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가 협상하고 타결해준 조선의 미국 수교
청나라가 협상하고 타결해준 조선의 미국 수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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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류큐왕국 합병후 위기감 느낀 청국…조선이 미국과 수교하도록 주선

 

18793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전환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메이지 정부가 1872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류큐(琉球) 왕국의 독립국 지위를 박탈하고 류큐 국왕을 번주(藩主)로 강등한데 이어 나온 것이다. 류큐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는 밀사를 청국에 보내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홍장은 끝내 밀사를 만나 주지 않았다. 류큐의 밀사 린세이고(林世功)은 끝내 단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은 그나마 지방영주로 인정했던 류큐 국왕을 도쿄로 압송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꾸어 일본영토로 전환시켰다. 이를 일본에서는 류큐 처분이라 한다. 엄연한 주권국의 영토를 빼앗으면서 일본은 자국 내에서의 조치처럼 둔갑시킨 것이다.

 

1879년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 대통령과 청의 이홍장 /위키피디아
1879년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 대통령과 청의 이홍장 /위키피디아

 

일본이 류큐국 슈리성을 점령하고 국왕을 압송했다는 소식이 미국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에게 전해졌다. 그는 남북전쟁 때 북군 총사령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곧바로 태평양을 건너 그해 5월 텐진(天津)에 도착해 민간인 신분으로 공친왕(恭親王)과 이홍장(李鴻章)을 만났다. 공친왕은 조공국이었던 류큐를 빼앗긴데 대해 대수롭지 생각했지만 이홍장은 일본의 조치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다음은 그랜트와 이홍장의 대화다.

그랜트: 나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 자격이 아니라, 은퇴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류큐 처리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다.

이홍장: 청국은 골치 아픈 국내외 문제로 류큐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 섬들이 당신네 나라에는 그렇게 중요한가.

그랜트: 류큐 열도는 미국 국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류큐는 비록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은 실로 크다.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이 당신 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 가게 될 것이다.

이홍장: 왜구의 소굴이었던 일본이 작은 섬 몇 개 더 얻었다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께서 류큐 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는가.

그랜트: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류큐 군도의 북부 아마미 제도는 일본에, 류큐 중부(오키나와)는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과 일본이 공동 관리하고, 류큐 남부 미야코와 이에야마 제도는 중국이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미국과 육상대국에 머물러 있던 청국의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미국은 오키나와 열도가 천하의 패권을 가르는 지장학적 중요성을 인식했고, 중국은 몇 개의 작은 섬으로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랜트는 류큐 3분할안을 제시했다. 이홍장은 어치피 힘으로 류큐를 다시 조공국으로 되돌릴수 없음을 알고, 그랜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류큐 분할안 /김현민
류큐 분할안 /김현민

 

7월 그랜트는 도쿄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문제에 대해 중재에 나설 의향이 있다며 3분할안을 제의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 독일등 서양 국가들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해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강행할 것을 부추기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이듬해 3월 이토는 그랜트의 류큐 3분안을 변형해 류큐 2분안을 제안했다. 그랜트가 설정한 3분안 중에서 중부와 북부를 일본이 지배하고 남부의 몇 개 섬을 청이 관할하는 내용이다. 18901020일 류큐 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조약초안이 작성돼 청의 총리아문대신 선구이펀(沈桂芬)과 일본측 대표 이토가 서명했다.

이 초안이 비준을 위해 이홍장에게 넘어갔다. 이홍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일본의 요구를 응할 경우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일본에 대해 입장을 최대한 늦추는 무대응 지연책으로 가는 것이 최상책이다.” 그는 끝내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응책은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이홍장의 무대응 전략은 일본의 류큐 점령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후에 양계초(梁啓超)가 이홍장의 무대응 정책에 대해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자 청의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다. 청조의 입장에서는 속국의 멸망이었고, 종번(宗藩) 관계의 고리가 처음으로 끊어지게 된 것이다. 작은 섬 몇 개가 불과한 류큐 자체는 청에게 중요치 않았지만, 다른 속국에 파급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엄습해 왔다. 일본의 다음 타깃이 청에게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자 청 황실의 고향인 만주와 인접해 있는 조선이라는 인식이 청의 지도부에 강하게 대두되었다.

청이 내린 결론은 조선에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조선에게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권유한 또다른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 저지다. 러시아는 1860년 중국에서 연해주를 얻은 이후 동해 연안과 울릉도를 기웃거리며 항구와 저탄소를 확보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주중 영국공사 토머스 웨이드(Thomas F. Wade)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류큐와 같은 운명에 빠질 것이라고 청국의 외무당국 총리아문에 조언했다.

청조는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겸하고 있던 이홍장에게 조선 문제를 맡겼고, 이홍장은 조선의 영의정을 지내고 주청사(奏請使)로 베이징을 다녀온 이유원(李裕元)과 서신을 교환하며 서양 나라들의 정보를 제공했다.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일본과 러시아의 야심이 커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득했다. 이유원은 이홍장의 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 /위키피디아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 /위키피디아

 

미국도 조선과의 수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통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보고는 미국은 조선과의 수교를 다시 타진하게 되었다. 1878년 미국 정부는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chufeldt)를 조선을 포함에 몇 개 나라에 외교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슈펠트 제독은 25백톤급 전함 티콘도로가(USS Ticondoroga) 호를 타고 북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중동, 인도, 싱가포르를 거쳐 18804월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에 앞서 주일 미국대사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무경을 만나 조선에 슈펠트를 소개해주는 추천서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노우에는 부산주재 영사인 곤도에게 소개서를 써 조선 당국에 보내라고 했다. 18805월 슈펠트를 태운 티콘도로가호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일본 영사 곤도가 고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동래부사 심동신(沈東臣)에게 전달했으나, 심동신은 자신은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의 공문을 접수할 권한이 없다며 편지를 받기를 거부했다. 슈펠트는 빈손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이노우에 외무경이 조선 예조판서 윤자승(尹滋承)에게 미국의 청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는 편지와 함께 슈펠트의 편지를 동봉했다. 하지만 윤자승은 슈펠트의 편지를 개봉하지 않은채 이노우에게 돌려보냈다. 윤자승은 이노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펠트의 편지가 격식을 어겼고, 일본 이외의 어떤 나라와도 교류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 전함 티콘데로가호 /위키피디아
미국 전함 티콘데로가호 /위키피디아

 

조선의 이유원은 슈펠트가 편지를 보내온 사실을 청의 이홍장에게 알렸다. 이홍장은 이유원의 편지에 앞서 일본 주재 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서 미국 대표가 와서 조선과 수교 접촉을 하는데 일본이 중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홍장은 조선과 미국의 수교 중재를 일본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홍장은 18807월 슈펠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조선과의 수료를 중재해 줄 터이니, 텐진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8월 슈펠트는 이홍장을 만나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일본주재 청국 대사관에서 조선을 설득하는 공작이 벌어졌다. 18806~7월 조선 정부는 김홍집(金弘集)을 단장으로 하는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김홍집은 도쿄에서 청국 초대공사 하여장과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을 여섯차례 만났다. 그때 김홍집은 청국 외교관들로부터 세계정세와 일본의 내정, 대외무역은 물론 청국의 경험,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관계에 관해 들었다. 황준헌은 그 대화 내용을 정리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자를 만들어 건네 주었다.

조선책략의 골자는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이다. “오늘날 조선의 가장 시급한 대책은 러시아를 막는 것이다.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으며, 미국과 연계함으로써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것이다.”

조선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을 청나라가 제시한 것이다. 중국과 친해야 한다는 것은 조공국의 입장에선 당연하고, 일본과는 이미 조약을 체결한 입장에서 이 책자의 요점은 미국과 연대하라는 것이었다.

1880102일 김홍집은 귀국해 고종을 알현하고 조선책략을 올렸다. 고종은 신하들에게 조선책략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1011일 중신회의(묘당회의)는 서양 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미국과 국교를 열기를 결정했다.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들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위정척사파들은 김홍집을 규탄하며 강하게 반

 

1881년 여름 슈펠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8821월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領選使) 자격으로 텐진 무기창에서 훈련받을 조선 학생들을 인솔해 중국에 왔다. 명분은 영선사였지만 김윤식의 주요 임무는 대미수교였다.

김윤식은 이홍장을 만나 청 황제가 조선국왕에게 칙명을 내려 미국과 수교하라고 조치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조정은 청의 칙명이 내려오면 국내 위정척사파들의 강한 반발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홍장은 미국과 수교에 청이 직접 간여하는 모영이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다만 자신이 슈펠트와 직접 협상해 조약안에 타결하겠다고 했다.

슈펠트와 이홍장 사이에 협상이 한달간 진행되었다. 조약안은 대체로 합의점에 도달했다. 이홍장은 청이 서양국가와 일본과 체결한 조약보다 조선에 유리한 조항을 많이 넣도록 힘썼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항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홍장은 조약안 제1조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며, 내정은 조선의 자주다라는 문구를 넣자고 했다. 슈펠트는 이 조항에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은 자주국과 협상하는 것이지 속국과 협상하는 게 아니다며 속국 문구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이홍장은 슈펠트의 완강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이홍장은 타협안으로 조선이 자주국이라고 규정하되, 조선국왕이 별도의 선언문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자고 물러서 협상안이 타결되었다.

조선에서 온 김윤식은 텐진에 머물면서 이홍장이 부를 때 달려가 자문을 했을뿐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협상 조인은 조선에서 하기로 했다. 조선에선 신헌(申櫶)을 전권대관으로,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해 협상에 임하도록 했다.

이홍장은 북양함대 소속 군함을 파견해 자신의 직속부하인 마건충(馬建忠)을 인천으로 보냈다. 청나라 주도로 조선-미국 수교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주재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도 앞서 인천에 도착해 있었다.

마건충이 슈펠트에 3일 앞서 58일 인천에 도착해 보니, 일본 외교관이 와 있고, 조선 관원들이 하나부사에게 출입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는 신헌과 김홍집이 청국 군함에 승선하자 삼궤구두고(三拜九叩頭)의 예()를 하게 했다. 조선 외교관들은 청 황제에게 세 번 허리를 굽혀 아홉 번 머리를 대는 예를 취했다. 마건충의 속셈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이어 슈펠트가 미국 전함을 타고 511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조선에서의 협상은 이홍장과 슈펠트가 합의한 조약안을 추인하는 수준이었다. 유일하게 조선 정부가 문제를 제기한 대목은 인천항에서 쌀 수출을 금지하는 조항이었는데, 슈펠트는 조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조선이 자주국임이 명시된 조항은 그대로 살아남게 되었다.

1882522일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미 조약이 체결된지 5일후 영국의 조지 윌레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위해 인천에 도착했다. 영국 해군제독은 청 조정의 명령서를 지참하고 왔다. 마건충은 조선과 영국 사이 조약에서 조선의 속방 조항을 넣으려 했지만, 영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딛쳐 미국과의 조약에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타결한다. 그해 66일 조선과 영국은 마건충의 중재로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이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도 수교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은둔의 왕국 조선은 서양제국들에게 문호를 열게 된다.

 

조영통상조약(영문), 서울시 유형문화제 109호 /문화재청
조영통상조약(영문), 서울시 유형문화제 109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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