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콜레라 전염병 돌자 금줄 치고 부적 붙여
조선말, 콜레라 전염병 돌자 금줄 치고 부적 붙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1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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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 관념 부족하고, 불결해 전염병 빠르게 확산…서양 선교사들이 치료와 예방

 

1895년 여름에 조선 땅에 콜레라가 번졌다. 조선시대에 콜레라는 호열랄(虎列剌)이라 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캐나다인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박사의 지휘 아래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치료에 앞장섰다. 애비슨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해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한 인연으로 10년간 왕실 주치의로 활동한 의사이자 선교자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콜레라 환자 수천명을 치료했고, 전염병에 대해 무지한 조선인들을 계몽했다. 그들은 콜레라의 발생원인과 예방지식 등을 한글로 자세히 적은 인쇄물을 배포하고 예방에 힘썼다. 그 덕분에 기독교 선교활동이 활발해 졌다는 분석도 있다.

그 때의 기록은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이 쓴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 자세히 나온다.

 

언더우드 부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병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지기 시작했고,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들이 낮에 송장이 되기도 했으며 한 집안에서 몇 식구가 같은 날에 죽기도 했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병이 번져서 날마다 환자가 불어났다. 그 위세는 도저히 걷잡을 수도 없고 한치의 어김도 없으며,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정확한 수는 헤아릴수 있었다. 송장은 모두 성문을 통해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심할 때, 사망자는 하루에 3백명 이상 되었다.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와 부인 릴리어스 호튼. /위키피디아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와 부인 릴리어스 호튼. /위키피디아

 

조선 정부의 전염병 대책은 허술했다. 조정은 시퍼런 사과며 수박, 오이 따위를 먹는 것을 막아보려고 그런 음식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에게 엄벌을 내린다는 금지령을 내리고, 곳곳에 포고문을 붙였다. 그런데 언더우드씨가 그런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파는 좌판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좌판 장수 뒤에 포고문이 붙어 있었는데도 순경들이 보란 듯이 그 금지된 과일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관리들이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조선 정부가 임시로 응급 병원으로 세우고 위생법을 실시하고 돌림병이 번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재정을 지출했지만 그 돈은 탐욕스런 아랫 것들이 먹어치웠다고 언더우드 부인은 전했다.

 

언더우드 부인이 전한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의 위생상태는 엉망이었다.

구정물이란 구정물은 좁고 불결한 도랑으로 흘렀고, 도랑에는 쓰레기로 막혀 길거리는 구정물로 넘쳐 흘렀다. 푸르스름하고 끈적끈적한 물이 마당에, 또 길가에 그냥 고여 있고, 우물은 바로 곁에 더러운 옷을 빠는 시궁창 물로 더렵혀져 있었다.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행동들이 예사롭게 저질러졌다. 팔에 안긴 아이들은 시퍼런 오이를 날로 먹고 껍질도 안 벗긴 씁쓸한 과일과 채 익지도 않은 뜨거운 떡을 그냥 먹었다. 조선 사람들은 지저분한 물에 행군 나물을 곁들여 찬밥과 더운밥을 마구 먹어 치웠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콜레라를 쥐병이라 불렀다. 콜레라에 걸리면 쥐가 다리 안쪽을 콕콕 깨물면서 기어 다니다가 가슴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쥐의 넋에 기도하고 집 대문에다 고양이 그림을 걸어 놓기도 했고, 고양이 가죽으로 쥐가 난 곳을 문지르기도 했다.

조선사람들은 또 부적도 붙였다. 병이 퍼진 거리에는 금줄을 치고 부적을 덕지덕지 붙였는데 금줄을 하도 많이 쳐놓아 가마가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어디에나 종이 부적들이 붙어 바람에 찢기고 비에 너덜거렸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 부적을 쓸모없는 귀머거리 귀신들에게 바치는 미신이라고 했다.

 

연세대 언더우드관 /문화재청
연세대 언더우드관 /문화재청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서양인들이 하는 병원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인 의사가 집에 찾아가도 조선인들은 진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조선 약품을 써도 막무가내였다. 조선인들은 외국인들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그러다가 서양 의사들이 환자들을 살려내자 병원을 찾게 되었다. 서양 의사들은 조선 국기(태극기) 위에 적십자를 그려 병이 퍼진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들로 간호사 지원자를 모아 조를 짰다. 그들 밑에 양반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살롤(페닌살리산실염)이라는 약을 구해 처방하고, 환자들을 따듯하게 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적인 정성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다. 조선인들은 기독교인들은 무엇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지라며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런 덕분에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언더우드 부인은 전했다.

 

언더우드의 병원에서는 172명의 환자를 받았고, 그 중에 62명이 죽고 나머지는 모두 회복되었다. 조선인들은 기독교 병원에 오면 죽지 않고 살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선전문을 담벼락에 붙여 놓았다.

7~8월 무더위가 가시면서 콜레라는 진압되었다. 당시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미국 공사를 통해 콜레라 치료와 확산 방지를 위해 애쓴 서양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조선의 내무대신은 비단 두루마기와 부채, 은제 잉크스탠드, 강화도 갈대로 만든 방석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서양 선교사들이 교회를 짓도록 기금을 내놓았다.

 

고종이 올리버 애버슨에게 하사한 족자(등록문화재 656호). 족자의 글은 ‘投良劑堯帝時巫咸’(투량제요제시무함)인데, ‘좋은 약을 지어주는 것이 요나라 황제 때의 무함이다’라는 뜻이다. /문화재청
고종이 올리버 애버슨에게 하사한 족자(등록문화재 656호). 족자의 글은 ‘投良劑堯帝時巫咸’(투량제요제시무함)인데, ‘좋은 약을 지어주는 것이 요나라 황제 때의 무함이다’라는 뜻이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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