어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린(交隣)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나라 사이였는데, 일본측이 갑자기 중국 천자(天子)를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하자 서계를 접수한 동래 지방관은 서계 접수를 거부했다. ()나라의 조공국으로서 중국천자에게 사용하는 표현을 받아들일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위정척사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던 대원군 시절이었기에 왜와의 외교를 맡은 지방관으로서는 제대로 대응한 일이었다. 이 서계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왜이(倭夷)가 양이(洋夷)와 일체라는 심증을 굳혀 주었다.

 

임진왜란후 조선과 일본은 광해군 1(1601)에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를 통해 외교를 정상화한다. 전쟁이 끝난지 11년만에 서둘러 일본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누르하치의 만주족을 상대하기 위해 남쪽 변경을 안정화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일본 막부와 체결한 게 아니고 쓰시마(對馬島)와 체결한 조약이었다. 조선 조정은 쓰시마 도주(다이묘)에게 인장을 주고 막부와 외교를 중개하도록 했다.

호칭이 문제가 되었다. 일본의 권력실세는 막부의 쇼군(將軍)이었는데 조선의 국왕과 대등하게 왕호를 칭할수 없었다. 쓰시마 번()에서 묘안을 찾아낸 쇼군의 칭호가 대군(大君)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대군은 국왕의 아래 개념이고, 일본에서는 국왕의 다른 표현이라며 그 용어를 서로 받아들였다. 양국의 개념 차이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이미 쇼군을 국왕으로 칭하는 문제점을 집고 있었다. 이익은 일본 천황이 권력을 잃어버린지 수백년 되었지만, 언젠가 일본인들이 천황을 옹립해 호령하게 한다면 상대의 원수는 황()이되고, 이쪽은 왕()이 되니, 그땐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이익이 예견한 상황이 1백년 후에 현실로 드러났다. 어느날 갑자기 중국 천자와 동격이라며 준엄하게 글을 올리니 동래의 지방관이 당황했던 것이다.

 

고종 5년(1868) 신헌(申櫶)에 의해 개발해 사용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 /문화재청
고종 5년(1868) 신헌(申櫶)에 의해 개발해 사용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 /문화재청

 

메이지 정부는 출범하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만국공법에 따라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의 신정부는 2백여년 전에 막부가 조선정부와 맺은 조약에 대해서는 동양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자국의 천황이 권력을 되찾았으니, 중국 황제에 준하는 대우를 해달라고 조선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조선이 서계 접수를 거부하자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들끓었다.

정한론자는 사쓰마(薩摩) 출신 유신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선두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이었다. 사이고는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해 무력행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이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오쿠보는 조선을 정벌할 경우 러시아가 어부지리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고, 서양과의 조약 개정이 급선무라는 이유를 들었다. 오쿠보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한파를 누르고 온건론이 일본 외교의 기조를 형성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 정벌보다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관계 수립을 시급한 과제로 보았다. 조선, 안남(베트남), 류큐(琉球)는 청국의 속방이므로,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면 자연스럽게 문호가 열린다고 보았다.

18719월 청국 이홍장(李鴻章)과 일본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사이에 청일수호조규가 조인되었다.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조건으로 수교를 했다는 사실을 조선 정부에 알리고 대마도를 뒷전으로 빼고 직접 조선 정부와 교섭을 벌다. 하지만 대원군 집권기에 그런 주장이 조선에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은 187210월 부산 왜관에서 철수했다.

 

1867년 1월 16일 부산 앞바다에 출현한 일본 전함들 /위키피디아
1867년 1월 16일 부산 앞바다에 출현한 일본 전함들 /위키피디아

 

1873년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고종은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박규수는 북학파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두차례 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과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랑방에는 개파화들이 모여 세계의 흐름을 논했다. 그 중에는 후에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박영교 뿐아니라 온건개화파인 김윤식 등도 포함되었다.

 

이듬해인 1874년 일본은 류큐 주민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빌미로 대만에 출병해 섬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청국은 자국 영토가 침범당했는데도 50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청국은 조선에 밀서를 보내 대만 정벌을 끝내고 철수한 일본군 5천명이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으며, 이 군사를 동원해 조선 정벌에 나설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일본이 조선 정벌에 나서면 프랑스와 미국도 일본을 지지할 것이므로, 조선은 서양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라고도 충고했다.

이 정보에 받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무기도 정예하고 포()도 설치하고 군량도 쌓아두었으므로, 만일의 변고가 나면 변경 방어를 튼튼히 해야 한다며 척화론을 펼쳤다. 모두들 위정척사의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박규수만은 서양과의 교역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규수는 대마도주가 황제요, 칙서요 한 것은 그들 스스로 높여 부른 것이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불러 달라는 요구가 결코 아니다며 일본의 서계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격론 끝에 조선의 조정은 지방관들이 일본과의 서계문제로 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벌을 주었다. 부산 훈도(訓導) 안동준(安東晙)은 부점 혐의로 처형되고,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은 유배,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金世鎬)는 파면당했다. 일본이 전쟁을 벌여올 경우 이길 승산이 없으니, 그동안의 교착상태를 지방관의 잘못으로 돌리고 협상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도 대원군이 실각하고 국왕친정 후 대일 자세에 유연함을 보이자 협상에 응했다. 오쿠보도 정한론을 제압한 만큼 외교적 승리를 얻고 싶어 했다. 18745월 일본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에게 조선의 정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부산에 파견했다. 모리야마에게 신임 왜관훈도 현석운(玄昔運)에게 앞으로 공문은 쓰시마가 아니라 일본정부가 직접 보낼 것이며, 조선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 용어와 문구를 수정할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또 새로 서계를 정리해 동래부사에게 보내겠다고도 했다.

해를 넘겨 18752월 일본국에서는 모리야마를 정사로,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를 부사로 공식사절단을 구성해 부산에 파견했다. 모리야마와 히로쓰는 부산 초량진에서 새로운 문서를 건네며 현석운과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새로 만든 서계에도 천황을 황제(皇帝), 그의 영()을 조칙(詔勅)으로 칭했다. 조선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조선측은 잘못된 문구를 고치도록 요구하며, 사절단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조선측은 사절단에게 과거 쓰시마인들에게 베풀었던 방식의 연회를 베풀겠다고 했는데, 일본측이 서양식 제복을 입고 서양식으로 리셉션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은 아직도 위정척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일본 사절단의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 사신들은 일개 번국의 다이묘들이 입던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대일본국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 문제를 듣고 박규수는 일본 사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고종은 사소한 문제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박규수는 사가에 물러나 았던 대원군에게 결정해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대원군이 대신회의에 참석하자 서계를 받아들이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조선은 서계 접수도 거절하고 연화 개최도 취소했다.

 

일본 해군의 운요호 /위키피디아
일본 해군의 운요호 /위키피디아

 

이제 박규수가 예측한대로 일본의 무력시위가 필연적이었다. 조선 조정이 서계 접수문제로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오쿠보는 운요호(雲揚號) 등 군함 3척을 조선에 파견했다. 운요호는 525일 부산 앞바다에 예고 없이 나타났고, 2주후에 또 한척이 도착했다. 조선측이 항의하며 선박 검사를 요구하자 모리야마는 조선 관원들의 승선을 허락했다. 현석운 등 조선 관리들이 배에 타자마자 군함들은 일제히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그런후 620일 일본 전함들은 돌아갔다.

일본의 함포외교에도 조선 조정은 서계를 접수할지를 결론내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이 서계를 다시 바꿔 오도록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 요청을 동래부사 황정연(黃正淵)에 맡겼더니, 황정연은 명을 받기 불가능했으므로 사임하는 것으로 처신했다. 일본 정부는 협상을 중단하고 귀국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모리야마는 921일 부산을 떠났다.

 

모리야마가 떠나기 하루전인 920일 운요호 등 3척의 일본 군함이 강화도 한강 어귀에 도착했다. 강화도에 침범한 일본 전함들은 앞서 프랑스와 미국 해군의 선례를 학습하고 왔다. 함대를 조선 포대의 사거리 밖에 정박한채 함장은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작은 배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들은 그곳이 외국선 금지구역임을 알고도 도발한 것이다. 조선측이 포문을 열자 운요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강화도 포대를 초토화시켰다. 운요호는 바다로 나가 영종도의 작은 진지도 공격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조선 군사들은 속수무책을 당했다. 일본 함대는 며칠 강화도 일대를 포격하고 약탈한 후에 928일 나가사키로 회항했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 군함이 돌아간후 1212일 조선 조정은 결국 일본의 서계를 받기로 결정했다.

 

다음해 18761월초 일본의 신임 주중대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礼)가 부임해 이홍장을 만났다. 모리는 운요호 사건을 설명하면서 조선은 청국에 조공만 바칠뿐 독립국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은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는 외번(外蕃)으로 청국의 방토(邦土)라고 맞섰다. 정삭이란 중국의 역법(曆法)을 말하는데, 조선은 명조, 청조의 달력을 사용해 왔다. 모리와 이홍장의 면담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무렵 이홍장은 주청사(奏請使)로 베이징에 온 이유원에게 조선이 일본 사이에 무력분쟁이 발생하면 청은 임진왜란 때처럼 도와주어야 하는데, 지금 군사력이 부족하다고 털어놓으면서 일본과 더 이상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했다.

 

1876년 강화도의 일본 군인들 /위키피디아
1876년 강화도의 일본 군인들 /위키피디아

 

일본은 사쓰마 출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조선 특명전권대사로, 조슈 출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한다고 통보했다. 왜관 훈도 현석운은 조선이 서계를 받기로 했고, 연회에서 복식을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결정했으므로, 사절단 파견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사절단은 관리와 병사 등 600명이 6척의 전함에 올라타 일본을 출항했다. 그들은 부산 초량진을 거쳐 1876129일 강화도 근해에 도착했다. 조선 조정은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을 접견대신으로, 예조참판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해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양측은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였다.

이 와중에 위정척사파의 지도자 최익현(崔益鉉)는 도끼를 들고 일본과의 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주장은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으면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일본과 서구 상품이 팔리면 백성들이 사치품에 눈이 멀어 경제가 파탄난다 일본은 서양의 앞잡이이며, 천주교가 기승을 부려 조선이 금수(禽獸)로 변하게 된다 외국인이 국내에 거주하면 부녀자들을 겁탈해 사회질서가 무너진다 일본과 서양은 청나라 오랑캐보다 못하다 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유배 보내고 1876227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 1조에는 조선은 자주국가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되어 있지만,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조선의 항구를 개방하면서도 일본의 항구 개방에 대한 조항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이 자주국가라는 조항이 처음으로 국제조약문서에 들어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동안 조선은 명-청을 이어가며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자인했지만, 일본과의 조약에서 명목상으로나마 자주국가임을 명시하게 된 것이다. 이 문구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내 자주파들의 등장을 예고하고, 반청 세력을 규합하는 자극제가 된다.

청나라는 속방이라 주장하던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하도록 허용했다. 그 첫째 이유는 청이 조공국을 보호할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만이 일본에 공격당하고 류큐가 일본의 현으로 복속되고, 베트남에 프랑스군이 공격하는데도 청은 속수무책이었다. 또하나는 러시아가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기 때문에 조선을 완충지대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강화도조약문 /위키피디아
강화도조약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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