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이후, 다시 淸의 속국으로 돌아간 조선
임오군란 이후, 다시 淸의 속국으로 돌아간 조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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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파의 반격, 군란에 힘입어 대원군 재집권…청군, 군란 진압후 압송

 

김홍집(金弘集)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올렸다는 소식이 유림사회에도 전해졌다.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해 영남의 유생 1만명이 연대서명을 해 18814월 이른바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상소는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을 보니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라고 시작해 결일(結日)이든, 연미(聯美)든 모두 반대하고 쇄국정책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논리는 당시 영국의 논리였고, ()나라가 연해주를 러시아에 빼앗기고 자신의 논리로 만든 것이었다.

영남 유림들은 러시아가 우리에게 구원이 없는데 타국의 주장을 따라가다가 화를 입지 않겠느냐는 일견 타당성이 있는 주장을 펼쳤지만, 결론은 위정척사였다. 나라를 열어 서양문물을 배워야겠다는 고종의 입장에서는 만인소가 왕명을 어기는 주장이었다. 고종은 이만손과 강진규(姜晉奎)를 귀양보냈다.

이번엔 이항로(李恒老)에게서 배운 유생 홍재학(洪在鶴)이 상소를 올렸다. “중국이 시궁창에 빠지자 온 세상이 짐승 냄새가 풍긴지 3백년이나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전에 없던 조치를 취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학문을 일삼지 않으므로 아는 것이 이치에 밝지 못하고.” 홍재학은 개화로 돌아선 임금을 노골적으로 질타했다. 격분을 참지 못한 고종은 홍재학을 참형에 처했다.

 

유림들이 일어나 위정척사를 부르짖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국왕의 아버지가 역모를 꾸며 왕위를 교체하려는, 조선사에서 전무후무한 시도가 벌어졌다.

주모자는 대원군 집권시절 형조참의를 역임한 안기영(安驥泳)이었다. 그는 대원군 심복들과 거사준비를 하면서 함경도, 영남, 호남, 호서 등지에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집해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인 완은군 이재선(李載先)을 왕위에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881821일 거사일로 잡았으나 자금과 병력 조달에 실패해 거사가 무산되었다. 그러자 대원군은 역모가 발각돼 자신에게 화가 돌아올까 두려워 역모에 가담한 하수인들을 체포해 형조에 넘기고 다른 죄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안기영은 다시 거사를 꾸미다가 그의 부하 한사람이 역모를 고변하면서 음모자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주모자들과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은 모두 사사되었다. 이재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일로 죽는지 몰랐다고 한다. 대원군은 국왕의 친부라는 이유로 혐의에서 제외되어 벌을 받지 않았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의 피신을 그린 목판화 /위키피디아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의 피신을 그린 목판화 /위키피디아

 

안기영의 역모사건은 대원군이 의도한 쿠데타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군사반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하니,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1882719일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차별감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고종은 17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신식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해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했다. 별기군은 일본군 교관을 초빙해 신식 훈련을 받고, 일본에서 소총을 기증받아 무장했다. 그런데 별기군이 조직되기 이전 조선군의 주력이었던 무위영·장어영의 군인들은 별기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다.

구식군대가 13개월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달치 군료(軍料)로 식량이 나왔는데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여 있었다. 그들의 불만은 병조판서 및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閔謙鎬)와 별기군을 교육시킨 일본 장교에게 향했다. 반란군은 무기를 탈취해 포도청을 습격해 옥에 갇힌 동료들을 구출하고 위정척사파 8백여명을 석방했다.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자 왕십리와 이태원의 빈민들이 합류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자들은 대원군의 적들을 겨냥했다. 반란군은 병조판서 민겸호의 집을 습격해 파괴하고 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을 살해하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민비를 죽이려 했다. 민비는 궁녀로 변장해 충주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폭도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와 공관직원들은 인천으로 도피했다. 별기군을 훈련시키던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와 일본인이 살해되었다. 인천으로 도망간 하나부사 공사는 월미도로 피신해 그곳을 지나던 영국선박 플라잉 피시호를 얻어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반란군들은 대원군에게 달려가 정계복귀를 요청했고,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로써 대원군은 은퇴한 이후 9년만에 복귀했다. 대원군은 자신의 장남이자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李載冕)을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하게 해 군권과 재정권을 주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작은 배를 타고 월미도로 피신하는 모습의 목판화 /위키피디아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작은 배를 타고 월미도로 피신하는 모습의 목판화 /위키피디아

 

청 조정은 조선에서 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도쿄에 갓 부임한 주일공사 여서창(黎庶昌)의 보고를 받고 알게 되었다. 여서창은 73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군란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직예총독 겸 북양대산 이홍장(李鴻章)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 안후이(安徽) 성에 가 있었고, 이홍장의 막료인 장수성(張樹聲)이 직예총독을 겸하고 있었다.

 

마건충 /위키피디아
마건충 /위키피디아

 

임오군란은 청에게 중대한 사건이었다. 단순히 조공국의 내란에 그치지 않았다. 자칫 하다간 일본이 무력으로 개입할 경우 오키나와의 류큐국(琉球國)처럼 조선을 일본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장수성은 일본군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청군을 조선에 파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1일 여서창은 일본 정부가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고 장수성에게 알렸다. 장수성은 서둘렀다. 장수성은 북양함대 정여창(丁汝昌) 제독에게 마건충(馬建忠)을 탑승시켜 조선에 빨리 출병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일본이 더 빨랐다. 황급히 도망쳤던 하나부사는 812일 일본군을 이끌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군함 4, 수송선 3, 육군 1개 부대를 이끌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청의 북양함대는 오장경(呉長慶)이 이끄는 회군(淮軍) 5개 대대 3천명을 태우고 820일 경기도 남양만에 도착했다. 청군이 남양만으로 간 것은 이미 일본 함대가 제물포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오군란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일본군이 한양에 발을 들이밀었고, 또한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청군이 한양에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군은 현재 용산 미군기지가 있는 자리에 주둔했다. 이때부터 용산은 외국군의 기지가 되었다.

 

늦게 도착했지만 청군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가장 큰 문제는 대원군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여부였다. 조선의 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조 대비의 조칙을 얻어 대원군을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이홍장의 막료인 설복성(薛福成)은 대원군을 체포해 청으로 압송할 것을 제안하면서 류큐에서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조선이 일본에.넘어갈 수 있다며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825일 마건충이 한양으로 들어가고 뒤어어 오장경과 정여창이 이꾸는 군사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한양에 입성했다. 그날 저녁, 대원군은 청군 사령부로 인사차 답방을 갔다. 마건충은 필담으로 대원군에게 청의 황제가 책봉한 고종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텐진(天津)으로 가서 황제의 칙령을 기다릴 것을 통보했다. 그 즉시 청의 병사들이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남양만에 정박해 있는 군함으로 데려가 다음날 텐진으로 압송했다. 그의 재집권은 한달만에 끝났다.

아직도 투항하지 않은 반란군은 고종의 형 이재면의 지휘 하에 있었다. 고종은 청군에게 신하를 보내 반란군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청군은 이재면을 체포한 후, 반란군의 거주지인 이태원과 왕십리를 포위 공격해 군란 주모자들을 잡아 참수했다. 이 진압작전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조선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청의 광서제(光緖帝)는 상중에 있는 이홍장을 복귀하도록 조치했다. 이홍장은 대원군을 납치하면서 원()나라가 고려 충혜왕(忠惠王)을 중국에 유배시킨 고사를 들추며 정당화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청에 압송되어 텐진 보정(保定)에서 3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다 188510월에 귀국한다. 그 사이에 장남 이재면이 세 번이나 텐진에 가 아버지를 봉양했다.

충주로 피신했던 민중전이 돌아오고 고종이 다시 친정하게 되었다. 이후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외척들이 정권을 장악해 새롭게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위정척사파들은 완전히 목소리를 죽이고, 전국의 척화비도 철거되었다.

 

연기 척화비, 양산척화비, 청주 척화비 /문화재청
연기 척화비, 양산척화비, 청주 척화비 /문화재청

 

군란이 진입되자 일본은 피해보상과 추가적인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조선은 김홍집을 전권대사로 내세워 일본과 협상했다. 청의 마건충은 김홍집에게 일본의 요구에 대해 각 조항마다 세세하게 간섭하며 협상 조건을 따지고 들었다. 828일 조선과 일본은 제물포항에 정박한 일본군함 히에이(比叡) 호에서 조일강화조약(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일본인 살해범을 처벌하고 죽은 일본인을 장사지내며 50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부산·원산·인천항에서 일본인의 활동반경을 100리로 확장하며 일본 외교관과 수행원 가족의 내지 여행을 허용한다는 것 등이다.

 

청일 양국군의 조선 동시파병은 청국군의 승리로 요약되었다. 청은 병자호란 때 체결된 종주권을 활용했고, 군사력에서도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다.

청국군은 18835월에 절반만 남기고 출국했지만 여전히 15백명이 용산에 주둔했다. 청국군의 주둔은 조선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종은 청군이 군란을 진압해준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조영하와 김홍집을 사절단으로 청에 보냈다. 청의 마건충과 정여창도 동행했다. 104일 이홍장과 마건충은 조선의 사절단에게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주었다. 청과 조선의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을 해 체결한 조약이 아니라, 청의 황제가 내린 일종의 칙서였다.

장정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은 오랫동안 제후국으로 전례(典禮)에 관한 것에 정해진 제도가 있다. 다만 각국이 수로(水路)를 통해 통상하고 있어 해금(海禁)을 속히 열어 양국 상인들이 일체 상호 무역하여 함께 이익을 보게 해야 한다. 변계(邊界)에서 호시(互市)하는 규제로 시의에 맞게 변통해야 한다. 이번에 제정한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이며, 각국과 일체 같은 이득을 보도록 하는데 있지 않다.”

장정은 첫 구절부터 조선이 제후국이고 속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정은 일본·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달리 청나라가 조선에 시장을 열어 베풀겠다는 취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호시(互市)란 중국이 북방 오랑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교역하도록 연 시장을 말한다. 조선은 속국이므로 호시를 열 듯 바다를 개방하겠다는 뜻이다.

장정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문서였다. 개화파에게 청나라는 큰 장벽이 되었다. 그 충돌이 2년후 갑신정변(1884)으로 나타난다.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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